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北虎 비자 거부 사유는 ‘혈통’
  • 허광준 기자 ()
  • 승인 1993.09.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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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호랑이 도입 논쟁 … 서울시 “혈통증명서 못 믿겠다”에 주최측 “명예훼손”

예로부터 호랑이는 설화나 민담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인공 중의 하나였다. 때로는 못된 인간을 꾸짖는 준엄한 심판자로서, 때로는 어린이들을 잡아먹으려고 손에 쌀가루를 바를 만큼 영악한 맹수로서, 또 사람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미로 여겨 평생 고기를 잡아 바치는 정 많은 동물로 그려졌다. 우리 민족에게 호랑이는 두렵고도 신비로운 장막에 가려진 살아 있는 신화였다.

 최근 호랑이 한쌍이 서울시와 한 문화기획회사, 중국 사이를 넘나들며 ‘호환’을 일으키고 있다. 기획 회사 ‘얼싸코리아’(대표 차원성)는 중국으로부터 백두산 근처에 서식하던 호랑이 한쌍을 들여와 서울시에 기증하는 계획을 추진해 왔으나, 이 호랑이가 과연 한국호랑이인가 하는 점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물의가 일고 있다.

 호랑이 반입 계획이 추진된 것은 지난 4월부터이다. 얼싸코리아측은 문화 사업의 하나로 중국민족예술단의 초청 공연을 준비하면서, 중국 교유의 희귀 동물인 자이언트팬더를 들여와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동물 수입에 대해 구체적인 지식이 없었던 얼싸코리아 관계자들은 동물전문가인 서울대공원 김정만 동물부장과 상의했고, 이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들여올 동물이 팬더에서 한국호랑이로 바뀌어 결정되었다. 이왕이면 한민족의 상징으로 우리와 친근한 한국호랑이를 들여오자는 것이었다. 백두산 지역에 서식하는 한국호랑이 혹은 백두산호랑이는 중국에서 동북호(東北虎)라 불린다. 현재 중국은 장백산(백두산)과 그 주변에서 이 동북호를 잡아 번식시키고 있다.

 협상은 순탄하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다. 얼싸코리아는 호랑이를 들여와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서울시에 무상 기증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호랑이 수입 허가서, 기증 수락서, 무상 기증에 대한 각서 등이 서울시와 얼싸코리아 사이를 바삐 오갔다. 중국과의 협의도 순조로웠다. 중국 소수민족대외교류협회와 야생동물보호협회는 얼싸코리아를 통해 한국에 동북호를 기증하는 데에 협조하겠다는 전문을 보내왔다.

예술단 흥행 좋지 않자 도입 연기
 얼싸코리아가 호랑이 한쌍을 들여오려면 ‘멸종위기에 처한 야생동식물의 국제 거래에 관한 협약(CITES)’에 따라 중국측에 10만달러를 보호 기금으로 내야 하고 운송에 대한 책임도 맡아야 했다. 대신 이 회사는 호랑이를 국내에 들여와 서울시에 기증한 뒤 한국호랑이를 주제로 한 각종 기획 사업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호랑이를 주제로 한 공연 기획, 호랑이가 주인공인 동화책 출판, 호랑이 무늬를 활용한 의류 사업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중국 예술단의 공연 시기에 맞춰 호랑이를 들여오려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예상과는 달리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이 많지 않아 흥행 성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싸코리아는 6월10일께 호랑이 반입을 7월로 연기해 달라는 공문을 서울시에 보냈다. 이 때 몇몇 일간지에는 얼싸코리아가 서울시에 ‘호랑이를 기증할 수 없다’라고 통보해와 호랑이 반입이 무산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얼싸코리아의 ‘반입 철회 통보’에 따라 서울시는 대기업 후원이나 자체 예산으로 직접 호랑이를 반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와는 달리 얼싸코리아측은 호랑이 반입 계획을 계속 추진했으며, 7월16일 ‘호랑이를 꼭 반입해 서울시에 기증하겠으며, 암수 한쌍을 골라 계약하기 위해 중국으로 출장을 떠나겠다’는 공문을 서울시로 보냈다. 이에 따라 7월22일 얼싸코리아 차원성 사장과 서울대공원 김정만 동물부장, 건국대 김순재 교수가 현지 조사 및 호랑이 선정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중국 흑룡강성 ‘횡도하자(橫道河子) 고양이과동물사육번식센터’에서 서울로 들여오기로 되어 있던 호랑이를 살펴본 김정만 부장은 이 호랑이가 한국호랑이가 아니라 시베리아호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외형상 체구가 한국산호랑이의 평균 크기보다 훨씬 크고, 중국측이 제시한 혈통보증서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호랑이 반입 계획은 어려운 상황에 빠졌으며, 일행은 반입계약서 대신 빈 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또다시 각 일간지에는 ‘한국호랑이 반입 해프닝으로 끝나’ ‘백두산 호랑이 주장 촌극’ 같은 기사가 실렸다.

