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고싶은 소련의 6-25증언
  • 진철수 (부주필) ()
  • 승인 1990.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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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장벽이 뚫린 지 두달, 요즘도 브란덴부트크 門근처의 벽앞에서는 수십명, 때로는 수백명의 관강객들이 휘두르는 망치소리가 요란하다. 억압의 상징, 유럽 분단의 도구로 미움받다가 이제는 한날 歷史의 유물로 변한 베를린장벽. 사람들은 이 벽을 쪼개어 한덩이의 기념품으로 간직하고 싶은 것이다.

지금 유럽의 지도자들은 東유럽 共産체제의 붕괴로 생긴 공백을 어떠한 새로운 질서로 메워야 할 것인지 신중히 모색중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자연 2차대전 직후의 상황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족간의 감정, 소수민족의 처우, 1차대전 때부터 내려온 국경문제의 응어리 등 동유럽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소련의 제국주의적 지배에 눌려 있다가 45년만에 새삼스럽게 대두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최근 폴란드 정부는 東獨에서 취업중인 폴란드 근로자들이 차별과 박해를 당하고 있다고 정식 항의를 제기했다. 동독의 일부 지역에서 생필품의 買占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외국인의 생필품 구매를 금지하는 바람에 폴란드 근로자들이 부득이 철수하는 사태가 생겼기 때문이다. 西유럽에도 민족대립, 국경분규 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그동안 협상과 타협으로 이런 문제들은 대체로 해결되었다.
돌이켜보면, 2차대전후 서방측 동맹국들은 패전국 독일(서독)과 日本을 도와 경제를 재건시켰다. 이에 반하여 스탈린은 공산권이 확장을 줄기차게 추구함으로써 동서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그는 폴란드이 망명정부를 외면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民主政府의 전복을 도왔으며, 마침내 소련군이 점령한 모든 동유럽 지역을 공산화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미 소 점령군 모두 한반도 사정에 ‘무지’
그러면 한반도에서는 어땠는가. 蘇聯은 北韓을 점령하여 공산정권을 발족시킨 후 철군했으나, 그후 북한의 6?25남침준비를 도왔으며 전쟁중에도 원조를 제공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계획을 어느 때 알았는지, 침략을 사주했는지, 그냥 승인만 했는지 등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점령지구의 공산화에 그쳤지만, 한반도에서는 美國 점령하에 들어갔던 南韓까지 공산화하려했던 것이며, 스탈린의 팽창주의는 아시아에서 한술 더 뜬 셈이다.

그러나 1945년 8월 소련군이 38선 이북을 점령하였을 때 북한의 장래에 대해 구체적인 복안이 서 있었거나 연구를 단단히 해가지고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결국 공산주의자를 지도자로 앞세우기는 하였지만, 소련인들은 “일반적으로 누가 한국 공산주의자 지도자이며, 그중에서 누가 독립운동을 했고, 또 동료간에 존경을 받고 있는가에 대해서 무지하였다”고 정치학자 徐大肅교수(하와이대)는 <북한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이라는 논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불행한 일이지만, 이것은 그 당시 남한을 점령한 미국 군인들이 한국 사정에 몹시 어두웠으며, 독립운동의 역사, 독립지도자들, 국민의 반일감정이나 독립염원 등에 관해서 철저하게 무지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서교수는 “만약 中國 국민당 정부가 한반도를 점령했더라면, 그들은 아마 전승국들로 하여금 韓國의 혁명운동을 대표하고 전체 한국인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정권을 수립하는 데 최선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을지 모른다”고 또한 쓰고 있다. 蔣介石정부는 25년간 한국의 망명정부를 지원한 경험이 있으며, 重慶의 임시정부는 그당시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서교수가 국민당 정부군의 한국 점령가능성에 언급한 것은 허무맹랑한 가설이 아니다. 공개된 미국 국부성 자료에 의하면, 얄타회담을 앞두고 작성된 준비문서에는 미?소 양국뿐 아니라 영국과 중국(국민당 정부)도 군대를 한반도에 파견하여 일본군의 항복수락에 임할 것이며, 잠정적으로 4개국이 공동으로 점령임무를 담당하기로 제안되어 있었다. 다만 불행하게도 알타에 모인 루스벨트?스탈린?처칠은 유럽문제, 소련군의 對日 참전 촉구문제, 전후 일본의 처리문제 등에 신경과 시간을 쏟아버린 나머지 한국문제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투하되고 일본이 곧바로 항복하는 쪽으로 상황이 급전하자 소련군이 재빨리 한반도에 진입했을 때 미?소 양국은 한반도점령에 대한 아무런 사전 합의가 없는 처지에 8?15 직전에야 허둥지둥 38선을 양국 점령군 경계선으로 확정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蘇 학자. “한국전쟁에 대한 진실 말할 필요 있다”
나는 지난날 동유럽 취재 여행중 모스크바에서 6?25때 소련의 역할에 관해서 소련과학원 학자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소련은 한국과의 관계 개선에 열성을 보이고 있으며 한국도 이를 환영하고는 있지만, 6?25때 소련의 역할에 대해 께름칙한 생각이 든다고 털어놓았다, 아시아 전문가인 미하일 노소프씨의 대답은 의외로 시원스러웠다. 밝힐 것은 밝혀야 된다는 태도였다. 지금까지 소련 역사책에는 으레 전쟁이 일어나 며칠만에 서울이 함락되었으며, 또 며칠만에 남한의 3분의 2를 공산군이 장악했다는 것과, 같은 날 한국군과 미군이 공격을 가했다는 정도로 적혀 있다는 것이다. 마치 남쪽에서 전쟁을 일으켰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전쟁에 대한 진실을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으며, 이말은 전후맥락으로 보아 북한의 남침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진실’은 소련의 역사학자들이 밝혀야 할 것이며, 시간과 노력뿐 아니라 ‘용기 ’가 필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소련은 최근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잘못된 일이었음을 공식적으로 시인했으며, 또 56년에 헝가리의 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무찌른 데 대하여서도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 국가들이 잘못을 시인했다.

과연 글라스노스트다운 소련의 처사이다. 그렇다면 40년전 6?25때 소련이 한반도에서 저지른 일에 대하여서도 소련측이 진실을 밝히는 날이 빨리왔으면 하고 기대하고 싶다. 그것이 두개의 주권국가로서 한?소 양국이 떳떳이 관계개선을 해나가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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