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 서승씨의 얼굴과 내 얼굴
  • (본지 칼럼니스트 · 소설가) ()
  • 승인 199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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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직접 목격한 건 아니지만 19년 동안의 옥살이 끝에 풀려난 徐勝씨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가슴이 미어지는 느낌이었다. 목이 메었다. 한 장의 신문사진에 표현된 그의 얼굴 옆에는 마중나온 동생 俊植씨의 깨끗하고 준수한 얼굴도 보였다. 두 사람의 형기를 합치면 36년 - 우연찮게도 일본의 한국강점시기와 맞아 떨어진다. 꼭 일주일전에 겪은 일이 아직도, 아니 두고두고 얼얼한 감정을 쏟아붓는 까닭을 분단의 비극에서 찾는 것은 상투적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서이 여전히 진행형의 모습으로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형제가 체험한 어제와 오늘은 특히 지식인에게 많은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전향서가 표현하는 비인간성

 사건이 발생한 71년 이래의 처참한 정치상황이라든가 간첩으로 치죄되기 전후의 재판과정, 또는 화상을 입은 경위 등이 조금은 밝혀진 지금, 그걸 다시 되새기는 건 허무할 것인가. 다만 확인하는 것은 참담한 당시의 공포와, 다소 누그러지기는 했을 망정 비슷한 경향이나 인간의 인간다움을 훼손하는 틀이 고스란히 상존해 있다는 점이다. 그런 내력에서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전향서 쓰기의 관행이다. 서승씨는 출감직후의 기자회견을 통해 “양심을 지켜 전향서를 쓰지 않고 출소한 것을 조그만 성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생 서준식씨는 이 전향서 쓰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형기 7년을 다 마치고도 10년이라는 세월을 더 철창속에서 지내야 했다. 배보다 배꼽이 컸던 셈인데 ‘종이 한 장’의 차이는 그만큼 사람의 양심과 무게를 재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 그걸 아는 까닭에 전향서를 요구하는 쪽이 있겠거니와 그것은 철저히 반인간적이고 치사하다.

 ‘전향’이란 말은 적어도 국내에서 발간된 정치학사전엔 없다. 법률을 다룬 사전에도 그런 항목이 드물다. 군국주의시대의 일본이 1925년 4월에 제정한 치안유지법(45년 10월 폐지)과 더불어, 우리 독립운동을 포함한 체제반대를 탄압할 목적으로 1933년 ‘사법당국 통첩’에 의해 ‘창조’한 것이다. 따라서 전향은 일제가 ‘개발’한 유물이며 이제는 그것도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 의문없이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도 아닌 제도를 지금까지 관행적으로 시행하는 것은 법치국가의 이름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것은 인간의 무력감에 편승하여 인간의 긍지와 존엄을 마멸시키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서준식씨는 이 문제에 대해 언젠가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서양에서도 공무원 ?업이나 이민등록을 할 때, 충성선서 같은 것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 있는 정치범에게 그런 것을 요구하는 예가 있다는 건 듣지 못했습니다. 나라고 갈등이 왜 없었겠습니까. 갈등 회의 동요의 연속이었지요. 저를 야무진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도 않습니다. …전향을 거부한다는 것은 서아무개라는 인간의 모두를 건다고 해도 좋을 만큼 복잡한 것입니다.”

 그는 또 신문에 기고한 글(<평화신문> 88년 7월 31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전향? 까짓것 종이 한쪼가린데 써주면 어때서요?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전향문제는 종이 한쪼가리의 문제가 절대로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왜 저 일제시대로부터 정치권력들은 그렇게도 많은 노력을 들이면서 그렇게도 끈질기게 양심수들로부터 전향서를 받아내려고 했겠는가.”

 그리고 가혹한 분단상황에서 전향서 쓰기를 거부하는 것은 공산당이나 하는 짓이라는 기묘한 상식의 허구를 들었다. 그 결과 인권침해 행위 자체를 인정하는 관행을 확립시켜주고, 그걸 거부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지속적인 박해와 고립을 당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황량한 광야의 미아와 같이”

 아무튼 서승씨는 감옥에서 나왔다. 스물여섯살 이후의 꽃다운 나이를 그속에서 다 까먹고, 어떻든 마흔다섯의 ‘험한 얼굴’로 역시 험한 세상의 빛을 쬐며 우리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러나 감옥의 두 아들을 만나기 위해 무려 60여회나 바다를 건너왔던 어머니(吳己順)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80년 5월 작고). 번번이 면회를 거절당하다가 첫 재판이 끝난 다음에야 큰아들을 만난 그의 어머니는, 수술이 덜 끝나 화상으로 癒着된 입에 스트로로 음식을 흘려넣는 아들을 보아야 했다. 그전에 눈물이 모두 마른 탓에 죽었다는 아들이 살아 있는 것만을 다행히(?) 여겨야 했던 어머니의 고향은 공주군 우성면이라던가. 먼저 가 있던 아버지를 좇아 어머니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연락선을 탄 것은 여덟살 때였다(1928년). 학교 문앞에도 가보지 않았으나 별의별 일을 하면서 4남1녀를 키운 활달한 여성이었다. 그러므로 서승씨의 심정은 오죽할까. 그가 옥에 있을 때, 어머님 영전에 띄운 편지의 한 구절로 짐작이나 할까보다.

 “어머님은 이제 가셨습니다. 이 텅 빈 구멍, 무서운 缺落, 뼈저린 아픔을 어떻게 할까요… 落日 차가운 황량한 광야의 미아와 같이 목놓아 어머니를 불러볼까요…”(吳己順추도문집간행위원회 편《아침을 못보고》).

또한 기억하자, 그의 얼굴에 머문 조국분단의 비극적 흔적은 바로 내것이라는 것을. 마흔을 넘은 사나이는 누구나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지만 서승씨의 외모는 절대 그의 책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말을 한 링컨도 이해할 터이다.
(본지 칼럼니스트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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