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의식으로 풀어쓴 鄕土史
  • 경북 영풍·김상현 기자 ()
  • 승인 1992.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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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풍 宋志香옹‥‥향토지에 인물·지리 등‘고향의 모든 것 담아



 송지향옹(75)의 집필실은 단정한 그의 모습처럼 소박하고 깔끔하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원고지와 順興面의 옛 지도, 여기저기서 구해온 향토사 자료들이 놓여있다. 책상 위의 난초와 수석이 흰 수염에 정갈한 두루마기 차림과 어울려 옛 선비의 단아한 풍모를 그려낸다. 그는 경북 인근에서 널리 알려진 제야 향토사 학자이다. 제야라는 말에는 두가지 뜻이 들어 있다. 공인된 연구기관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것과 정규교육을 통하지 않고 독학으로 향토사를 연구해왔다는 것이다.

 일찍이 향토사 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송옹은 더 이상 미루다간 기회가 오지 않을 것 같아 50세 때인 67년 몸담고 있던 금계중학교에 사표를 냈다. 뒤늦게 연구에 뛰어들었지만 열성적으로 매달린 덕택에 83년에《安東 鄕土誌》를, 87년에《榮州·榮豊 鄕土誌》를 내놓을 수 있었다(여강출판사 刊).

 그는 지금《順興面 鄕土誌》를 쓰고 있다. “처음에는 나이도 들고 건강도 좋지 않아 망설였지만 누군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 꼭 정리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어서 결국 맡게 됐다”고 말했다.

 

“史觀의 기저는 향토애와 민중의식”

 소옹이 순흥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곳이 매우 유서깊은 고장이기 때문이다. 첫 사액서원인 紹修書院이 있기도 한 순흥은 삼국시대 이래 조선 초까지도 순흥府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영주·영풍을 이루는 세 고을 중 하나였다. 조선 초 순흥부가 없어지고 영천 풍기로 줄었다가 조선 후기에 다시 회복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다시 영주군으로 통합되었다. 그후 영주군 관할이던 영주읍이 市로 승격되면서 영주군은 영풍군으로 바뀌었고 순흥은 이런 우여곡적 끝에 영풍군의 면소재지로 격하되고 말았다.

 《榮州·榮豊 鄕土誌》는 상·하 두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권은 다시 둘로 나뉘어 1편에는 이 고장을 이루는 영주·순흥·영풍 세 고을의 옛 郡誌들들(57년 권태춘 김돈영 등이 집필한《榮州誌》와 영조 초에 편찬된 《順興誌》《豊基誌》등)을 그대로 옮겨 실었으며 2편에는 마을과 관련된 여러 자료를 풀어놓았다. 이를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고을의 유래 연표 地境 행정구역의 변천사를 비롯해 호구 토지 교통 역 봉수대, 일제강점기의 구역, 역대 수령, 민속 교육 종교 문화재등 인문지리의 모든 것을 담았다. 하권은 ‘고장의 씨족 인물’이라는 대제목으로 진주 안동 봉화 풍산 청도 의성 김해 수성 영천 등을 세분하여 이 지방의 인맥을 망라하고 있다.

 그의 향토사 연구는 바깥에서 안으로, 넓은 곳에서 더 좁은 곳으로 들어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안동으로부터 그가 사는 영주·영풍으로, 다시 순흥으로 연구 대상이 축소된 것이다. 그러나 범위의 축소가 곧 연구열의 축소로 이어진다고는 볼 수 없을 것같다. 오히려 고향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더욱 구체화되는 증거로 보인다.《榮州·榮豊 鄕土誌》의 후기에는 그의 이런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첫째는 고향의 유서를 좀더 깊이있게 공부해보자는 개인적인 동기에서, 둘째는 책 한권으로 고자의 古今을 웬만큼은 살필 수 있게 하자는 뜻에서, 셋째는 후학의 참고자료로 쓰여 고장 연구의 발판이 되도록 하자는 욕심에서 향토사를 집필해왔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향토사를 꿰뚫는 사관의 기저를 강렬한 향토애와 민중의식에 두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의식은 더욱 첨예해져 자기 자신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오는 8월~9월중으로 향토지 집필을 마치면 곧 ‘자전적인 기록’을 남기는 일에 착수할 계획이다. 이것은 자신의 한 생애를 돌아보고 현실의 살림살이에 무능하고 등한했던 어리석음을 성찰하는 내용이 될 것 같다.

 송옹이 보여주는 애향심과 향토사에 대한 소명의식은 지방화 시대로 가는 요즘의 흐름에서 볼 때 꽤 두드러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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