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살…분신…위기 6공과 ‘백골단’
  • 김당 기자 ()
  • 승인 1991.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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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대협 발대식 · 강경대군 장례식 등 ‘변수’ 수두룩 “공권력 만능주의는 국민 저항 부른다” 법조계 지적

 이름도 섬뜩한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로 비롯된 ‘타살정국’이 ‘분신정국’으로 옮겨 붙은 가운데 정권 퇴진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 강경 대군이 사망한 다음날인 4월27일까지만 해도 ‘우발사고’로 단정, 안일하게 대응했던 정부 당국은 예기치 못한 대학생들의 ‘죽음의 행렬’ 앞에서도 정권퇴진운동의 도화선이 된 백골단의 해체 불가와 위헌 논란이 제기된 전투경찰대설치법의 개폐 불가라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란 속으로 빠져 들었다. 특히 대학생들의 잇따른 분신은 다분히 구호성으로 시작된 정권퇴진운동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는 결과를 낳아 정부 당국과 이른바 범민주세력의 그 어느쪽에서도 쉽게 끌 수 없는 큰불로 번지고 있다.

 한 대학생의 죽음이 밑불이 된 정권퇴진 운동이 이처럼 걷잡을 수 없는 큰불로 번지게 된 배경은 우선 범민주세력의 신속한 대응과 그에 상반된 정부 · 여당의 안일한 대응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강경대군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신민당 민주당 민중당 등 모든 야당은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를 주축으로 한 학생운동권과 국민연합을 중심으로 한 재야단체들의 ‘노재봉 내각 퇴진 및 공안통치 종식투쟁’이라는 단일전선 구축에 연대동참을 표시하여 범민주세력의 결집을 이루어냈다.

 재야 · 운동권과 야권이 재빠르게 공안통치 종식 단일전선 구축이라는 연대의 틀을 짜게 된 것은 올들어 터진 수서비리 · 페놀오염 · 원직직업병 등 대형사건으로 이미 상당한 타격을 받은 현정권이 ‘공권력 살인’ 사건으로 도덕성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는 공통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특히 강군 사건이 그 비중으로 보나 5 · 1 세계노동절 및 임금투쟁, 5 · 18 광주민주화운동, 6월 항쟁과 광역의회선거 등으로 이어지는 시의성으로 보나 자신들의 투쟁목표를 크게 부각시킬 돌파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33개 재야 · 운동단체와 3개 야당은 별다른 이견 없이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과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범국민대책회의’)를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4월27일 연세대 학생회관에서 결성된 ‘범국민대책회의’가 이끌어낸 첫 대응조처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은 단순히 백골단이라는 몇몇 ‘폭력배’의 과격함에서 비롯된 돌발사고가 아니라 노태우 민자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폭압적 민중탄압의 결과”라는 사태 규정과 △노태우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 발표 △노재봉 내각의 총사퇴 및 내무장과 · 치안본부장 등 경찰 관련자의 구속처벌 △정권의 방패막이인 백골단과 전투 경찰의 해체 등 현정권에 대한 세가지 요구 사항을 발표한 것이다. 이때만 해도 ‘노정권 퇴진’은 요구사항에 포함되지 않았다.

