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담금은 안 내면서 말로만 ‘세계 평화’
  • 김용기(자유 기고가) ()
  • 승인 1993.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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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회원국들 체납으로 창설 이래 재정사정 최악



외무부가 제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91년 유엔에 가입한 뒤로 모두 8백16만8천달러의 분담금을 내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10월5일 외무부 국정감사에서 “분담금도 제대로 내지 않으면서 무슨 염치로 유엔 안보리 비상임이사국에 출마할 수 있느냐”라는 여야의원들의 질책에 琴正鎬 외무부 국제기구국장은 “95년부터 정상 납부가 가능하다” “유엔 분담금은 매년 초 완납해야 하지만 우리 예산은 분기별로 지급되어 어려움이 있다”라며 답변에 진땀을 흘렸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정을 살펴보면 분담금 체납이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특히 탈냉전 이후 새롭게 ‘세계의 경찰’로 등장한 유엔 평화유지활동(PKO) 분담금의 겨우 그 정도가 심하다.

평화유지활동을 주도적으로 제안하는 것과, 이를 위한 비용을 내놓는 것 사이에는 연관이 거의 없어 보인다. 1백84개 회원국은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이 확대되기를 원하지만 이를 위해 기꺼이 호주머니를 털려 하지는 않는다. 가장 잘 사는 나라들조차도 마지 못해 의무 분담금 일부를 내고 있를 뿐이다.

회원국별 분담금은 어떻게 할당하는가. 정규 예산의 경우 회원국들은 지난 10년 간의 평균 국민총생산과 개별 생산성 그리고 외채를 고려한 복잡한 방정식에 의해 분담금을 할당받는다. 92년의 경우 미국은 전체의 25% 정도, 일본은 전체의 10%를 책임지고 있다.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순으로 할당된 분담금은 지불능력을 감안하여 배정되었지만 최근 들어 배정 방식을 고쳐야 한다는 소리가 높다. 이론은 해마다 6월까지 지불을 미루고 미국은 대체로 10월쯤에 지불해 왔다. 이번 유엔 총회 연설에서 클린턴이 밝혔듯이 그동안 미국은 자국의 부담이 지나치게 크다고 계속 주장해 왔다. 게다가 미국은 몇년 전부터 전체 분담금을 완불하지 않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로루시는 합쳐서 11% 정도를 부담해야 하지만, 소연방이 해체된 뒤로는 한푼도 내지 못하고 있다.

평화유지 예산의 경우 회원국들은 약간 다른 계산에 의해 분담금을 할당받는다.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A그룹은 정규 예산보다 많은 분담금을 할당받는다. B그룹은 정규 예산 분담액과 같고, C그룹은 정규 예산 분담금의 20%를, D그룹은 10%를 할당받는다.

한국도 미납…“95년부터나 정상 납부”
93년 8월 발표된 유엔 통계에 따르면, 옛 유고 소말리아 캄보디아 외에 엘살바도르 중동 서사하라 앙골라 모잠비크 이라크 ·쿠웨이트 남부레바논 등 유엔 평화유지군이 활동하는 10개 지역에서 유엔은 참가국들에게 총 12억달러 정도의 빚을 지고 있다.

평화유지 예산만 허덕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유엔 예산은 평화유지 예산 외에도 정규 예산과 구호 및 개발예산 등 3개 부문으로 나뉜다. 정규 예산은 92년에 11억8천만달러였고 올해에도 비슷한 규모로 예상된다. 유엔 사무국 유지 비용과 총회 ·안전보장이사회 ·경제사회이사회 ·국제사법재판소 그리고 지난해의 리우 지구정상회담과 최근 빈에서 열린 인권회의와 같은 특별 회의 비용으로 사용되는 이 돈은 매년 1월31일까지 납입되어야 한다. 그런데 제대로 기일을 지킨 나라는 18개국밖에 안된다. 각 회원국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충당되는 구호 및 개발예산규모는 정규 예산을 넘어선다. 그렇긴 하지만 세계 도처의 수백만 난민에 대한 구호사업이나 옛 유고 지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륜적 도움에도 충분치 못해 3개월 이상 앞을 내다보는 사업은 계획조차 할 수 없는 실정이다.

사실 92년에 52억달러였던 유엔 예산은 회원국 전체 예산 가운데 지극히 작은 부분일뿐이다. 유엔 평화유지활동 예산은 각국 국방비 지출액의 1%를 겨우 넘는다. 게다가 손벌리는 데는 많아도 부유한 나라들을 포함해 1백84개 회원국 가운데 다수가 지속적으로 분담금 약속을 위반하고 있어 유엔 금고는 이미 바닥을 드러낸 상태이다.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짧은 기간이나마 빚을 얻으려 해도 유엔 내규가 이를 금하고 있어 여의치 않다. 결국 애꿎은 부트로스 갈리 사무총장이 이곳 저곳 굽신거리고 다니며 돈을 구걸해야 할 형편이다. 이같은 재정 사정은 45년 유엔 창설 이래 최악이라고 한다. 더구나 올해는 옛유고와 캄보디아에서의 활동으로 씀씀이가 커져 유엔의 살림살이를 맡고 있는 사무국은 걱정이 태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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