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복수심’에 불타는 성인만화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6.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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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봉성씨 작품 등 ‘단순구조·모티브’한계 못 벗어…비평·이론 부재가 큰 원인

 “나는 '대중의 천박함을 증오한다'라고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 쓸 몇 명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 과연 누가 '그리고 나는 그 같은 천박함과 멀리 떠나 있다'라고 당당히 덧붙일 수 있을까."

 계간《문학과 사회》 여름호에 만화가 박봉성씨의 작품세계를 분석한 정준영씨(강원대 강사)는 자신의 비평문 첫머리에 위와 같이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 보들레르의 글을 인용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만화가 대중문화의 한 영역을 담당하면서 그 전성시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씨가 저렇게 사회의 이중성을 지적한 사실은, 만화에 대한일반의 인식이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환기시킨다. 아직도 기성세대는 만화를 '악의 꽃'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다.

 성인장편만화 (이하 극화)가 영화로 만들어지고 사회과학 이론서 · 참고서가 만화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한국역사도 대형전집 만화로 꾸며지는 한편 광고나 선거, 종교 선교에서도 만화를 수용하는 등 만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다양해지는 현실에 견주어볼 때, 정작 만화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루어져 있고 그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를 이론적으로 접근하는 시도는 그리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특히 만화의 여러 장르 가운데 가장 큰 생산력과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성인극화에 대한 관심은 낮으며, 있다 해도 "나쁘다, 해롭다" 따위의 '즉결심판' 차원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80년대 중반 이현세씨의 《공포의 외인구단》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만화는 성큼 대중성과 작품성을 얻어냈다. 이현세씨의 등장은 곧이어 '만화가재벌'이란 신조어를 낳으면서 만화작가의 사회적 위치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물론 만화의 전성시대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작가들의 노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화세대로 불리는 전후세대가 성년으로 편입되었다는 사회적 변화가 만화의 시대를 가능케 한 주된 요인이었다. 만화의 외형은 89년에 연간 '발행부수' 1천만부를 넘어섰으며, 스포츠신문 지면과 전문 매체 그리고 전국에 분포되어 있는 6천여개의 만화 대본소와 일부 서점을 통해 만화는 모든 연령층에 노출되고 있다.

 고우영 강철수 박수동씨 등이 이룩한 70년대 성인만화는 주로 性을 주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80년대로 넘어오면서 아동만화와 성인만화의 경계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정준영씨에 따르면 스포츠만화에도 남녀관계가 등장했으며 특히 기업만화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가 나타났다.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사실성의 증가를 큰 변화로 들 수 있다. 동물의 의인화가 사라지고 머리와 몸체의 비율이 3~4등신에서 5등신 이상으로 변화되어 사실성이 높아졌으며 작품의 분량이 대형화되었다. 배경의 정밀한 묘사, 컷(화면)의 다양한 구성 , 인물의 클로즈업 등 영화기법이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만화의 문화적 지체현상 심각"
 이즈음의 만화는 80년대 후반에 비해 크게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80년대의 인기작가는 지금도 인기작가이고 당시의 신인은 지금도 신인"이라는 이현세씨의 지적이나,"우리 사회 전반이 대중사회로 접어든 데뷔해 유독 만화만은 80년대 그대로여서 , 문화적 지체현상이 심각하다"는 만화평론가 손상익씨의 안타까움이 있고 보면, 만화는 제자리걸음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80년대 후반 젊은 평론가들이 제기한 문제점들은 지금도 그대로 적용된다.

