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 잃은 인도 번영의 꿈 사라지다
  • 김춘옥 국제부장 ()
  • 승인 1991.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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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지브 간디 암살 민족 갈등이 원인 44년 세도정치 마감

 6월이나 돼야 시작되는 우기까지 아직도 열흘 가량이나 남은 5월 21일 낮. 지독한 더위가 기승을 부리더니 갑자기 때아닌 천둥 번개가 우박과 폭우를 동반하여 인도 전역을 강타했다.

 그로부터 10시간 후 분리주의 운동이 거세게 일고 있는 인도대륙 남단에 위치한 타밀 주의 한 작은 마을에서 44년 동안 지속됐던 네루·간디 가문통치는 막을 내린다.

 19일의 1차투표가 실시되기 며칠 전 인도의 한 여론조사기관은 총 5백43명을 뽑는 선거에서 라지브 간디의 국민의회-Ⅰ 당은 2백53석을 차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1차 투표에 이어 23일과 26일에 있을 총선에서 승리한다면 라지브는 89년 11월 제9대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해 비슈와나트 프라타트 싱에게 빼앗겼던 총리 자리를 다시 찾게 된다. 또 무기수입과 관련해서 스웨덴의 한 회사로부터 5천만 달러의 뇌물을 받았다는 보포스 사건으로 무능하고 부패한 인상을 남긴 채 도중하차하고 말았던 불명예도 씻게 된다.

8억 인구의 운명 ‘불확실’
 과반수를 확보해 단독집권을 하겠다는 집념에 라지브 간디는 자신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타밀주까지 날아온다. 수도 마드라스에서 동남쪽으로 약 42㎞ 떨어진 작은 마을 스리페름부드르에서 1만여 명이라는 적지 않은 인파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호하는 인파를 헤치고 임시로 마련된 연단으로 올라서자 가무잡잡한 한 타밀 여인이 화환을 선사하고 그들의 ‘탈라이바르’(지도자)의 발이라도 만질 듯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바로 이때 수동 원격장치에 의해 조종됐음이 틀림없는 폭탄이 터졌다. 20대 후반의 이 미모의 여성의 등은 완전히 뚫렸고 그녀의 머리는 4m나 떨어진 사진기자들 사이로 튀겨나갔다. 이 여인은 폭파에 흔히 사용되는 3~5개의 강력한 플라스틱 폭탄을 거들에 끼고 있었다고 찬드라 셰카란 국립과학수사소장은 말했다. 이로써 8억4천4백만 인도인의 운명은 끔찍한 불확실성의 볼모가 됐다.

 89년 집권 이래 막강한 야당연합인 자나타 달 당을 등에 업고 출범한 싱 내각도 하급계급에게 전체 고용의 27%를 할애하자는 싱 총리의 제안과 아요디야 회교사원에 힌두교 사원을 건설하겠다는 당내의 힌두교 원리주의자들의 움직임 때문에 균열이 생겼다. 집권을 위해 구성된 자나타 달 당은 바라티야 자나타당의 이탈로 깨어지게 되고 벤카타라만 대통령은 의회의 불신임으로 물러나게 된 싱 총리 후임으로 야당으로 있던 국민의회-Ⅰ 당 당수인 라지브에게 내각 구성을 의뢰했다. 자나타 달 당과 연립해서야 정부를 구성할 수밖에 없던 라지브는 지명총리보다는 총선을 통한 집권이 확실하다고 판단, 대통령의 제의를 거부한 채 찬드라 셰카르를 총리로 내세우고 2선에서 기회를 보아왔다.

 “라지브 간디의 사망은 세계로 열린 세대의 꿈이 죽은 것이다. 인도가 또 하나의 미얀마가 될까 두렵다”고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 기업체장은 말했다. 간디의 공보담당 보좌관이자 친구인 수만 두베이는 “그의 죽음은 인도가 번영하기를 원하는 모든 이들의 꿈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말했다.

 세계의 여성 정치인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인디라 간디를 어머니로, 마하트마(현자) 간디와 함께 인도의 국부로 불리우는 판다트(학승) 네루를 외할아버지로, 영국통치 시대의 혁명가 모틸랄 네루를 외증조할아버지로 태어난 라지브 간디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들이 없던 네루의 첫 외손자로, 인도 독립 직전인 44년 8월 20일 공습 속에서 태어난 ‘자정의 아이’ 라지브는 그러나 학교 공부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부인 소니아를 만났던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에 간신히 유학은 했으나 28세 때부터 9년간은 인도에어라인의 조종사로 일해 ‘캡틴 라지브’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총명하던 동생 산자이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자 “단지 어머니를 돕기 위해서만”이라는 단서를 붙이고 라지브는 정치에 입문한다. 81년6월15일 라지브는 인도 독립 이래 6명의 총리 모두를 배출했다는 성스러운 갠지즈강을 낀 유타르프라데쉬 주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83년 2월에는 당 사무총장으로 승진한다.

