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생활 비밀과 언론윤리
  • 김동선 (편집부국장) ()
  • 승인 1991.04.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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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언론인 출신 저술가 앙리 미쉘은 2차대전 때는 레지스탕스 활약했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레지스탕스의 역사》《자유 프랑스의 역사》 등을 저술했고, 그 자신이 대항했던 파시즘에 관한 책도 썼다. 책명은 《파시즘》

 그는 이 책에서 파시스트들은 예외없이 자기의 존재 의의를 확증하려는 수단으로 가공의 적을 만들어서라도 그 적을 매도하면서 싸우는 방법을 택하고, 몇가지 목표를 가지고 매진하며, 강령을 만들어 어떤 형태로든 일관된 사실을 날조한다는 것이다. 또 이들은 의회제와 복수정당제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기피하며 정치지도자를 국민이 뽑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 개인주의, 인권,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직 국가를 최고 지상의 존재로 간주한다.

 히틀러, 무솔리니 등은 몰락함으로써 교과서적인 파시즘은 사라졌지만, 지구상에는 현재가지도 그 모방자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고, 우리 헌정사에서도 그것을 경험한 바 있다.
 유신독재와 5공을 비교해보면 5공보다는 유신독재가 파시즘의 전형에 더 가깝다. 유신독재는 ‘유신만이 살길이다’라는 날조된 사상을 가지고 국가지상주의 이외에는 자유나 개인의 인권을 철저히 무시했다. 대통령도 국민이 직접 뽑는 것을 피해 거수기에 불과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했다. 반면, 5공은 대통령을 간선으로 뽑기는 했지만, 국가공동체를 통합하는 날조된 사상은 만들지 않았다. 오로지 반대자를 공권력으로 탄압함으로써 정권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신은 파시즘의 모방이고, 5공은 단순한 군사독재였다고 해석할 수 있다.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조항은 5공헌법에서 첫 등장
 두 정권은 모두 개인의 존엄성을 무시했지만, 기이하게도 5공은 헌법에서만은 그것을 인정했다. 5공 헌법 16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는데, 이 조항은 유신헌법에는 없었던 것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사생활권 옹호의 효시는 세계인권선언이다. 동 선언 12조에는 사생활권 문제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기술돼 있다. “누구나 그 사생활 가족 가정 통신에 대한 불법적인 간섭을 받거나 그 명예와 신용에 대한 침해를 받지 아니한다. 사람은 모두 이러한 간섭이나 침해에 대하여 법의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갖는다.”

 유혈극을 빚으며 정권을 창출했던 5공세력이 개인의 존엄성에 관해 세계인권선언정신을 받아들인 것은 제스츄어였는지, 아니면 실수였는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것은 의문사 고문 감시 연금 등 모든 강압수단을 다 동원했던 5공정권의 속성과 그 헌법의 개인존엄성 조항은 서로 배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5공헌법의 그 조항은 6공을 탄생시킨 새 헌법 17조에 그대로 계승되어 국민 모두는 헌법에 의해 사생활의 비밀을 보호받게 되어 있다.

 남한사회주의 노동자동맹(사노맹) 사건으로 구속된 얼굴없는 시인 박노해씨가 지난 13일 안전기획부장과 ㅅ일보를 명예훼손혐의로 서울지점에 고소한 것은 이 조항에 근거한 것이다. 안기부가 사건과 관련없는 개인의 사생활을, 그것도 사실이 아니라 왜곡·날조해 발표함으로써 명예가 훼손됐다는 것인데, 여기서 굳이 그 발표문의 위법성 여부를 따지고싶지 않다. 왜냐하면 사생활 비밀 보호는 헌법에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검찰의 수사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할 뿐인 것이다.

안기부 발표 여과 없이 보도한 것은 언론윤리 위배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이 궁금증 이외에도 두가지 소회를 갖게 되었다. 첫째는 체제를 전복하려는 반국가단체의 이른바 ‘수괴’(안기부발표)가 공권력의 상징인 안전기획부장을 고소한 것이 보도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소회이고, 둘째는 언론의 안기부 발표문 보도 태도에 대한 씁쓸한 뒷맛이다.

 첫번째 문제는 민주화 진전에 대해서 콩이야 팥이야 하고 말이 많지만 유신이나 5공시절에 비하면 상당히 진전이 있었구나하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반국가 범죄 피의자가 안기부장을 고소한 사실이 보도된 것은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예전에는고소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같은 시기에 공안당국이 80년대 최대의 수확이라는 소설 태백산맥에 대해서 이적성 여부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여권이 헌법재판소의 무한정 소원심사권한을 축소하려는 기도가 드러나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긴 했지만 ‘사회주의 혁명가’ 박노해씨에 의해 안기부장이 피소된 사실이 보도된 것은 민주화의 폭을 실감케 했다. 그리고 이 민주화의 폭은 소위 ‘공안통치’가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진정한 민주사회란 법 앞의 평등이고, 제약없는 언론자유실현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안기부 발표를 보도한 몇몇 언론의 자세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자유를 속성으로 하는 언론이 안기부가 발표한 개인의 사생활 비밀을 여과없이 보도했다는 것은 위법 이전에 그 스스로의 윤리를 위배한 것이다. 갈수록 복잡 다기해지는 이 사회의 중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철학없는 언론’은 오히려 가장 큰 해악이 된다는 사실을 언론 스스로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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