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시험, ‘인권’가리고 아웅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3.11.1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요식 행위’ 인식, 환자 동의 없이 신약 시험 일쑤 … 체계화 시급

 툭하면 인권 침해 시비가 따르는 우리나라 수사 관행에서 보면 낯설지만, 수배자이건 현장범이건 형사가 범인을 체포할 때 반드시 알려줘야 하는 게 있다.“당신은 불리한 상황에 대해서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필요하면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수사 용어로 이를‘진술거부권 고지 의무’라고 한다. 하물며 범행을 저지른 범법자의 인권도 보호해야 한다는 게 요즘의 법 정신인 마당에, 아무런 죄가 없는 환자의 인권이 침해받는다면 누구든 분개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의약품 임상 시험에 관한 한 아직도 환자의 권리는 낯설고 취약하기만 하다.

 임상 시험을 받는 환자로부터 의사가 서면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기본’이다. 그런데 내로라하는 대학병원 의사들이 환자를 상대로 임상 시험을 하면서 그 기본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요즘 의료계가 시끄럽다. 더러는 환자들에게 서면 동의는커녕 구두 동의조차 구하지 않아 의사들의 윤리의식이 싸잡아 매도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좀더 정확하게 따지자면 기본을 지키지 않았대서 의료계에 파문이 인 것은 아니다. 의사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 했을 뿐이다. 다만 민주당 李海瓚 의원이 지난 10월 중순 국회 보사위 국정감사에서 보사부로부터 받은 <임상시험 실시 현황 조사내역>을 공개하자 의사의 윤리가‘새삼스럽게’땅에 떨어진 것이다.

1백8건 중 약 절반이‘환자 모르게’ 시험
 국정감사에서 이해찬 의원이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 87년 이후 지금까지 외국에서 들여온 신약품에 대해 총 1백8건의 임상시험이 있었다(현재 국내 시장에 나도는 2만7천여 약품 중에서 우리 손으로 만든 약은 하나도 없고, 모두 외국에서 생산한 물질 가운데 특허기간이 지난 물질을 모방해 제조하거나 로열티를 지급하고 수입하는 신약들이다). 그중에서 환자로부터 서면 동의를 받은 경우가 5건, 구두 동의를 받은 경우가 49건이고, 나머지는 자료를 제출하지 않아 확인하기 어렵거나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고 솔직하게 밝힌 경우이다. 약 절반 정도가‘환자 모르게’임상 시험을 한 셈이다. 게다가 구두 동의를 받았다고 보고한 경우조차 환자에게 확인해본 결과“의사로부터 임상 시험용 약을 복용해도 되겠느냐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면 충격적이다. 의사들이 신약 임상 시험을 하면서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았다면, 환자 입장에서는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아 구설에 오른 의사나, 그 약을 판매하는 제약업체의 얘기는 다르다. 그들은“환자 동의를 받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이번에 문제가 된 신약들은 의약 선진국에서 10년 이상 철저하게 임상 시험을 했기 때문에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미 몇몇 나라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이다. 일부 언론에서 보도한 것처럼 위험하지는 않다”라고 입을 모은다.

 그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문제를 제기한 이의원이 겨냥하고 있는 표적도 무시당한 환자의 권리와 의사의 비윤리적 의료행위이지 신약에 대한 부작용은 아니었다. 이번에 도마에 오른 1백8개 신약은 미국?일본?독일 등 선진국에서 개발 허가된 품목으로서 개발국 허가일로부터 3년을 넘지 않은 약이거나 개발국 이외에 사용하는 나라가 없는 약이다. 약의 부작용에 대해 눈을 부릅뜨는 소비자 단체조차 미국 식품의약국(FDA)을 신뢰하지 국내 의료기관을 믿지 않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시험을 통과한 약이기 때문에 안전성이나 유효성에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얘기다. 어느 쪽이나 임상 시험을 요식 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의료계 부조리의 현주소와 그것이 낳을 한국 제약 업계의 불안한 미래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현행법은 임상 사례가 최소한 30건을 넘어야 비로소 임상 시험으로 인정한다. 보사부 약품안전과의 한 직원은“만약 국내에서 신약이 개발됐다면 그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굳이 30건으로 못박은 이유는 외국에서 이미 안전성과 유효성이 입증된 약을 들여오는 것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 체질에 맞는지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서이다”라고 설명한다. 약의 효능에서‘체질(National Difference)’을 무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똑같은 약이라도 육식 주의자냐 채식주의자냐에 따라 약효가 다를수 있다. 그러나 제약업체나 임상의사 모두“한국 임상 시험은 수입 신약품에 대한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내에서 임상시험을 통과히지 못한 경우가 단 한번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런데 이처럼 통과의례에 지나지 않는 임상 시험이 엉뚱한 쪽으로 이용되고 있다. 임상 시험을 할 때 제약회사와 병원 간의 계약금이 80년대까지만 해도 보통 5백만원대였는데, 요즘은 2천만원을 웃돈다고 한다. 특정 분야의 국내 권위자가 맡을 때에는 계약 가격 이외에 별도의 사례비가 따라붙어 억 단위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환자에게 동의하는 지 묻지도 않고 겨우 30건만 임상 시험하는 댓가치고는 지나치게 많은 액수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제약회사들이 임상 시험을 신약품‘랜딩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른바 랜딩비가 꼭 임상 시험 계약금 형태로 수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임상시험 계약금은 랜딩비 수수의 한 방법이라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

“임상시험 능력 키워야 신약도 개발”
 그러나 정작 심각한 문제는 그러한 부조리가 선진 임상 시험 제도를 우리나라에 정착 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뒤늦게나마 신약 개발 경쟁에 뛰어들어야 할 국내 제약업체들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에 진출한 독일 제약회사의 한 간부는“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나온 신약도 환자의 동의를 받지 않고 임상 시험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에서 이루어진 임상 시험의 결과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임상 시험 능력을 키우지 않고는 신약을 개발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한다.

 국내 제약업계는 지금까지 외국에서 개발한 신약을 재빨리 들여와서 이문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당연히 신약 개발은 뒷전이었으며 임상 시험 따위에 눈을 돌릴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제약업체와 병원 간의 구조적 부조리이다. 여태까지 영업만 잘하면 그만이었지만 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다국적 제약업체들이 점차 한국 시장을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의료계에 횡행하는 검은 돈의 흐름을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신약을 연구하고 개발하는데 쏟아야 할 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상 시험 제도를 정비하고 정착시켜야 한다. 보사행정 당국이나 의료계에서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다.

 보사부는 그동안 제약 회사와 의사 개인 사이에 이루어지던 임상 시험 계약을 지난 7월1일부터 공식화했다. 각 병원마다‘연구책임자 선정위원회’를 설치하도록 했으며, 임상 시험은 반드시 환자와 가족의 동의를 얻도록 각 병원장에게 지시했다. 특히 환자의 동의를 문서로 작성해야 한다는 조항은 이미 지난해 7월 약사법 시행규칙에 새로 명시했다. 이는 95년 1월부터 실시할 예정인 GCP(Good Clinic Practice?우수 임상시험 관리기준)를 도입하기 앞서 일종의 과도적 장치로서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지금까지 실시된 5건의 신약 임상 시험 중에서 보사부에 환자 동의서 사본을 제출한 사례는 단 1건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4건은 환자 동의서를 받지 못한 것이다. 한국 의료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