한국 사정 모르고 왔다가 ‘생고생’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1.04.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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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교포 ‘한국 잘 안다’ 17%뿐…한약 안 팔리자 야간경비·막노동으로 체재비 충당

 중국교포 李모씨(42)는 모국을 찾은지 두달째 접어들자 초조함을 가누기 힘들다. 이씨는 한국 한번 안 다녀오면 ‘사람축에도 못끼는’ 현지 한인사회의 분위기도 있고 잘만 하면 한밑천 잡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2월말 빚을 얻어 산 한약을 여러 꾸러미 들고 인천행 페리호를 탔다.

 그러나 막상 와보니 모든 게 생각 같지가 않았다. 충주에 있는 친척집에서 보름 남짓 묵다가 눈치가 보여 아예 짐을 싸들고 나왔다. 서울 용산역 부근의 한 여인숙에 한달계약으로 하루 3천5백원짜리 잠자리를 정한 지 보름이 넘는다. 밤낮없이 약가방을 들고 지하철역을 전전하지만 아직 5분의 1도 못 팔았다. 컵라면과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다가도 친척집에 맡긴 막내아들이 생각나면 눈물을 삼키기 일쑤다. 함께 온 남편이 서울의 한 공사판에서 야방(야간경비)일을 시작한 뒤부터는 새벽녘이나 돼야 손바닥만한 여인숙 방에서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한약 못 판 교포 ‘자살’하기도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미싱일을 하던 이씨는 팔자에 없는 노점상 신세에 기가 막히지만 돌아갈 배삯이라도 마련하자면 별 수 없다. 가져온 약을 다 못 팔면 식당이나 막노동판으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 오기 전 이씨는 옆 마을 누군가가 약을 못 팔고 귀국한 뒤 빚 때문에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야 그 말이 실감난다.

 그래도 이씨는 한국이 좋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루종일 미싱을 돌리다 집에 가서 자고 나와 또 미싱에 앉는 단조로운 생활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 때문이다. 28년간 공장을 다닌 남편 월급이 1백40원(한국돈 약 2만원)인데 여기서는 훨씬 큰 돈을 금장 벌 수 있다는 기대도 있다. 비록 사람대접은 못 받아도 한번 ‘사는 맛’을 알고나니 도저히 돌아갈 맘이 생기지 않는다. 돌아가더라도 다시 예전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 교포처녀가 북경공항까지 배웅해준 약혼자를 버리고 김포공항에 근무하는 한국 총각과 결혼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이씨는 이 소문이 조금 과장된 듯하지만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교포의 모국방문이 많아지면서 이씨와 같은 경우를 자주 볼 수 있게 됐다. 정부에서 한약을 대량 구입해주는 식의 응급대책도 한계에 부딪혔다.

 지난 3월28일 사단법인 韓中蘇협회는 ‘중국교포정책,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다. 여기서 이 협회 부설 북방연구소 米英順(43) 수석연구원은 모국 방문 교포 2백여명을 대상으로 한 방문·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교포들은 서류상으로는 모두 친척방문을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77.5%가 장사나 취업을 해보려고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중 공장이나 막노동판에 취업한 사람도 있기는 하나 귀국 경비 등을 조달하기 위해 90%는 한약노점상으로 나서고 있다.

 교포들의 여행경비는 우리 돈으로 2백만~7백만원이 57.1%, 50만~1백만원이 25.8%로 나타났는데 이 가운데 대부분은 한약을 구입하는 데 쓴 것이다. 이는 중국돈으로 1만~5만원에 해당된다. 5만원이면 월 2백원 정도 받는 보통 월급쟁이가 한푼 안쓰고 21년을 모아야 하는 큰 돈이다.

 교포들이 한국을 방문하려면 반드시 한국에 있는 친척의 초청장을 관할 공안기관에 제출해야 한다. 이번 조사결과에 따르면 초청자의 20%는 피초청자를 만나지도 않았거나 가공인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친척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경우는 28.8%에 불과했다. 잠잘 곳이 마땅찮은 교포들은 서울의 양동 미아리 동대문 용산 등의 여인숙에 집단으로 기거하고 있다.