 물론 그보다 더 일치된 범민주세력의 공감대는 공권력의 사병화에서 비롯된 일련 ‘등식’에서 엿볼 수 있다. 곧, 강군 사건이 터지자 오랜 기간 반독재투쟁의 길을 걸어 온 재야와 야당이 “반민주 독재정권 종말의 신호탄은 늘 공권력, 그것도 최일선에 설 수 밖에 없는 경찰력의 남용이 쏘아왔다”는 공식을 떠올린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야권과 재야는 ‘강권통치 방식’의 한 상징적 결과물인 ‘백골단의 타살’ 사건을 4 · 19=김주열, 10 · 26=부마사태, 6· 29=박종철 · 이한열 등 정권말기적 ‘사건 등식’의 연장 선상에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여당의 상황인식 ‘자신감’ 엿보여
 그러나 정부 · 여당의 시각은 판이하게 달랐다. 본질적으로 5공 때의 악몽을 애써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정부 · 여당은 “일선 지휘체계의 잘못에 따른 우발적 사고”라는 기본 시각의 바탕 위에서 “그때와는 다르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적어도 5공과 전임 대통령이 걸어온 길과 반대편으로만 가면 점수를 잃지 않는다는 계산에서 이른바 ‘이미지 메이킹’으로 5공과의 단절 · 차별성을 부각시켜온 정부 · 여당은 이번 사건에서도 우선 사건을 은폐 · 왜곡하지 않고 사실대로 밝혔으며 비교적 재빠르게 현장 지휘자와 관련 장관에게 책임을 묻고 국무총리가 사과까지 했다는 점에서 “5공과는 다르지 않느냐”는 입장인 듯하다.

 게다가 정부 여당은 “그때와는 시대가 다르다”는 인식에서 어떤 자신감마저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같은 자신감은 강군 타살사건이 터진 지 사흘 만에, 자신이 주재한 치안장관회의 자리에서 발언한 것을 간접 전달한 노총리의 사과의 뜻(4월29일)이나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의 청와대 정례회담 자리에서 나온 노대통령의 사과(5월2일)에서 엿볼 수 있다.특히 이같은 자신감은 5월3일 청와대에서 가진 청년회의소 간부들과의 다과회 ㅗ임에서 “민주화가 이뤄진 상황에서 빚어진 강경대군 사건은 과거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있었던 희생과는 구별돼야 한다”라고밝힌 노대통령의 발언에서 확실하게 드러났다. 그밖에도 노대통령은 “에전과는 다른 민주화된 세상에서도 폭력시위를 일삼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5월3일 열린 국무회의에서도 정부는 전투경찰대설치법도 그대로 두고 백골단도 해체하지 않겠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했다. 정부에서 하겠다는 개선 방침의 골자는 기껏 백골단이라는 섬뜩한 이름을 낳은 흰색 헬멧과 운동화 등을 정식 기동복(옅은 청록색)과 전투화로 바꾸어 입히고, 최루탄을 쏠 때는 가두방송을 통한 ‘최루탄 발사 예고제’로 최루탄 남용을 막고, 경찰의 대학교내 진입은 되도록 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백골단의 옷만 바꿔 입힌다 한들…
 이어 그 다음날 이상연 내무장관은 기자 회견에서 정부의 ‘집회 · 시위 안전관리개선대책’ 발표를 통해 올해 안에 백골단을 무술경찰로 대체하고 시위 진압을 체포 · 연행 등 공격적 진압에서 해산 위주의 수비적 방식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장관은 또 경찰의 자의적 판단에 따른 집회불허가 많았음을 시인하고 각 경찰서에 집회의 허용 여부를 결정하는 심사우원회를 두어 새로운 ‘시위무화’를 정착시켜 나가겠다고 밝혔다. 정부의 발상은 한마디로 법과 제도는 그대로 둔 채 운용만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미봉책만으로 타살과 분신으로 달아오른 정국을 가라앉힐 수 있다고 보는 이는 정부 당국말고는 없는 듯하다. 옷만 바꾸어 입힌다고 해결된 문제는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 백골단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배경부터가 그 창설요원인 무술특기 경찰의 “몸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진압 방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골단(사복체포조)이 처음 모집된 것은 85년 8월1일 서울시장 명의로 시행된 경찰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이었다. 특별경비부서 무술요원으로 뽑은 이들의 응시자격은 무도(태권도 유도 검도 합기도)2단 이상이었다. 다음에는 86년 1월28일 내무부장관 명의로 시행된 경찰공무원 공개채용시험이었는데 “응시자격은 무도 초단 이상 소지자로 합격자는 소정의 교육 이수 후 3년간 강폭력 전담 형사요원으로 근무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특별경비부서 요원’ ‘강폭력 전담 형사용원’으로 합격한 무술특기 경찰관들이 실제로는 데모 주동자나 과격 시위자를 ‘전담’하는 신설 사복체포조 중대로 편성되자 자신들이 속았다고 반발을 보이기도 했다.

