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깝고도 멀었던 ‘해인사 가는 길’/헬기 · 갤로퍼 · 도보 등 갖가지 수단 동원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3.1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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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큰스님 영결식장에 모인 3당 대표

지난 10일 해인사에는 ‘10원짜리 정치’의 주역들이 ‘값어치를 측량하기 힘든’ 구도의 길을 추구한 성철 큰스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기 위해 몰려 들었다. 생전에 성철 큰스님은 자신을 만나려는 사부대중에게 3천배 고행을 치르기를 요구했다. 그런 스님의 다비 행사를 보는 일은 내노라 하는 정치인들에게도 역시 어려운 일이었던가. 시간에 맞춰 해인사에 도착하기 위해 3당 대표가 겪은 고생담은 세간의 작은 화재거리가 될 듯하다.

 金鍾泌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은 영결식과 다비식이 열리는 10일 아침 7시 30분, 주요 당직자와 수행 비서진 등 일행과 함께 대구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대구공항에서 승용차편으로 이동한다는 게 본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서울을 출발하기 직전 “해인사에 몰리는 인파로 인해 극심한 교통 체증이 염려된다”는 보고를 받고 김대표는 경차 헬기를 긴급 요청했다. 대국공항에 도착한 김대표 일행 가운데 김대표와 黃明秀 총장 부부, 대표 비서실장, 수행 비서관은 5인승 헬기로 해인사로 이동했지만, 승용차편으로 이동한 주요 당직자와 수행원들은 길이 막히는 바람에 동화사 참배로 일정을 마치고 말았다.

 이동 과정에서 톡톡히 발휘된 집권당의 위력은 그러나 산중 깊숙이 자리한 사찰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영결식 직전 원로 스님 예방을 원했던 김대표는 한번은 진영각 대문에서, 한번은 방 입구에서 ‘원로 스님들께 들어가도 좋은지 여쭤봐야 한다’는 이유로 한참 대기해야만 했다. 10여분 만에 겨우 방안 출입이 허락됐지만, 안에서도 ‘홀대’ 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때마침 공양을 들던 원로 스님들은 의례적인 인사만 건넸고, 일부 스님은 그마저도 생략한 채 공양에만 열중했다. 머쓱해진 김대표 일행은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다른 방에서 공양을 드시라”는 말을 듣고 자리를 물러나왔다.

 민주당 李基澤 대표의 ‘해인사 가는 길’은 그야말로 비상 수송작전이나 다름 없었다. 김대표보다 이른 시각인 같은 날 7시 10분 비행기로 김포공항을 출발한 이대표 일행은 8시 10분께 대구공항에 도착했다. 구마고속도로를 거쳐 해인사 인터체인지까지는 밀려드는 자동차 물결 속에서도 ‘야당 대표 일행을 예우하는’ 경찰 차량의 인도를 받아 그런대로 잘 빠져나갔다. 그러나 인터체인지를 벗어난 2km 지점부터는 2차선 양 방향이 꽉 막히는 바람에 이대표 일행은 발만 동동 굴렀다. 기다리다 못해 이대표 일행은 승용차를 버리고 7백m 가량 떨어진 ‘교통통제선’까지 도보로 행군했다. 통제선 이후부터 길은 뚫렸지만 이번에는 이동 차량이 없어졌다는 문제에 직면했다. 뒤따르던 스리랑카 대사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위원, 용달차 얻어타기도
 한 불신자가 타고 내려오던 갤로퍼 지프를 돌려세워 허겁지겁 탑승한 스리랑카 대사와 이대표 일행이 영결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10시 55분. 행사 시작하기 5분 전이었다. 이대표 일행 가운데 지프에 동승하지 못한 현역 위원들과 수행 비서진, 수행 기자 30여 명은 용달차를 얻어타고 해인사로 이동했다. 이 사실이 부풀려져서 ‘이대표가 용달차를 타고 해인사에 도착했다’는 소문으로 둔갑하는 바람에, 서울에 돌아온 이대표는 농담섞인 인사를 받기도 했다.

 반면 朴澯鍾 신정당 대표는 서둘러 길을 떠난 덕분에 ‘가장 예우 받기 힘든’ 정당 대표인데도 별다른 고생을 겪지 않았다.

 행사 전날인 9일 새마을호편으로 구미에 도착한 박대표는 금호공대에서 강연을 마친 뒤 해인사 근처에 있는 가야산국민호텔에 머물렀다. 다음날 아침 7시 45분계 승용차 편으로 해인사로 떠난 박대표 일행은 수월하게 차량통제소까지 진입했다. 시간이 넉넉하다고 판단한 박대표 일행은 여기부터 일부러 일반 신도들과 섞여 걸어 올라갔다. 영결식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그는 헌화 순서 직전에 자리를 뜬 김대표와 이대표와는 달리 끝까지 자리를 지켜 눈길을 끌었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그는 일반 신도와 함께 걸어서 하산하며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10일 오전 한때 해인사 경내로 옮겨졌던 ‘여의도 정치’. 김대표는 헬기까지 동원하는 집권당의 실력을 십분 보여 주었고, 박대표는 몸으로 뛰면서 현장을 십분 활용했다. 이대표 역시 긴급 수송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행사장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다. 그러나 상좌승들에게도 “이 쓰잘 데 없는 시주 도적놈들아”라고 호통치는 등 생전에 욕설을 아끼지 않았던 성철 큰스님이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무어라 했을까. 많은 사부대중이 해인사 정치인들을 지켜보며 품었던 궁금증일 터이다.
徐明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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