 무크지 《만화와 시대》에서 김창남(대중문화평론가)씨는 성인극화는 다양하지만 그 구조는 거의 동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극화에서 주인공들을 움직이는 동기는 모두 최고의 위치에 도달하려는 '신분상의 상향적 가치관'이며 주인공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성격을 가진 인물들로서, 결국 극화는"철저히 자본주의적이며, 강자 중심적이며, 남성 우월주의적이며, 패권주의적인 현실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극화가 안고 있는 문제는 작가만의 잘못이 아니라 사회와 독자의 책임도 크다고 보는 문학평론가 위기철씨는 위 무크지에서 성인극화가 "대중의 욕구불만과 대리해소 심리에 호소"하며 따라서 "독자로 하여금 항상 승리자가 되게끔 하는 우상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정준영씨의 박봉성 만화 분석과, 이현세 허영만씨의 최근작에 나타나고 있는 주인공의 성격과 구조를 살펴보는 일은 만화가(계)의 현주소 및 만화 발전의 대안들을 모색하는 것과 이어진다.

 정준영씨는 박봉성씨의 극화들이 "매우 단순한 모티브와 복고풍이 지배하고 있다"면서 이 두 요소가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그의 재기작인 《20세 재벌》(83년)에서 최근의 《뉴욕출정》에 이르기까지 60여책 1천여권을 내놓았는데 그 작품들은 소재나 줄거리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수모티브'와 '무협지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박봉성 만화에 나타나는 복수모티브는 성인극과의 주요한 모티브이다(아래 표 참조). 박봉성씨는 이 같은 지적을 긍정하면서 "나는 뚜렷한 동기 부여와 극적 구성을 강조한다"고 말한다. 박씨는 복고풍을 '정통파'라고 표현하기도 하는데, 이 같은 자세가 대중심리에 영합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에 "우선 읽히지 않으면 만화로서 존재 가치가 없다. 영합이 아니라 당연한 자구책이다"라고 답한다.

 <표>에 소개한 작품들은 모두 스토리 작가에 의해 글이 쓰여지고 만화가와 그 제자들이 그린 것으로 이른바 '만화공장' (화실)에서 생산된 극화의 전형적인 작품이다. 세 작품은 이외에도 많은 공통점이 있다. 작품의 무대가 국제적이며 작품을 이끌어 가는 동기도 같고 주인공의 비정상적인 가족사와 성격 그리고 문제의 개인적 해결방식 등 구조도 비슷하다. 화실이 커지다 보니 개성은 자리잡을 수가 없고 몇몇 인기 작가의 그림체만 남는 것이다.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씨등은 모두 비대해진 화실 제작방식에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현세씨의 《악마의 성전》은 그의 전형적 캐릭터인 오혜성 (까치) 이 권투선수로 둥장, 사랑을 되찾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딛고 일어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여실하게 나타났듯이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테마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의 극화는 우선 재미있다. 오혜성이란 다소 낭만적인 우상을 통해 사랑과 우정을 강조하는데, 사실성과 실험성이 조화되고 있다. 그는 "뚜렷한 세계관은 없지만, 만화는 사실주의에 바탕해야 하며, 사회의 흐름에 늘 민감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만화관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는 "만화와 작가에 대한 독자 · 사회의 기대가 너무 크다"면서 아직 성인극화의 개념과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세워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털어놓는다.

《악마의 성전》이 "신이 주관하는 세계를 인간이 주관하는 세계로 바꾸어야 한다“는 종교적이고 관념적인 분위기를 풍긴다면, 허영만의 《벽》은 랭보의 시로 작품이 시작되면서 허무주의적인 인상을 심어준다. 역시 가족사와 기존의 가치관으로부터 일탈된 주인공의 방황은, 복수모티브에 의해 탁월한 기업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80년대 중반 《오 한강》으로 대학생 독자로부터 박수를 받았던 그는 주인공 이강토를 통해 도시 공간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적 청년을 묘사해왔다. 최근에 나온 《48+1》에서 도박세계의 은어와 생리를 생생하게 그려낸 그는 "이제 만화가 다루어야 할 대상이 다양해졌다. 만화가가 일일이 취재를 다닐 수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스토리작가의 필요성은 더욱 높아질 것"이라고 말한다.

