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全學聯 의장 金民錫씨
  • 편집국 ()
  • 승인 1990.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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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選결과 보고 정치 입문”

 나이 27세. 키 1미터70센티. 서울대 사회학과 졸업. ‘사근사근한’ 전형적인 서울말씨에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을 잘 터뜨리는 청년. 맺힌 데 없이 잘생겼지만 그렇다고 남을 주눅들게 하지도 않을 만큼 편안한 느낌을 주는 얼굴. 부모가 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으며 종로에서 외국어학원을 경영하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3형제 중 가장 귀염받는 막내.

 金民錫씨의 개인적인 이력을 적어나가다 보면 마치 어느 결혼상담소의 ‘유망 청년 신상소개 카드’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그의 사회적 이력서는 ‘80년대의 학생운동이 배출해낸 운동권 투사’로 그를 기록하고 있다. 80년대 중에서도 가장 학생데모가 치열했던 한해로 기억되는 85년에 서울대 총학생회장이자 ‘전대협’ 전신인 ‘전학련’ 의장을 지낸 골수 운동권. 세상을 놀라게 했던 서울 미문화원 사건의 배후조종자로 경찰 수배를 받으면서도 여러차례 시위를 주도하며 경찰의 현상금만 올렸던 이른바 주동인물. 경찰이 에워싼 집회장을 여장 차림으로 유유히 빠져나가다 구속된 이후에는 ‘광주사태’를 ‘광주학살’로 고집하며 재판정을 광주항쟁의 난상토론장으로 만들어놓게 했던 장본인.

 이 80년대의 젊은 투사가 90년대 들어 ‘진보적 대중정당 준비모임’(재야신당 · 대표 : 이우제)의 참모로 변신했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그 자신과 동료들이 그토록 부인하고 규탄해 마지 않던 합법정당의 문을 두드리고 잇는 것이다. 항소 이유에서 “평범한 젊은이를 운동권으로 만든 것이 바로 70년대와 80년대의 상황이다”라고 반박했던 그의 논리에 따르면 어떤 시대적 변화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선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 먼저 최근의 일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5공시절 군사독재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한 사람으로서 전두환씨 증언을 보면서 유다른 감회가 있었을 텐데요.
 진실된 증언도, 진정한 청산도 이루어지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예상된 일이 아닙니까? 지난해 ‘12 · 15 합의’ 자체가 지배세력과 국민들간의 진정한 대타협이 아니라 보수세력들간의 타협에 불과했던 것이니까요. 그토록 어이없고 기만적인 증언이 나왔는데도 여야 할 것 없이 이쯤에서 관두자며 서로의 지분이나 열심히 챙기자는 식의 정계개편에만 혈안되어 있는 현실이 그것을 반증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요, 단순히 한 정권에 대한 단죄 여부가 아니에요. 해방 이후 줄곧 그래왔지만 역사의 심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런 일이 자꾸 쌓여가다 보면 결국 정치적 허무주의, 냉소주의, 패배주의가 이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이지요.

● 당시 학생운동이 군사독재의 정당성에 의문을 던지는 선도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광주와 미국의 책임’ 문제를 제기했던 미문화원 점거농성 사건도 그랬거니와 ‘좌익 · 용공’으로 발표되었던 ‘삼민투’ 사건도 그렇고, 아직도 국민들 사이에는 그 무렵 학생운동을 굉장히 과격했던 것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사실 학생들이 과격했던 게 아니라 ‘상황’이 과격했던 것이지요. (웃음) 또 폭력성 문제만 해도 그래요. 학생들과 군사독재의 폭력성을 놓고 보면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였어요. ‘좌익 · 용공’이란 시선도 따지고 보면 학생운동이 가지는 ‘선도적’ 입장에 대한 오해가 아닌가 해요. 개헌운동도, 광주문제에대한 것도, 반독재 · 반외세 주장도, 처음 제기될 때에는 굉장히 과격한 주장처럼 들렸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일반화된 사실이 되었거든요. 당시 학생운동의 주장이 ‘앞서는’ 것인 뿐, 좌익 · 용공도 과격도 아니라는 것은 6월 민주항쟁을 통해 검증되었다고 봅니다. 어느 정도의 선도성은 학생운동만이 가질 수 있는 미덕이라고 생각해요.