 어쨋건 5 · 3 인천사태에서 용맹을 떨친 당시 백골단은 서울시경의 경우 △무술특기 경관으로 신규채용한 7개중대 8백여명 △ 전 · 의경 출신 제대자로 특채한 2백50여명 △전투경찰 복무자 가운데 체격이 좋거나 무술특기가 있어 차출한 6백여명 △일반 경찰관 중에서 무술실력을 갖춘 사람들로 구성한 ‘특기중대’ 2백여명 등 모두 1천9백50여명에다가 시위상황에 따라 사복체포조 복장과 전경 진압복 복장을 번갈아가며 입혀 근무시키는 전투경찰 기동대 차출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무술경관이 대다수인 사복체포조는 ‘정식 근무복’으로 흰색헬멧과 흰운동화에 청재킷과 청바지 차림을 해 ‘백골단’이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한때는 흰색 대신 녹색헬멧을 쓰기도 해 ‘녹골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비등하는 여론의 표적이 된 백골단 및 전격 해체 주장은 백골단이 악명을 떨친 5공 때 그 조직 내부에서 먼저 나왔다. 지난 87년 6월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군사독재 정권의 사병으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에 갈등을 느껴 그해 7월 양심선언을 하고 근무지를 이탈한 양승균(27 · 당시 이천경찰서 상경)씨를 비롯해 강군 사건 전까지 13명의 전경이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시위진압 동원에 이용되는 것에 항의하여 양심선언을 했다. 이들은 당시 양심선언을 통해 하나같이 “군사독재정권의 사병으로 전락한 전투 경찰제도의 철폐”를 주장해 전경 문제를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시켰는데도 특히 87년 대통령선거 때 김영삼 후보는 ‘전경제도 폐지’를 대권공약으로 내세워 6월항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국민을 ‘적’으로 삼아야 했던 많은 전경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전경의 ‘양심선언’ 강군 사건 후 잇따라
 한편 그동안 뜸했던 전경 양심선언이 강군 사건 이후 잇따르고 있는 데다가 연일 계속되고 있는 집회 · 시위에서도 전경들의 양심선언을 유도하난 구호를 외쳐 주목받고 있다. 범국민대책회의에서는 강군을 타살한 백골단원 5명도 “겉으로는 가해자이나 본질적으로는 피해자”임을 부각시키고 있고 강군의 아버지 또한 “구속된 전경들을 죽은 외아들 대신 아들로 삼겠다”면서 처벌을 원치 않음을 분명히 했다 지난 5월2일 양심선언을 한 의경 나윤성(19 · 서울시경 2기동대 12중대)군에 이어 ‘백골단 해체의 날’인 5월4일에는 서울시청 앞에 배치된 박석진(22 · 서울시경 1기동대 1중대) 일경이 양심선언을 통해 “같은 젊은이로서 아무런 이유없이 정권의 도구가 되어 대학생과 싸움을 벌여야 하는 처지에 고민해왔다”면서 전경의 시위진압 동원 중단을 촉구했다. 현재 전 · 의경 부대에는 외출 · 외박금지령이 내려진 상태인데 거기에는 근무지 이탈 및 양심선언과 같은 동요를 사전에 막으려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신임 내무장관이 국회에서 전경의 시위진압 동원은 대간첩작전에 국한한 전경 대설치법에 위ㅐ된 불법전용임을 인정한 마당에 법적 근거도 없는 공권력행사를 강행하겠다는 것은 국민을 상대로 “갈 때까지 가보자”는 노골적인 반발심리로까지 비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미화 변호사는 “작전 전경의 시위진압 동원의 위법성이 드러났고 백골단을 해체해야 된다는 국민 여론이 드높은 데도 불구하고 이를 고수하겠다는 것은 국방의무에 종사해야 할 젊은이들을 정권의 방패막이로 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경이 없으면 지탱할 수 없는 정권임을 스스로 입증한 셈으로 격굴 국민저항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라고 경고한다. 정변호사에 따르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경찰의 기본 임무는 집회와 시위를 보장하는 쪽의 법집행을 하는 것인데 반대로 억압 일변도의 법집행을 기본 임무인 것처럼 착각하고 있어 헌법에 보장된 집회 · 결사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또 공권력은 법치주의 정신에 기초한 엄격한 법적 근거에 입각하여 기본권을 최소한으로 구속하는 선에서 집행돼야 하는데 그 어느 것도 지키지 않는 공권력 만능주의가 공권력에 대한 총체적 불신을 낳고 있다는 게 법조계의 일반적 시각이다. 박용일 변호사는 “정부 당국의 시위에 대한 원천봉쇄가 평화적 시위를 과격 시위로 몰아가고 있는데도 마치 화염병 시위가 계속되는 한 과격한 진압도 불가피하다는 본말이 전도된 억지논리를 펴고 있다”고 주장한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보장되고 전경 · 백골단이 없는 세상이라면 누가 누구를 향해 돌멩이나 화염병을 던지고 젊은이들이 죽어가겠느냐는 지적이다. 박변호사는 “특히 노동자들의 정당한 파업현장에 공권력을 투입하는 것은 명백한 노동탄압으로서 노동자들의 공권력행사에 대한 전면적 저항을 부채질해 결국 공권력이 설 땅을 스스로 좁히는 결과를 낳을 뿐”이라고 비난한다.