 84년 10월31일 암살된 어머니의 뒤를 이어 총리에 취임한 후 그 해 12월 총선에서 92%의 지지를 받아 ‘네루·간디 왕조’를 승계한 간디는 많은 업적을 남겼다. 라지브는 다른 정치인에 대한 비방도 않고 전통주의자도 아니며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급급해하지도 않고 종족간의 경쟁을 유발하지도, 기업체에 대한 재정지원을 무모하게 하지도 않는다. 그는 해외에서 형성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성장과 기술로 상징되는 새로운 세대를 구현하고자 했다. 지도층이 갖던 각종 금기는 없어졌고 경제는 점차 개방돼 민간 부문이 출현했고 1억 명이나 되는 중산층이 형성됐다. “우리는 사회주의란 이름을 남용하면서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산업을 보호하고 있다. 그 대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치르고 있다”고 라지브는 말했다.

 그러나 세계 2위의 인구, 2개의 연방 공식언어(힌두어 및 영어)와 14개의 주 공식언어, 민족이 다른 18개 주와 10개의 부속영토를 가진, 문자 그대로의 인도연방에서는 20㎞마다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안된다. 반도라기에는 너무 큰 이 인도 대륙에 기원전 2500년부터 차곡차곡 이주해온 주민의 역사 때문에 종교·인종간의 폭동이 잦아 매일 20명이 사망하는 이 나라의 문제점을 바꾸기에 라지브 간디의 4년은 너무도 짧았다. 파키스탄이 이미 회교국가로 독립해 나갔으나 펀잡 타밀 카슈미르 아삼 고루카란드 자르칸 안드라프라데시 등이 분리독립을 주장하고 있고 인도 중부 전역에서는 인종간·종교간의 충돌이 끊이지 않고 있다.

“혼란의 원인은 내각책임제”
 간디 전총리의 암살의혹을 받고 있는 타밀족은 원래 타밀·나두주에 살고 있던 소수민족이었으나 영국이 차 생산을 위해 스리랑카로 이들을 이주시켰다. 1천6백만 인구의 스리랑카는 싱할리 74%, 타밀족 18%, 무어족 7%의 다민족 국가로 최근에는 타밀 분리주의자들과 정부군간에 무력충돌이 생겨 1만명 이상이 사망하게 되자 5천만 명에 달하는 인도의 타밀족이 이들을 지원하게 된다. 라지브 정권 시절인 87년 인도 정부는 스리랑카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해 스리랑카에 대한 영향력 행사에 성공하자 그 후 인도 내부에 있는 타밀 과격분자 소탕  나선 것이 이들이 앙심을 품게 된 동기다.

 에라지브 간디의 후계자로 나라시마 라오 전 외무장관이 30일 지명됐고 중단됐던 선거는 6월12일과 15일에 치러지게 된다. 그러나 국민의회-Ⅰ당이 동정표를 흡수해 정권을 장악한다고 해서 수천년간 누적돼온 인도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나마 전 인구의 80%의 힌두교도들이 라마신을 중심으로 ‘불안정 속의 안정’ 요소로 버티고는 있으나 극단적인 힌두 원리주의자들의 배타적인 목소리가 높아감에 따라 1억이나 되는 시아파 회교도들을 자극할 우려가 커졌다.

 어쨌거나 오늘날 인도의 혼란의 원인은 “인도에 맞지 않는 내각책임제에 있다”고 인도 정치학자 샤시 타루르 박사는 진단한다. 또 한편으로 네루·간디 왕조의 통치가 정체의 원인이라고도 진단했다. 인디라 간디가 59년 국민의회당 당수로 선출됐을 때 네루 왕조를 수립하는 것이 아니냐는 한 미국 기자의 질문에 네루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무덤에서 통치할 능력은 없다… 내가 인도에 할 수 있는 최선은 인도가 원하는 새로운 지도력을 창출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암살로 이어진 두 세대가 끝난 지금 네루의 말 가운데 새로운 지도력 창출의 필요성만은 절실하게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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