● 미문화원사건 재판 때에는 “사법부를 인정할 수 없다”며 아예 첫재판을 거부하기도 했는데…. 재판정에서의 조직적인 재판거부, 법정소란, 가족농성이 이때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데요. 이것도 과격한 상황 탓이었습니까?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 무척 온건한 성격이에요. 남에게 싫은 소리도 잘 못할 정도로요. (웃음) 그때 담당검사도 제가 워낙 온순하게 보여서 다른 학생들과 병합심리를 하기로 했다고 하던데요. 그런데 주변상황이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어요. 워낙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사법부의 정치적 독립성이 없어 소신판결을 기대할 수 없었는데다 재판 자체가 무척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고 방청객보다 전경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심지어 가족들의 방청권마저 1매로 제한하는 일까지 벌어졌어요. 그래서 이런 상환에서의 재판이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재판을 거부했던 것이지요. (85년 7월15일 서울지방법원에서 열린 미문화원 점거농성 관련 재판 첫날. 그는 ‘우리는 왜 사법부를 거부하는가’ 라는 요지의 재판거부 발언을 했다. 그후에도 그는 ‘의식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광주민주화운동이 ‘사태’냐 ‘학살’이냐를 놓고 검사측과 논전을 벌이기도 했다.)


● 지금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것 같습니까?
 꼭 같은 행동은 안하겠지요. 세월이 흐른 만큼 우선 제자신도 여러모로 변했고요. 어떤 행위나 행동도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구체적 상황과 개인적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때와 거의 달라진 것이 없으니 그게 문제지요.

● 상황이 그때와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선 단적인 예로 5공시절보다 2배나 많은 양심수들이 양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해 여름 여야 정치인들이 ‘이런’ 문제를 거론하지 말자고 담합한 뒤로부터는 아예 그 문제는 발설조차 하지 않고 있어요.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고 그 사실이 없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또 민주화가 실질적으로 진전되려면 악법부터 개폐해야 하는데 별다른 진전이 없어요. 오히려 ‘집시법’ 같은 경우는 기형적으로 더 개악되기도 했습니다.

● 지난날에 비해 전혀 상황이 달라졌다고 보지 않는다면 제도권 정치에 기대를 거는 것이 좀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아! 그건 약간 설명이 필요한데요. 근본적인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우선 표면적으로나마 ‘합법적 공간’은 훨씬 넓어졌습니다. 정권의 차원에서도 5공시절처럼 눈에 보이는 탄압을 하거나 최소한도의 룰조차 묵살하는 것은 매우 어렵게 되었다고 봐요. 6월 항쟁 때 분출된 국민의 민주화 의지, 힘이 그러게 만든 것이지요. 그러니 합법정당의 여건은 마련된 셈이지요.

● 그러나 재야 일부에서는 아직은 상황에 변화가 없으므로 제도권 안에 들어가기보다는 각 부문운동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는 점을 들어 합법정당 시기상조론을 제기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시기론을 두고 상당한 격론이 일었던 게 사실이에요. 하지만 70~80년대를 거치면서 노동운동, 빈민운동, 농민운동, 전교조운동 같은 각 부문운동도 어느 정도 성장했고 또 이런 부문운동도 건강한 정치세력이 뒷받침해야 더 발전할 수 있는 게 아니겠어요? 기존의 재야운동 방식으로는 광범위한 국민대중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여 희망과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 개인적으로는 시기상조가 아니라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요.

● 주로 객관적 상황을 분석하는데 정당활동에 뜻을 둔 개인적인 동기도 있을 텐데요.

 청주교도소에 복역하고 있을 때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요. 선거결과가 나오던 날은 교도소가 울음바다로 돌변했습니다. 야당지도자들이 끝내 단일화하지 못한 바람에 그토록 기대했던 대통령선거가 이런 결과를 나타낸 데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비통해 하던지 전 그날 분위기를 평생 못잊을 거예요.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어렴풋하게나마 ‘아, 국민들을 이렇게 절망케 하는 정치라는 것을 한번 좀 잘해볼 수는 없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당참여를 현실적으로 굳힌 것은 지난 여름 영등포을구 선거를 전후해서지요. (그는 지난해 8월 영등포을구 재선거에서 ‘범민주연합’ 고영구 후보측의 선거참모로 활약했다.)

● 신당 이야기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보지요. 어떤 지지기반을 바탕으로 언제쯤 탄생하게 됩니까?

 노동자, 농민, 여성, 도시빈민, 도시 서민, 지식인을 포함한 중산층은 물론이고 나아가서 대재벌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는 중소 자본가들까지 망라하게 될 겁니다. 2~3월경 창당추진위원회가 구성되면 본격적인 창당작업에 들어가겠지만 구체적인 시기는 지방자치제와의 연관 속에서 확정되겠지요.

● 지지기반만 놓고 본다면 기존의 보수 야당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 게 아닙니까?

 대중정당을 표방한다고 해서 다 진정한 대중정당은 아니지요. 지금 어떤 정당이 노동자 · 농민을 지지기반이라 내세운다 해서 그들의 이익이나 주장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이 있습니까? 노동자 · 농민은 고사하고 대기업의 압력과 정부정책 속에서 새우등처럼 터지는 중소자본가와 중산층의 이익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있는 실정 아닙니까? 당리당략이나 한 개인의 명망, 계보에 좌우되지 않는 진정한 의미의 대중정당이 우리가 꿈꾸는 진보적 대중정당이지요. 물론 우리가 노동자 · 농민계층에 더 비중을 두려는 게 다른 정당과 다른 점이기도 합니다.

