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젖’이 뜯어말린 분유전쟁
  • 김방희 기자 ()
  • 승인 1991.04.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남양·매일·파스퇴르 광고 않기로…출혈경쟁 벅차 ‘모유권장’소비자운동 받아들여

 ‘소비자문제를 생각하는 시민의 모임’(대표 金淳)과 주한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랄프 디아스), 남양 매일 파스퇴르 등 3개 분유업체는 지난 4일 서울 중구 태평로 1가에 있는 프레스센터에 모여 분유광고를 중단하기로 합의했다.이로써 그동안 신문과 방송을 통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던 분유업계의 ‘광고전쟁’은 끝나게 됐다. 이 합의식은 지난달 28일 열릴 예정이었으나 남양유업이 불참하여 무산되었다가 일주일만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날 합의된 사항의 골자는 신문(4월1일부터) 잡지(5월호) 라디오(4월1일, 지방은 4월5일) 텔레비전(5월5일)을 통한 분유광고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그외에 아기사진과 그림, ‘모유화’ ‘어머니 젖에 가까운’ 등의 표현을 분유통에서 없애고, 유아용 제품이 생육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보건관계자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을 표시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지키는 새로운 포장표시 제품은 9월1일부터 시판하기로 합의했다.

 이 합의식은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이하 시민의 모임)의 적극적인 문제제기로 성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모임에서는 83년 6월부터 어린이 건강을 지킨다는 취지에서 엄마젖 먹이기 권장사업을 벌여왔다.

 이 모임의 姜光波 이사는 “지금까지는 주로 모유의 우수성을 확보하는 데 역점을 두어왔다. 그런데 분유업체의 광고는 마치 분유를 먹이는 것이 더 좋은 것처럼 소비자를 현혹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런 광고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할 필요가 생겼다”라고 분유광고 중단 합의를 추진하게 된 동기를 설명했다.

 작년 6월에는 80년대초부터 ‘엄마젖 먹이기’를 4대 역점사업의 하나로 추진해오고 있는 주한 국제연합아동기금이 합세했다. 주한 국제연합아동기금의 朴東? 대외담당관에 따르면 분유광고 제한조처는 ‘세계적 추세’이다. 기업들의 무분별한 판촉활동으로 전세계 어머니가 아기에게 젖먹일 권리를 침해받고 있다는 인식에서 81년 5월 세계보건기구(WHO) 총회에서 모유대체식품에 대한 국제규약이 채택되었다.

매출액의 6~8% 광고비로 과다지출
 남양유업(대표 洪源植) 매일유업(朴永錫) 파스퇴르유업(崔明在) 3개 업체가 소비자 단체의 이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시민의 모임’쪽의 말처럼 “소비자운동이 불량품을 고발하고 보상이나 받아내던 차원에서 소비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나서 업계를 변화시키는 수준으로 높아졌다”는 것도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상호 비방광고까지도 주저하지 않았던 ‘진흙탕 개싸움’식의 광고전을 생각하면 3개사의 합의는 단지 ‘소비자의 힘’때문이 아니다. 분유업계의 사정은 워낙 복잡하다.

 분유업계의 복잡한 사정은 3개사의 시장 점유율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우유·분유업계 관련 자료를 집계하고 있는 대한유가공협회는 “파스퇴르가 비회원사일 뿐만 아니라 시장점유율을 발표했다가 곤욕을 치른 적이 있어서 점유율을 공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88년 남양쪽에서 협회 자료라면서 자신들의 조제분유 시장점유율이 79.98%라고 광고하자 매일쪽에서는 즉각 협회가 공시적인 자료를 발표한 적이 없으며 그 자료는 날조된 것이라는 광고를 냈다. 그 와중에서 협회가 두 회사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음은 말할 것도 없다. 현재 3개사가 밝히는 남양 매일 파스퇴르의 시장점유율은 각각 67:30:3(남양) 62:35:3(매일) 48:40:12(파스퇴르)이다. 너무나 큰 차이가 난다.