현재는 모두 시베리아호랑이로 통칭
 얼싸코리아측은 8월30일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한국호랑이를 들여오겠다는 순수한 의지는 변함이 없으나 서울시의 일방적인 언론 보도로 얼싸코리아는 사기성 단체로 전락했다’라고 주장하며, 이 호랑이를 시베리아산으로 판명한 근거와 언론 보도 경위 등을 밝혀 달라고 요청했다. 서울대공원 관리사업소로부터 온 9월7일자 회신을 통해 서울시는 중국측이 제시한 혈통서가 신빙성·객관성이 없어 한국호랑이로 인정하기 어려우므로 기증받지 않겠다고 최종 통보했다.

 서울시는 얼싸코리아가 들여오려는 호랑이 수컷 90-027과 암컷 91-038의 혈통서가 이들을 사육하고 있는 횡도하자 사육센터에 있지 않고 하얼빈 동물원에 있다는 점, 하얼빈 동물원이 보내온 상황 설명서에 문화대혁명 기간에 관리 혼란으로 인해 계보 서류가 유실되었다는 것을 밝힌 점 등을 들어 백두산호랑이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얼싸코리아측은 중간자료가 유실되었다고 하나 부모계가 장백산 지역에서 포획된 것을 입증하고 있고, 86년 중국 임업부와 중국 ‘야생동물협약’의 직접 지도하에 동북호를 번식시키기 위해 설립한 횡도하자 고양이과사육센터의 혈통증명서를 믿지 못한다면 어떤 것을 믿을 수 있겠느냐는 입장이다. 게다가 애초에 ‘한국호랑이’를 들여오자는 제안 자체를 서울시측에서 했고, 비전문가로서 서울시가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면서 진행 상황을 보고해왔기 때문에, 이제 와서 영리를 목적으로 호랑이 도입을 추진한 것처럼 언론에 보도되어 일방적으로 피해를 볼 수는 없다는 주장이다. 얼싸코리아측은 명예 훼손과 금전적 손해에 대해 서울시를 상대로 한 소송도 검토하고 있다.

 서울대공원 오창영 동물연구관에 따르면, 금세기 중기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 지역의 호랑이는 한국호랑이(Korean Tiger, 학명 Felis tigris coreensis)와 만주(동북)호랑이(North Chinese Tiger, 학명 F.t. manchuricus) 및 시베리아호랑이(Siberian Tiger, 학명 F.t. longipilis) 등 별개 아종으로 구분했으나, 현재는 세가지를 따로 나누지 않고 모두 시베리아호랑이(학명 Panthera tigris altaica)로 통칭한다. 이는 이 호랑이들이 단지 다른 나라에 서식한다는 점뿐 형태 특징이나 습성이 다르지 않고, 접경지대에서는 서로 교류하고 있기 때문에 별개의 종으로 볼 이유가 없다는 학문적 판단 때문이었다. 결국 ‘한국호랑이’ 혹은 ‘백두산호랑이’는 학문적 구분이 아니라 서식 지역에 따라 우리 민족이 갖는 정서적 애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제 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전역에서 호랑이가 출몰하여 인명과 가축에 해를 입히는 사례가 잦았다. 이에 따라 정기적으로 호랑이 토벌작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15~1942년 17년간 토벌된 호랑이는 모두 97마리로, 해마다 5.7마리꼴로 잡힌 셈이다. ‘조선 사람들은 반년 동안 호랑이를 사냥하고 나머지 반년 동안에는 호랑이가 조선 사람을 사냥한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현재도 북한에는 소수이긴 하나 호랑이가 자연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에도 북한의 한 잡지는 자강도 화평군에서 길이 3백257㎝, 무게 1백76.8㎏이나 되는 호랑이를 잡아 박제로 만들어 김일성 대학에 선물했다는 보도를 실었다.

 남한에는 한국호랑이 대신 시베리아호랑이와 벵갈호랑이가 두렵거나 신비로운 존재라기보다 유흥거리로 동물원 호랑이 우리를 차지하고 있다. 최근 수년 동안 끊임없이 되풀이된 한국호랑이 도입 논쟁은 ‘우리 호랑이’에 대한 한국인의 끈질긴 애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박지원의 한문 소설 《호질》에 등장해 부패한 양반을 꾸짖는 한국호랑이를 하나쯤 갖고 싶은 것은 당연한 바람이다. 한 전문가는 “비록 우리땅이 아니라 해도 백두산 지역에 서식하던 호랑이의 후예라는 점이 확실하다면 이같은 정서적 대상으로 국민의 사랑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許匡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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