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平壤의소리’가 달라지고 있다
  •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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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보도, 金日成 신년사 등에서 개방 시사… 일부에선 “고립만회 전략일 뿐”

평양에도 ‘개방’의 조짐이 엿보인다. 이런 기운이 훈풍으로 일어나 남북 분단의 민족 한을 녹일 90년대를 열어줄지, 아니면 꽃샘바람처럼 한바탕 짓궂게 흔들어놓고 사라질지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 어쨌든 연말연시에 잇따라 나타난 몇가지 낌새는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80년대가 저물고 있던 지난해 12월27일 아침 7시, 북한의 평양방송은 일찍이 없었던 이례적인 뉴스 두 토막을 내보냈다.

이 뉴스는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정권의 붕괴와 관련된 것이었다. 내외통신이 제공한 그 내용을 발췌해 옮기면 이렇다. “ 외신보도에 의하면 로무니아(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소요사건이 있은 이래 이 도시의 정세가 점차 안정되어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간 시내 곳곳에서 니꼴라이 차우셰스쿠를 지지하는 무장역량과 그를 반대하는 무장역량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져오다가 25일에는 총격전이 뜸해지고 산발적인 총소리가 들리고 있을 뿐이라고 외신들은 전하고 있습니다… 아제르 프레스 통신은 로무니아 구국전선이사회가 새로 조직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이통신은 로무니아 특별군사 재판소가 니꼴라이 차우셰스쿠에게 사형을 언도했으며 사형이 집행됐다고 전했습니다.”

이 뉴스에 이어 북한 외교부의 성명이 뒤따랐다. “최근 로무니아에서는 정권교체가 있었다. 이전 정권을 대신하여 로무니아 구국전선이사회와 정부가 새로 조직되었다…우리정부는 이번에 로무니아에서 일어난 사태를 로무니아 인민 자신의 내부 문제로 간주한다…우리는 로무니아 인민이 선택한 길을 존중하며, 구국전선이사회를 로무니아 인민의 대표로 인정한다. 우리는 이번에 로무니아에서 벌어진 유혈사태로 하여 많은 인명 피해가 있은 데 대하여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우리는 로무니아 구국전선이사회의 지도 밑에 현 사태를 빨리 수습하고 나라의 안정을 이룩하며 사회 경제 생활을 정상화하기 위한 로무니아 인민의 노력에 지지와 연대성을 보낸다.”

이 뉴스는 내용의 충실 여부를 따지기 앞서 보도됐다는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뉴스였다. 왜냐하면 북한은 베를린 장벽의 철거 등 동구권을 휩쓸어 온 사태에 대해 아직까지 한번도 구체적인 보도를 안 해 왔기 때문이다.

이 보도가 있은 지 6일 뒤인 1월1일 金日成은 신년사에서 예전에 보기 힘들었던 ‘개방에 대한 수용의사’를 비쳤다. 물론 이런 의사는 상투적인 對南선전, 사회주의 우월성 강조 문귀 등과 섞여 조심스럽고도 우회적으로 표현되어 있다.(별항 신년사 발췌문 참조)

金日成의 신년사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처음으로 남북간의 자유 왕래와 전면 개방을 언급한 점이다. 국회회담 등 남북한간의 회담 추진의사를 金日成이 직접 지적한 것도 주목되는 부분이다. 또 ‘민족통일협상회의소집’을 요구하면서 협상 대표로 남북의 당국 및 정당의 수뇌로 할 것을 제의해, 지난해 쌍방 당국자, 각 정당 정파 대표, 사회단체 대표 등까지 포함하자고 제안했던 것보다는 축소시켜 우호적인 기미를 보였다.

이밖에 상투적으로 되풀이 해온 팀스피리트 작전에 대한 비난을 빼는 대신 미국의 파나마 침공을 집중적으로 비난했다는 사실도 이례적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북한이 새해에는 대화에 응하겠다는 태도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단 金日成이 있지도 않은 남쪽의 콘크리트 장벽을 무엇보다 먼저 허물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부에서는 앞으로의 회담에서 트집을 잡기 위한 빌미일 것으로 해석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브란덴부르크 장벽의 붕괴 등 일련의 동구권 사태와 관련해 일고 있는 북한 주민들의 내부 불만을 남쪽에 일단 떠넘겨 보려는 궁색한 술책에 불과한 것으로 진단한다.

