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출판물 “난데없는 된서리”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4.2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태백산맥》 보안법 적용 논란 ‘교양도서 20선’ 압수수색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일본에서 제주도로 날아와 한·소정상회담을 갖는다는 뉴스가 전해진 날 오후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소설《태백산맥》 이적성 있다”는 검찰 발표가 나왔다.

 그 이튿날인 11일자 신문들은 1면에서 남북한 사이에 직교역 물꼬가 텨졌다는, 제주도 한·소정상회담 못지않은 톱뉴스를 앞다투어 보도했다. 그러나 이날 신문들의 사회면과 문화면에는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이적성 검토와 관련한 문단의 반응, ‘91신입생을 위한 교양도서 20선’을 강력히 규제하겠다는 검찰 발표, 그리고 ‘공안당국의 출판탄압’에 항의하는 한국출판문화운동협의회(한출협·회장 김영종)의 기자회견 내용 등이 함께 실려, 문단·출판계뿐만 아니라 일반국민까지 ‘당혹스럽게’ 했다.

‘해프닝’으로 끝난 검찰의 이적성 검토
 대검 공안부가 조정래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10권·한길사)을 ‘신중히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이 소설이 발간된 86년 무렵인 것으로 알려졌다. 89년말 이 소설이 완간되자 당시 공안부 검사들은 1권부터 5권까지는 균형감각이 있지만, 결론 부분에서 빨치산 투쟁·민중봉기·혁명을 미화했다는 분석을 내렸다는 것이다. 검찰은 여기에 운동권 학생 및 노동 현장에서 이 소설이 의식화 교재로 사용된다는 이유를 들어, 운동권 학생이나 노동자들이《태백산맥》을 의식화 학습자료로 사용할 경우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 탐독 등 혐의를 사법처리할 방침을 세웠는데, 이 방침이 “이적의 목적이 없는 순수한 독자와 저자 및 출판사는 조사·처벌하지 않겠다”는 내용과 함께 지난 10일 알려지자 곧바로 ‘불문’에 붙이기로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문단은 즉시 거센 반발을 나타냈다.

 조정래씨는 검찰 발표에 대해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면서 “남북이 탁구단일팀을 만들고 한·소정상회담이 이 땅에서 열리는 마당에 대사소설의 어느 한 부분만을 언급하면서, 갑자기 이적표현물 운운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처사이다”라고 반박했다. 작가이며 실천문학사 주간인 김영현씨는 “문학사의 중요한 성과를 문학 외적 수단으로 제재하려는 발상 자체가 어이없다”면서 “5고이절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태백산맥》은 지금까지 약 20만질(2백만부)이 나간 베스트셀러이며 평단으로부터 “80년대 한국문학의 가장 큰 성과”란 찬사를 받아왔다. 문학평론가 김윤식씨(서울대 교수)는 “우리 문학이 여기(《태백산맥》)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해방 40년의 기간이 필요했다”고 높이 평가한 바 있다. 그외에도 많은 평론가들이 이 작품을 논해, 그 평문들이 최근 책으로 묶여나오기까지 했다.

 《태백산맥》의 이적성 검토 논란이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난 데 비해, 인문·사회과학 출판물에 대한 공안당국의 ‘관리’는 출판계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최근 당국에 의해 ‘금서목록’으로 뒤바뀐 ‘91신입생을 위한 교양도서 20선’의 압수수색이 대표적 예이다. ‘납본필증을 받은’ 교양도서 20선은 전국 20여개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이 “신입생이면 누구나 폭넒은 교양을 섭렵, 세계관을 확립하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도록 하자”는 취지 아래 지난 3월초 선정, 발표한 것이다.

 이 목록(표 참조)에는 82년에 초판이 나와 그동안 40여만부가 팔린 《철학에세이》를 비롯, 문단의 주목과 함께 독자를 확보한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윤정모의 장편 《고삐》, 김하기의 단편집 《완전한 만남》 등 대다수가 베스트셀러이며 《이야기 한국 경제》 등 현재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서적도 포함돼 있다. 작가 김하기씨는 “다시 한번 표현의 자유가 없음을 절감했다”면서 “그렇다면 앞으로는 공안당국의 평가에 의해 작품을 발표해야 한단 말인가”라고 되물었다.

 그러나 검찰은 《태백산맥》의 이적성 검토가 알려진 지난 10일, 교양도서 20선 상당수가 국가보안법에 저촉되는 소위 ‘이적출판물’이라고 판단해 이 서적의 출판 및 판매를 강력히 규제하기로 했다.

 “검찰의 강력한 규제 방침이 알려지기 전부터 이 책들에 대한 불법 압수수색이 이미 있어왔다”고 한출협 김영종 회장(사계절 대표)은 밝힌다. 한출협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3월 하순, 부산 영주 대전 수원 전주 인천 서울 등의 서점에서 교양도서에 포함된 책을 영장없이 압수하거나 판매금지를 요청하는 등 ‘출판탄압’을 했다는 것이다. 한출협은 이번 탄압이 87년 10월의 출판자율화 조처-판금종용을 지양하며 도서내용의 위법성 여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따르기로 했다-에 위배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한출협, 노대통령에게 공개서한
 박용일 변호사는 출판물에 대한 이같은 규제는 “곧 닥칠 춘투를 염두에 둔 문화운동 전반에 걸친 탄압국면으로 보인다”면서 출판 탄압은 법률적으로 부당할 뿐 아니라 “남북이 물물교환을 하는 개방의 시점에서 이데올로기라는 ‘오래된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당국이 스스로 이중성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며, 이로 인해 국민의 혼란만 야기될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출협은 지난 10일 발송한 ‘노대통령께 드리는 공개질의서’를 통해 6공화국 들어 “제5공화국 전 기간의 3배에 이르는 1백2명의 출판인이 구속 수감되었으며 4백50여회에 걸친 압수, 수색이 있어왔다”고 전제하고 △6·29선언 중 제4항 언론 출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천명한 사실과 현실과의 차이 △북한과 동반자적 관계를 펼치겠다는 7·7선언과 ‘북한 바로알기’ 운동 차원의 출판이 탄압받고 있는 현실 △출판 자유를 구속하는 현행 납본제 문제 등에 대한 대통령의 견해는 무엇인지를 질의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출협은 ‘무단 압수수색’과 납본제도의 위헌심판을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을 통해 청구하기로 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