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상업주의에 부추겨진 필적 공방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1.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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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 예비단계'가 확대…전민련 '여론조작 전략이다'

  '자필이냐 대필이냐.' 분신자살한 金基卨씨의 유서를 놓고 검찰과 전민련이 벌여온 필적공방은 과연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나게 될까. 이제는 단순히 '화제거리'로 변질되고 있는 듯한 이 '해괴한'공방전의 결말은 예상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다. 검찰이 대필이라고 자신있게 내세우는 증거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와 김씨의 여자친구인 홍성은씨의 진술이다. 그러나 전민련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내무부 산하기관이므로 믿을 수 없으며, 홍씨의 진술도 96시간 동안 붙잡아놓은 상태에서 강압적으로 받아낸 허위자백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검찰이 설사 용의자로 지목한 姜基勳씨와 이밖의 전민련 관계자를 강제 소환해, 어떤 수사결과를 발표하더라도 전민련을 계속해서 '조작'이라고 주장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사건은 법적인 결론이 나도 실질적으로는 '미제'로 남을 공산이 크다.
  우선 지금까지 진행된 공방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검찰이 확보하고 있는 감정자료 가운데 필적의 진위여부를 가름할 수 있는 열쇠는 △분신자살한 김기설씨(26'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 △대필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강기훈(27'전민련 총무부장)가 85년 11월 가락동 민정당연수원 점거농성 사건으로 구속돼 경찰에서 작성한 자술서 △전민련이 검찰에 제시한 김씨의 전민련회원용 수첩 세가지이다.

  검찰은 5월21일 강씨가 작성한 자술서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필적감정한 결과, 유서와 같은 필적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하고 강씨의 손도장이 찍힌 자술서 사본을 공개했다. 그러나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결과가 어떤 근거에서 동일필적으로 나왔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다.

  전민련은 이러한 검찰의 석연치 않은 필적수사에 대해 '언론조작을 통해 여론을 호도하려는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강씨의 자술서에 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검정이 평소처럼 2인 이상이 참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이례적으로 실장 1인이 감정한 것으로 밝혀져,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처럼 전민련이 검찰의 발표를 믿지 않는 상황에서 여론의 관심은 김씨가 갖고 있다가 분신 전날 홍씨에게 전해주었다는 '전민련회원용 수첩'의 진위 여부로 모아지고 있다. 검찰은 '홍씨를 추궁한 결과 수첩에 첨삭된 흔적이 많은 데다 전민련이 수첩의 존재사실 자체를 은폐하려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면서 수첩 은폐에 관계된 전민련 선전부장 원순용씨 등 3명에 대해 강제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수첩의 필체가 유서의 필체와 같다고 밝혀지더라도 김씨의 것이라고 인정하지 않겠다는 얘기다.

  반면 전민련은 '수첩에 가필한 사실이 결코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석태 변호사는 22일 명동성당에서 열린 긴급설명회에서 '수첩이 전민련에 수거된 직후부터 검찰에 제시될 때까지 전과정을 지켜본 사람으로서 단연코 조작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가필이 흔적이 있는지 없는지 밝혀내려면 물리화학검사 등 정밀검사가 필요해 10일 이상이 걸릴텐데 필적 감정인이 아닌 검사가 어떻게 단 하룻만에 가필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며 '설혹 수첩이 조작됐더라도 정밀검사 후에 발표하는 게 국민의 공익을 대표하는 법률기관이 취할 태도'라고 검찰을 꼬집었다.

  이쯤되면 결론이 금방 나올 수 없는 사안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검찰은 좀더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지도 못한 채 왜 이같은 사건을 터뜨리게 되었을까. 바로 이것이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검찰이 수사를 시작한 데는 강경대군 사건 이후 잇따른 분신이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하는 일부 여론이 작용한 게 사실이다. 분신자의 고른 지역분포와 다양한 직업을 고려할 때 '조직적인 배후가 있는 것 같다'는 심증을 굳히면서 수사당국 특유의 '유혹'도 느꼈을 법하다. 김기설씨의 분신은 이같은 유혹을 더 강하게 해준 것인데, △왜 김씨가 자신과 무관한 서강대를 분신 장소로 택했는가 △학생들이 많지 않은 오전 8시에 분신한 이유가 무엇인가 △평소 잠겨 있는 옥상문을 어떻게 열고 올라갔는가 등의 몇가지 의문이 그것이다.

  더욱이 필적공방과 동시에 하나 둘 밝혀진 혐의점은 검찰로 하여금 '대어'를 기대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즉 △김씨가 자살 전날인 5월7일 저녁 7시30분 홍씨와 헤어진 뒤의 행적이 불투명하고 △전민련 간부 임근재씨의 주장과 달리 김씨가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실 때 20대 여자 등 다른 사람이 더 있었다는 포장마차 주인의 증언이 있고 △김씨의 유서에 나오는 전민련 사무차장 金善澤(35)씨가 현재 서강대 경제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고 이 학교 총학생회에 깊이 관계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다.

  따라서 필적공방은 검찰이 확실한 물증을 확보하기 위해 예비단계로 연 '포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를 용의자로 잡은 다음 본격적인 배후수사를 벌일 수순이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필적공방은 서곡에 불과한 것이었는데 언론의 상업주의를 타고 크게 확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민련에서는 이를 '검찰이 민족민주세력의 도덕성 실추를 노리고 벌인 여론조작 전략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홍씨의 진술이나 필적감정은 사건이 터지기 전에 이미 '완비'됐을텐데 '찔끔찔끔'언론에 흘려 5월투쟁에 쏠려 있는 국민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보자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전민련 '발 빼고 5월투쟁 잇겠다'
  검찰이 유서의 필적이 위조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홍씨의 증언과 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이다. 그러나 현재 홍씨는 검찰에서 4일간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 정확한 행방이 알려지지 않아 진술의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또한 검찰은 강씨의 자술서와 유서의 필적이 동일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을 뿐 유서의 필적과 김씨의 필적이 다르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정황 때문인지 전민련의 주장도 만만치 않다. 강씨의 경찰 자술서를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을 수 없을뿐더러 검찰이 계속 문제를 삼는다면 이 사건을 세계적으로 여론화시켜 국제적 공인기관에 필적감정을 의뢰하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다. 전민련이 이렇게 자신있는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검찰 주장을 뒤엎을 만한 충분한 자료를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씨의 필체는 정자로 쓴 글씨체와 평상시에 쓴 흘림체 두가지가 있는데 검찰이 섣불리 '다르다'고 판단, 대필자를 찾은 끝에 강씨를 찍었으나 '에러'였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전민련은 그래서 소모적인 필적공방전에서 발을 빼, 5월투쟁의 흐름을 계속 이어가려하고 있다. 야당과 재야단체의 전문가로 구성된 진상조사단에 일임하겠다는 것이다. 검찰도 배후세력 수사의 중심을 필적공방전에서 '정황수사'로 확대하려하고 있다.

  검찰이 공권력을 투입해 강씨 등을 구속하고 그 결과 '전모'를 발표하더라도 전민련 등 재야운동권은 '음모'라고 주장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일반 국민으로서는 의혹만 잔뜩 부풀린 채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될 터인데, 전민련측은 검찰이 바로 이점을 노리고 일을 벌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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