 현시국을 둘러싼 가장 큰 우려는 어쩌면 정부 당국에서 보이고 있는 ‘세월이 약’이라는 식의 무감각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한 대학생의 죽음을 둘러싸고 야당을 포함한 재야 · 운동권이 연대한 범민주세력의 단일전선을 구축한 것은 박종철 · 이한열 사건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이다. 더구나 이번 사건의 경우 앞서 말한 정권의 도덕성을 훼손한 대형 비리사건말고도 물가상승 · 집값 폭등 등 악화된 경제여건마저 겹쳐 있어 노정권 퇴진운동을 둘러싼 정국은 쉽게 진정되지 않을 듯하다. 강경대군 사망 뒤로 줄곧 연세대 교정에 붙어 있는 “국민을 페놀수로, 노동자는 독가스로, 학생은 쇠파이프로, 우리 민중 다 죽이는 노태우 정권 타도하자”는 플래카드는 재야 · 운동권의 고양된 노정권 반대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행렬’ 계속될 땐 앞일 예측 못해
 특히 재야 · 운동권과 야당에서 당초에 점진적 노정권 퇴진운동의 가시적인 첫 번째 성과물로 상정한 전경대 및 백골단 해체 요구를 현정권이 거부함에 따라 더욱 극한적인 대립이 예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야당의 경우에는 백골단 해체 투쟁을 통해 공안통치 종식의 돌파구를 열 수 있다는 기대에서, 또 재야 · 운동권에서는 현정권이 사유화하고 있는 공권력 중에서 가장 ‘약한 고리’라는 판단에서 이미 여론에 의해 폭력집단으로 낙인찍힌 백골단은 정부에서도 해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다소 낙관 섞인 전망을 가진 게 사실이었다.