 분유시장 자체는 약간씩 줄어드는 추세다. 엄마젖 먹이는 비율은 30% 정도로 일정한데 신생아의 수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남양유업과 매일유업은 그동안 연간 60억원과 40억원을 분유광고비로 써왔다. 작년 7월에 분유시장에 뛰어든 파스퇴르는 월 6천만원 정도를 분유광고비로 쓰고 있다고 밝힌다. 남양과 매일의 90년 분유 추정매출액이 각각 7백억원과 4백50억원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광고비가 매출액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6~8%로 높은 수준이다. 게다가 독과점 품목이어서 가격인상을 하기도 쉽지 않아 3사간의 광고전은 말하자면 ‘출혈경쟁’이었던 셈이다.

 소모적 광고전쟁은 파스퇴르유업이 분유시장에 뛰어들면서 확대됐다. 파스퇴르는 작년 11월께부터 업계 선두주자인 남양을 겨냥, 남양유업이 동물사료용 분유를 만드는 ST식 기계를 사용하며, 고온건조처리를 하여 영양소를 파괴하고, 양잿물을 사용한다는 광고를 내보냈다. 남양족은 ‘파스퇴르가 품질을 속이는 사례’라는 제목의 연속광고를 통하여 이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편으로는 서울지방법원에 우리나라 최초로 허위비방 광고행위 금지가처분신청을 내서 승소판결을 받아냈다.

 이런 ‘원한관계’로 볼 때 3사간의 합의는 깨질 가능성도 있다. 4일의 합의식 이후에 나온 파스퇴르유업의 ‘백지광고’와 매일유업의 ‘광고중단 광고’에 대해서 남양유업쪽에서 변칙적인 광고라고 발끈하고 있기 때문이다.

합의 과정에서 ‘의심쩍은 행동’ 발생
 남양유업쪽에서는 “매일유업의 광고는 간접적인 광고라고 볼 수밖에 없다. 광고를 중단하겠다는 약속을 알리면서 왜 자기제품인 ‘맘마 1·2·3’ 분유통 그림을 실었느냐”하고 불만을 털어놓고 있다. 이에 대해 매일유업쪽에서는 “3월28일 협상 결렬 이후 매일유업만이라도 광고를 중단하겠다는 광고를 해달라는 ‘시민의 모임’쪽의 요청에 따른 광고이기 때문에 상대사가 문제를 삼을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반박했다.

 출혈경쟁을 해야만 했던 업체들로서는 시민의 모임의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하더라도 몇가지 의문이 남는다. 그 하나는 3월28일의 합의식에 불참한 남양의 석연찮은 행동이다.

 남양유업에서는 알려진 것처럼 3월28일의 합의식에 일방적으로 불참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시민의 모임’쪽에 상세한 분야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는 합의식에 참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차례에 걸쳐 알렸다는 것이다. 남양분유쪽에서는 “실무자 모임을 가진 후 1주일 안에 도장을 찍으라는 건 너무하지 않았느냐”고 당시의 불만을 털어놓았다.

 광고전을 주특기로 하는 파스퇴르가 광고를 중단하기로 한 것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대목이다. 경쟁사에서는 하나의 ‘가설’을 제시한다. 파스퇴르는 우유시장을 잠식했던 것과 동일한 방법으로 막대한 광고비를 투입했다. 그런데 분유시장의 특성 때문에 뜻대로 시장점유율을 높이지 못하게 되었다. 이도저도 못하게 된 파스퇴르는 이번 광고중단 요청을 곱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파스퇴르유업의 최명재(64)사장은 “이번 조처로 파스퇴르의 손해가 불을 보듯 뻔한데 무슨 속셈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항변한다. 그는 분유를 생산하기 전인 작년 5월께부터 파스퇴르가 엄마젖을 먹이자는 내용의 광고를 해왔다며, 우리의 모유수유율이 어린이보건에 위험한 수준까지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엄마젖 먹이기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해오던중 ‘시민의 모임’의 제의가 마침 있어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분유업계의 이번의 ‘종전선언’은 소비자와 업계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