 이들이 한국에 와서 겪는 어려움은 주로 경비부족(64.8%)과 체류기간 연장 곤란(11.8%)이다. 따라서 이들은 수속대행(27.5%)과 약재판매 편의(25.4%)를 원하고 있다. 방문기간 중 공원(23.4%) 관공서 및 산업시설(14.8%) 명승지(9.9%) 등을 다녀본 사람도 많지만 절반 정도(45.7%)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한약을 파느라 관광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으리라고 짐작될 뿐이다.

 교포들은 대개 3개월의 체류허가를 받는데 기간을 연장하려면 법무부장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번 조사에서 3개월 이상 체류자는 18.1%로 나타났는데 아예 5~6년씩 눌러앉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들은 마땅한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은 듯 90%가 체류기간 연장의 이유로 건강악화를 내세웠다. 어학원에 등록하거나 관계당국에 ‘손을 써서’ 남는 경우도 더러 있는데 체류기간 연장 허가가 무원칙하게 행해져 교포들 사이에 불만이 적지 않다.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특징 중 하나는 교포 가운데 상당수가 신분이 밝혀지는 것을 꺼린다는 사실이다. 다른 질문에 대한 응답 회피율은 15~20% 정도였는데, 자신의 신상문제를 물어보면 40%가 입을 꼭 다물었다고 한다. 한·중간 국교가 수립되지 않아 중국교포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응답자를 거주지별로 보면 하얼빈과 아성 등 흑룡강성 출신이 37.4%로 가장 많고 그밖에 요녕성(26%), 연변 및 길림성(17%) 출신 순이었다. 하얼빈공업대학에서 정밀기기를 가르치는 孫昌秀(56)씨는 “흑룡강성 조선족은 대부분 남한 출신 교포지만 연변쪽에는 북한 출신이 80~90%이기 때문에 그쪽 사람들의 방한은 많지 않다”고 설명한다. 또 요녕성 심양에는 북한 영사관이 있어 여권을 발급 받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한국을 ‘잘 모른다’거나 ‘그저 그렇다’라고 대답한 교포는 모두 46.0%인 반면 ‘잘 알고 있다’는 응답은 17.0%에 불과했다.

 10년 후 한·중 양국의 경제발전 전망에 대해 ‘한국이 더 발전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34.6%, ‘중국이 더 발전할 것’이란 응답자는 13.5%, ‘비슷한 수준으로 될 것’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21.8%였다.

 한국에 대한 인상은 ‘호감이 간다’와 ‘보통이다’가 각각 32.5%로 같고, ‘부정적이다’가 14.4%였다. 국내 교포문제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방한 중국교포에 대해 조사한 결과는 ‘딱하기는 하나 너무 심하다’(31.4%) ‘참고 도와야 한다’(30.0%) ‘이해할 수 있다’(25.7%) 순으로 나타났다. ‘몰지각한 행동에 분노’하는 사람도 12.9%로 적지 않았다. 교포 지원에 대해서는 87.1%가 적극적인 입장을 보였고 그 형태는 ‘반관반민의 전감기구’(52.9%)가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한인사회에 ‘한탕주의’ 만연
 미박사는 이번 연구를 통해 드러난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잔뜩 기대를 품고 왔다가 실망하는 교포들이 많다. 올 1~2월 중 인천항을 통해 들어온 교포수만도 6천명에 달하는데, 이들이 한국에서 가진 나쁜 감정을 귀국한 뒤 터뜨리면 한인사회에 악영향을 끼칠수도 있다. 또 잘만 하면 중국에서 10년간 벌 돈을 3개월만에 한국에서 챙길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한인사회에 한탕주의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다. 근로의욕을 잃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돈을 좀 벌어간 사람 가운데 도박에 빠지거나 축첩을 하는 사례까지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최근 흑룡강성 당국은 그동안 무제한 허용하던 한국방문을 ‘2년내 재방문 금지’로 묶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전히 중국교포의 불법취업과 불법체류는 늘어나고 있으며 이는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모국에서의 불친절과 멸시를 참다못한 몇몇 교포는 “인간대접을 해달라”고 불평하기도 했다. 중국과 국교수립이 안된 상태에서 국적상 중국인인 교포가 사고를 당할 경우 한·중간 외교문제로 비화할 가능성도 있다.

 미박사는 “정부가 장기적 대책없이 규제나 처벌 위주로 교포문제에 대응한다면 위장결혼·범죄집단과의 연계·마약밀수 등 더 큰 문제를 낳을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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