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출연 연구소 “내 목소리 달라”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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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 조합원, 임금협상 초강경 대응에 반발… “보고서 통제된다” 주장도

 “정부 출연 연구기관의 올 임금인상률을 5~7%로 고수하라. 정부 출연기관들이 임금인상과 관련하여 정상운영이 안될 때는 폐쇄도 불사하겠다.” “경제기획원 산하 4개 기관의 임금교섭이 3월말까지 타결되지 않으면 기관장을 문책하겠다.” “정부 출연기관이 4월말까지 임금협상을 타결하지 않을 경우, 예산의 배정을 중단하고 파업에 들어갈 경우 직장폐쇄 조처를 내리겠다.”

 정부 출연 연구기관 노조의 임금 두자리수 인상 요구에 대해 최근 노재봉 총리와 진념 경제기획원 차관, 최각규 부총리가 정부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위와 같이 잇따라 초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자 노조 조합원들이 크게 반발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정부의 이같은 태도는 정부기관 노동자들의 임금협상 결과를 생산직 노동자의 춘투 때 이용해온 구태의 재현이자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 사이에서 싹트고 있는 자율성 회복 의지를 말살하려는 기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전문기술노련 위원장 김문철씨는 “정부 출연 연구소는 엄연히 법률에 의해 설립된 것인데 노총리가 어떻게 문을 닫아버리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다. 노총리는 마치 사용자가 단체협약안을 내놓듯이 임금 인상률까지 제시했는데 그렇다면 마땅히 그가 사용자 대표로서 각 단위 노조의 단체교섭에 일일이 응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는 명백한 제3자 개입이다”라고 주장했다.

 정부 출연기관 임금 및 단체협약 승리를 위한 공동투쟁위원회대변인 전형민씨(정신문화연구원 노조위원장)는 “정부는 87년이후 매년 정부기관 노동자들을 윽박질러 한자리수 인상을 받아들이게 한 다음 그것을 언제나 생산직 노동자들의 코앞에 들이밀곤 했다. 그러나 올해 만큼은 정부 뜻대로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전씨는 “집값 및 전월세값의 폭등과 최근의 물가앙등으로 기업인들은 물론 정부 관계자들도 올해 한자리수 임금인상은 무리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또 6천명에 불과한 정부출연기관 종사자들의 월급을 두자리수로 올려준다 해서 정부살림이 쪼들리게 될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이렇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연구기관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기 때문이다”라고 풀이했다.

 ‘석·박사 노동자’도 대거 참여하고 있는 이들 노조의 조합원들은 막대한 국민의 세금을 투자해 설립한 정부 출연 연구기관들이 지금처럼 정부의 논리를 개발하는 데만 골몰한다면 우리나라의 2000년대의 희망이 없다고 얘기하고 있다.

 전국전문기술노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근 몇 년 동안만 해도 각 연구소에서 연구원들이 조사한 결과를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해 발표하거나 아예 묵살해버린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정부입장 앵무새처럼 나열하고 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지난 89년 3월29일 발표한 <최근 경제동향과 경기전망>이란 보고서에서 노사분규와 임금인상이야말로 물가상승과 경기침체의 주요 원인이라고 전제하고 무노동·무임금 원칙, 공권력의 적극개입, 노동법 개정 움직임 저지 등 경제외적 강력조처를 제안했다. 이어 같은 해 5월6일에 발표한 <임금과 국민경제>란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전개하며 국가 임금위원회의 설치, 지나치게 임금을 인상하는 기업에 대한 금융·세제상의 불이익 조처 등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한국개발연구원 노조는 성명을 발표, “연구결과에 관계없이 개발독재시대에 학습된 논리로 정부입장을 앵무새처럼 나열하고 있다”고 반박하고 “그간 KDI에서는 특정보고서가 연구책임자의 명의로 발표되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번에는 KDI의 전체 명의로 발표되었다”고 지적했다.