 《벽》과 《악마의 성전》은 우연찮게 둘 다 초반부에 광주항쟁이 묘사된다. 《벽》에서 신석기와 그의 첫사랑인 희재는 80년 5월 광주로 내려가 열흘을 보내면서 가까워진다. 《악마의 성전》에서 오혜성을 도와주는 미애는 어린 시절 광주 5월의 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 줄거리가 진행될수록 이들이 겪은 정치 · 사회적인 체험의 비중은 사라지고 만다. 결국 사회적인 요소는 희석되고 가족사에서 증폭된 복수심과 우상화된 주인공의 (초)능력만이 작품을 이끌고 가는 것이다.

 박봉성씨가 복수모티브와 단순한 서술구조라는 '복고'를 고수하는 데 비해 이현세 허영만씨는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이씨는 《아마겟돈》에서 SF를 다루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적인 '중심해체'를 엿보이고 있으며, 최근의 《블루엔젤》에서 여성시각으로 세상을 읽는 옴니버스 형식을 선보이는 둥 독자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한다. 허씨 또한 아동만화와 SF에 손대고 있다. 이 변화들은 8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 나타난 '전망부재'와 '허무주의'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두 사람은 민중만화의 당위성과 그 역할을 인정하지만, 세계관을 고정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중간자적 입장'이라고 말한다.

 이현세씨가 말했듯이 작가들은 독자들이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요구하는 현실이 부담스러워 보인다. '음지문화'란 낙인을 벗어버린 지 얼마 되지 않으며, 아직도 대본소용 단행본 심의에서는 아동만화와 청소년만화만 규정되어 있지 성인만화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다가 만화에 대한 이론이나 전문적 교육기관 그리고 비평이 전무했던 것이다. 허영만씨는 "좀더 기다려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민중만화를 제외하면 ,일반 작가들은 아직 정치 · 사회적인 테마에 익숙치 못하다. 소재의 영역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심의에 길들여진 습성"이 쉽게 고쳐지지 않을 만큼 심의 콤플렉스가 단단하게 박혀 있는 것이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씨는 "검열에 가까운 만화의 사전심의는 철폐되어야 한다. 현재의 심의제도는 작가의 창작의욕만 꺾어놓을 뿐이며 효과도 일과성이다"라고 강조하면서 "대중문학이나 영화 · 비디오의 성적 표현은 방치하면서 유독 만화만 억압하는 현실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심의는 시민들의 자율적 기구에 맡겨야 한다고 그는 덧붙인다.

작품성에 승부 거는 작가정신 세워야
 80년대 인기작가들은 후배작가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한국만화의 3세대인 이들은 만화의 대중화에 이바지했다는 데서 의미를 찾고 있다. 이들은 일본만화의 영향을 부인하지 않는다. 습작시절 그들이 모범으로 삼은 선배작가들의 그림이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고 일본 만화도 많이 보아왔으며 만화하는 형식 자체가 서양에서 들어온 것이라고 그 배경을 설명한다. 제4세대들이 선배들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적 만화는 뿌리를 내릴 것이라고 그들은 내다보고 있다. 신세대들 앞에는 연재와 단행본 등 만화의 폭발적 수요 때문에 만들어진 몰개성적인 작품과 '만화공장'의 역기능을 개선하고, 스토리작가 층을 두텁게 해야 하며 , 대본소가 보장하는 경제적 이익보다는 작품성과 전문성에 승부를 거는 작가정신을 세우는 일, 그래서 영화 ·비디오와의 싸움에서 만화가 독자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놓여 있다.

 평론가들은 이희재씨가 이룩하고 있는 건강한 민중만화와 함께, 제4세대인 박흥용씨 같은 작가들에게서 한국만화의 미래를 찾고 있다. 박흥용씨는 연재하고 있는 자전적 만화 《나는 골고다로 간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불쌍한 일이다. 세상이 내 만화관을 흐려놓은 게 아니라 심지없는 내 만화관이 세상에 흘러 떠내려가고 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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