● 본인이 직접 선거에 출마할 뜻도 있습니까?

 곤란한 질문인데요. (웃음) 사실 그런 건 별로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지금은 당 자체의 발전이 더 중요하게 때문에 그문제는 별로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 개인적인 데로 화제를 좀 돌리죠. 어머님(金春玉 · 59)도 아들 못지않은 민주투사로 알려져 있는데….

 저희 어머님도 여느 평범한 어머니나 마찬가지였어요. 아들이 운동권이라는 걸 처음 아셨을 때만 해도 눈물로 말리다가 학생회장 선거에 나갈 즈음엔 지레 포기하고 감옥에나 가지 말라고 빌다가, 감옥에 가니까 큰 고생이나 안했으면 하는 그런 어머니 있잖아요. 그런데 미문화원사건 재판을 지켜보시면서 슬그머니 ‘의식화’되셨나 봐요. 한번은 면회를 오시더니 “그동안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바람에 너희들만 고생시켰구나. 나도 이젠 너희들을 도우마” 그러셔요. 그담부터는 외려 제가 놀랄 정도로 민주집회가 있는 곳마다 찾아가시고 ‘민가협’일에 발벗고 나서시더라구요. 어머니들은 다 위대한 것 같아요. (金春玉씨는 민가협 초대공동의장으로 일하다 최근에는 ‘인권수호운동가협의회’ 의장일을 맡고 있다. 지난해 말에는 《민주화의 길목에 선 어머니》라는 기록사진집을 펴낸 바 있다.)

● 아무리 그런 어머님이라도 ‘이젠 돈벌이 좀 해라’하는 은근한 소망을 갖고 계실 텐데요.

 아마 포기하셨나 봐요. (웃음) 전혀 그런 기대는 안하세요. 또 크게 고정적인 수입은 없지만 여기저기 원고도 쓰고 번역도 하고 제 앞가림은 제가 해요. 학교 다닐 때도 이상하게 뭐 장학금도 받고 해서 집에 크게 손벌린 기억은 없는 걸 보면 돈복이 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졸업한 친구들은 이미 사회에 진출해 다른 길을 걷고 있을 텐데, 자신을 그들과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합니까?

 별다른 차이는 안 느껴요. 저에게는 소위 운동권이 아닌 친구들이 더 많은데요, 그 친구들 만나도 참 마음이 편해요.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얻지 못하는 다른 발상 같은 것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좋아요. 또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경험을 공유했기 때문인지 각자 사는 길은 달라도 공통점이 훨씬 많습니다.

● 지난해 임수경양 방북으로 학생운동권에서도 통일운동을 중요시하는 입장과 민중민주운동을 우선시하는 입장 갈등이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운동권의 선배로서 요즈음 학생운동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요.

 현장에 몸담고 있지 않은 입장에서 그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무리라는 전제를 달고 말한다면, 지난 한해는 여러 가지 과도기적인 오류가 나타난 것 같아요. 통일문제만 하더라도 그 뜻은 좋지만 대중의 의식수준이나 현실과 지나치게 동떨어진 채 과도하게 추진된 감이 있어요. 하여튼 지난해부터 나타난 과도기적 갈등은 운동권 나름대로의 고민과 모색, 그리고 대중들이 요구에 의해서 점차 수렴 · 통합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아까 대담 첫머리에서 김민석씨는 학생운동이 가지는 특징을 의식의 ‘선도성’에 있다고 말했는데요. 통일문제에 대한 관심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학생들의 논의가 북한에 대한 이제까지의 금기를 깨고 통일에 대한 열망을 크게 확산시킨건 사실입니다. 또 통일문제야말로 당분간은 어느 정도 의식적인 진보성을 가져야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구요. 그렇지만 어떤 주의 · 주장도 그 사회의 조건, 시기, 그리고 대중들의 의식수준을 고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 학생 시절 이후 가장 두드러진 생각의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인지요

 예전에는 정치만 잘되면 모든 것이 제대로 풀려갈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 와서는 모든 부문의 일들이 꼭같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지난해 동구권 여러 나라들에서도 인간해방, 관료주의 타파의 물결이 휩쓰는 걸 보면서 90년대는 이념과 체제를 떠난 전체적인 인간해방이 세계사적 과제가 되겠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어요.

 그 스스로가 인간해방의 연대, 휴머니즘이 꽃필 연대로 규정하는 90년대의 첫해에 개인적인 소망이 없는지. 미혼인데 혹 장가갈 계획은 없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그는 “올해에는 창당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며 예의 그 사람좋아 보이는 특유의 웃음을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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