 KDI에서는 지난 85년에도 <2000년대 국가 장기발전 구상(총괄편, 공업)>이란 연구결과를 정부의 당초 의도에 맞지 않는다 하여 1년 동안 발표를 미뤘다가 정부측 의도에 맞게 수정한 뒤 발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89년 9월 체신부와 통신공사에 대한 국정감사 때 야당의원들은 전화국에 설치된 블랙박스가 도청에 이용되고 있는 혐의가 짙다면서 해명을 요구하고 나섰다. 당시 이 블랙박스의 개발에 깊숙이 간여했던 한국전자통신연구소는 개발목적과 용도를 끝내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통신연구소 노조는 “전문위원들로 특별감시반을 구성해 진상을 규명하자”고 요구했으나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여성개발원에서는 85년 여성고용촉진법에관한 연구를 마치고 결과를 발표하려 했으나 보사부가 시기상조라며 제지해 국회에서 남녀고용평등법이 통과된 뒤인 88년에야 보고서를 내놓았다. 86년에는 1년3개월간 연구예정으로 <도시 저소득층 빈민 여성 실태> 조사에 착수했으나 연구 시작3개월만에 외압에 의해 ,도시 저소득층 모자 가족에 대한 연구>로 궤도를 수정했다. 또 같은해에  <농촌여성 건강실태> <농촌여성 노동실태>에 관한 연구를 시작했다가 보사부측에서 연구방향에 대한 “발상전환‘을 요구해 그렇고 그런 맹물 조사결과를 발표해야 했다.

 지난해 12월 한국원자력연구소는 안면도 사태와 관련하여 국정감사 때 곤욕을 치렀다. 국감에서는 정부가 발표했던 것처럼 안면도에 사용후핵연료 저장시설만 건설하려 했는가 아니면 옷가지 등 중저준위 폐기물의 처리장 건설도 함께 하려했는가가 쟁점이 됐었는데, 당시 원자력연구소장이 석연치 않은 발언을 많이 해 과학기술처측의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때 연구원 내부에서는 “정부측이 <원자력 폐기물에 관한 연구>를 공개해 사회적으로 논의가 되게 해야 한다는 연구원들의 의견을 묵살해 안면도사태가 일어나고 말았다”는 불만이 터져나왔다고 한다.

 전문노련의 관계자들은 이밖에도 별다른 이유 없이 배포가 유보되고 있는 보고서가 상당수 있다고 전한다. 특히 환경문제에 대한 보고서의 통제가 심한데 정부 출연 연구소가 제 기능을 발휘했다면 지금과 같은 수돗물 난리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하기도 했다.

기관의 난립도 문제점으로 지적돼
 정부 출연기관에서 이같이 잡음이 계속 일어나고 있는 까닭은 기관장을 비롯한 이사진이  전현직 관료나 예비관료, 혹은 청와대·군출신 등 친정부 인사 일색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단적인 예로 에너지관리공단의 경우 초대 이사장인 김용범씨는 군단장, 2대 이사장 문홍구씨는 합참 본부장, 현재 이사장 최상화씨는 해군참모 총장 출신이다.

 현재 과학기술원 산하 과학정책연구평가 센터에서 노조원뿐만 아니라 간부들까지 철야농성 등을 벌이며 신임 소장에 전 과기처차관이 최영환씨가 임명된 데 대해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직원들은 “김영우 전 소장이 임기가 끝난 것도 아니고 본인이 물너날 뜻을 밝힌 것도, 임기중 중대한 과실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경질 된 것은 정부 출연기관이 정부부처와의 관계에 있어서 반노예상태에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 출연기관의 난립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정부 각 부처 산하에 설립돼 있는 연구기관은 60여개에 달하는데 기본적으로 업무가 중복되고 교통정리도 안돼 있어 예산낭비가 심하다는 비판이 높다. 심지어는 “퇴직 공직자가 늘 때마다 연구원이 하나씩 설립되곤 한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서울대 공대의 한 교수는 “정부 출연 연구소의 기관장들은 보신에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연구보다도 외교를 하는 데 시간을 더 많이 보낸다. 그러니까 연구과제도 첨단과학이라는 이름의 부담없는 뜬구름잡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언론플레이는 능해서 전문가가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연구결과를 과대 선전하는 꼴불견을 연출하곤 한다.”고 꼬집는다.

 정부도 정부 출연기관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는 있다. 과학기술정책 연구평가센터에서는 현재 연구기관의 자율성 제고를 위한 방안이 다각도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연구원간의 경쟁을 촉진하기 위해 연구실적에 따라 매년 급여를 재조정하는 연봉제를 도입할 것이란 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어떤 제도도 “정부에 대한 충성심이 연구원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현장의 목소리가 반영되지 않으면 실효를 거두기는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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