 그러나 정부 · 여당이 ‘여론에 밀리면 끝장’이라는 위기감과 ‘5공과는 다른 민주화된 세상’이라는 자신감 속에서 강경대응으로 방침을 굳힌 데다가 전대협이 분신 대학생의 사망을 계기로 노정권 퇴진투쟁을 공식 선언함에 따라 상당한 기간 팽팽한 긴장관계가 지속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 긴장상태를 깨뜨릴 시의적인 변수로는 우선 5월9일로 예정된 국회 회기 종료와 전대협의 동맹휴학 및 민자당 해체 투쟁, 5월11일 부산에서 치르기로 예정된 제5기 전대협 발대식, 그리고 5 · 18 고아주 민중항쟁 기간에 맞물려 치러질 가능성이 큰 강군의 장례식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가 아직은 원내투쟁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신민당의 장외투쟁 가능성과 대규모 사업자에서의 파업투쟁 등이 맞물려 있고, 교육계 종교계 문화예술계 여성계 등에서 시국선언 및 무기한 농성투쟁이 번지고 있어 정국은 갈수록 예측불허의 긴장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더욱이 사경을 헤매고 있는 박승희양이 끝내 사망할 경우는 물론이고, 내무장관의 개선지침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원천봉쇄와 과격시위의 악순환 속에서 언제 터질지 모를 ‘제2의 사고’ 등이 불가측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몇차례의 집회 · 시위에서 최루탄 직격탄이나 방패에 실명하거나 중태에 빠진 부상자들이 속출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

 그보다 더 큰 변수는 박승희(전남대 식품영양 2년 · 4월29일 분신), 김영균(안동대 민속 2년 · 5월1일 분신 5월2일 사망) 천세용(경원대 전산 2년 · 5월3일 분신 당일 사망)등으로 꼬리를 물고 이어지느 분신 행렬일 것이다.

“대학생 분신은 민주화 더딘 탓”
 문익환 목사는 4월29일 연세대에서 열린 범국민결의대회에서 박승희양의 분신과 관련, “또다시 죽음의 행렬이 시작된다면 더는 견딜 수 없는 일이예요. 사랑서, 살아서 투쟁하라구.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어. 죽어서는 안돼”라고 애타게 절규하면서 민주화 운동은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고 호소했지만 김영균 · 천세용군은 이 호소에 아랑곳없이 분신의 길을 택했다.

 그러나 과연 “파국적 위기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라는 본질적 물음에 던질 때 과연 이들의 죽음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박승희양의 아버지 박심배씨는 “내 딸의 분신은 미주화가 더딘 탓”이라고 말했다. 현상 속에서 시대의 징표를 맨 먼저 읽어내는 사제들과 역사의 흐름을 인식하는 교수들은 무기한 농성이라는 연대 표시와 시국성명을 통해 분신 행렬이 몰고온 현정권의 위기는 정부 당국의 강권통치와 이같은 ‘힘의 정치’??? 가능케 한 인위적인 3당합당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곧, 언론에서도 “민주화를 추진하라는 국민의 뜻이 담긴 황금분할”이라고 풀이했던 여소야대 구도를 ‘30% 대통령’이 인위적으로 거여소야 구도로 뒤집어엎은 결과 이른바 반민주악법의 개폐 논의가 실종되고 결국 그 법에 근거한 간원통치만 남게 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한편 분신정국에 대한 각게 반응 중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라는 전제하에서 “민자당 김영삼 대표를 중심으로 한 민주계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제2의 6 · 29선언과 같은‘승부수’를 던져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한상진 교수(서울대 사회학)의 발언이다. 교수들의 시국성명과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시국성명 등에서 하나같이 일치하는 지적대로라면, 현재의 위기상황이 근본적으로 인위적인 3당합당에 있다고 보는 만큼 민주화의 대세를 거스른 ‘결자’인 김영삼씨가 ‘해지’하는 것은 말그대로의 ‘신사고’라는 것이다. 김영삼씨는 이니 지난 87년 대통령선거때 전경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으므로 그때의 약속이 표를 얻기 위한 거짓공약이 아니었음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이제 집권 여당의 제2인자로서 백골단 해체와 전경제도 개선을 실현하는 등 미주개혁의 기치를 들어 봄직하다. 시간과 인내를 요구하기에는 너무나 절박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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