북한의 움직임을 지켜보며 분석하는 전문가들은 평양의 이같은 태도 변화에 대해 대체로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는 전문가들은 金日成이 더 이상 버티기에 한계를 느껴 결국은 개방의 대세에 응하겠다는 ‘새로운 현실’을 인식했기 때문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金日成은 개방에 앞서 집안 단속부터 해야겠다는 절박감을 아울러 느끼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편 신중론을 펴는 전문가들은 “북한 주민들에게는 동구에서와 같은 피플 파워를 기대할 수 없다. 金日成과 金正日이 개방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지는 모르나, 북한의 권력내부는 개방에 응할 만한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고 본다.

한편 정부는 비공식 논평을 통해 우리측이 제의한 ‘남북정상회담’을 회피하기 위한 위장 제안이라고만 짤막하게 밝혔다.

동서문제연구소 ?英九씨는 “북한이 루마니아 사태를 즉각 보도한 태도와 金日成의 신년사 내용은 괄목할 만한 변화를 시사한 것”이라 평가했다. 그는 “金日成은 새해에 집안단속을 강화하며 다각적이고 적극적인 외교를 펼 것 같다”고 전망했다. 그 근거로 金日成의 3월 모스크바 방문설과 미국에 대한 비난을 동·서 다른 국가에서도 지적한 파나마 침공에 맞추며 그 강도를 낮추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때문에 金日成은 앞으로 中·蘇는 물론 미국과 일본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외교를 펴 국제적인 고립을 피하려 할 것이라고 그는 진단하고 있다.

그러나 이름을 밝히기를 사양한 정부 소식통은 이렇게 말한다. “북한의 루마니아 사태 보도는 중국 당국의 보도에 뒤이은 것이었다. 때문에 북한의 최근 자세는 중국의 폐쇄적인 정책과 견주어봐야 한다. 그 기사는 루마니아에 차우셰스쿠 정권과는 전혀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 그에 따른 새로운 외교관계를 맺기 위한 절차상 불가피한 보도였을 것이라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북한은 루마니아 경우를 폴란드 동독 등과 애써 달리 보고 있다. 또 신년사에서도 金日成은 동구권의 정치개혁 등을 제국주의 세력들의 反사회주의 책동으로 매도하면서 사회주의 정책노선을 고수할 것을 분명히 했다. 지나친 낙관이나 아전인수격의 수용은 자제돼야 한다”.

한편 趙淳昇의원(平民)은 “고르바초프가 실각되지 않고 개방정책을 밀고 가는 한 북한의 개방은 불가피 할 것이다”고 전제, “이번 신년사에는 남북관계 개선을 점칠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이 여러 곳에서 엿보인다”고 지적했다.

특히 국회회담 추진을 金日成이 직접 언급한 대목과 관련해 “실현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전망하는 趙의원은 “만약 실현된다면 오는 4월 金日成 생일 이후가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또 “金이 제의한 ‘민족통일협상회의’를 우리측이 받아들여 동·서독간의 장벽을 제거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노이에스 포름처럼 통일방안의 토론장 구실을 하도록 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그 활용성의 일단을 펼쳐보이고 있다.

그는 지난해 10월《시사저널》창간을 기념하기 위해 한국에 왔던 빌리 브란트 서독 전수상의 언급을 인용하며 “서독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면에서 우위에 있는 우리 정부가 북쪽의 제의를 가급적 수용해, 그들을 이끌어 내는 자세가 아쉽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이 일단 문을 열어 개방의 흐름을 타기만 하면 우리의 분단 극복도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북한의 최근 움직임은 피터 F 드러커가 그의 최근작《새로운 현실》(The New Realities)에서 지적한 ‘역사의 경계’와 같은 역사의 분수령이 될지도 모른다. 한반도에서의 이번 연말연시가 저자 표현처럼 ‘그렇게 높지도, 눈길을 끌지도 않지만, 냉전의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사의 경계’로 출발된다면 새해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는 원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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