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청문회 열어야한다”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2.06.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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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신사 부실 특융 3조원으로 땜질…배임 논란까지



 한국은행 특별융자(이하 한은특융)가6공화국 들어 처음 이루어지게 됐다. 투자신탁회사들의 경영정상화 방안을 놓고 벌인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줄다리기는 ‘5?27 특융조처’로 결론이 났다. 이를 반대해온 한국은행은 국회의 동의를 거치도록 함으로써 ‘체면’을 세웠다. 부실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지방 투신사의 수익증권 환매(만기 전에 해약해 돈을 인출하는 것)사태가 정부로 하여금 더 이상 시간을 끌 수 없게 한 것이다.

 특융 규모는 2조9천억원(연리 3%). 투신사들이 요구하던 3조7천억원에는 못미치는 수준이지만, 여기에다 국고에서 3천억원을 연리 3%로 지원키로 함으로써 투신사들은 일단 연간 6천억원의 이자 부담을 2천1백억원 수준으로 줄일 수 있게 됐다. 재무부는 올해 이 회사들의 경영적자가 5천4백33억원에서 4백87억원 선으로 크게 줄 것으로 내다본다. 그러나 증권계는 이 돈으로 투신사들의 완전한 경영정상화가 이루어지겠느냐 하는데 대해 회의적이다. 지원 내용이 발표되던 5월27일 종합주가지수가 15포인트나 올랐지만, 이 상승세가 계속돼 증시회복으로 이어질지 알 수 없다고 걱정하는 소리가 많다. 증시회복이 가장 좋은 해결방안이기 때문이다.

 서울에 본사를 둔 한국 대한 국민 등 3개 투자신탁회사는 89년 12월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85년부터 88년까지 증시호황기에 투신사의 위상은 대단했다. 대학생들은 일하고 싶은 직장으로 재벌사를 제치고 6번째로 투신사를 꼽았다. 장사가 잘돼 주주에게 배당을 해주고도 사내유보가 2천억원이나 되었으며 법인세 납부실적도 3위를 기록할 만큼 경영성적이 좋았다. 투신사들은 이로 인해 증시의 거대한 공룡으로 자리잡았다. 기관투자가로서 1순위에 꼽히게 된 것이다. 일반 고객의 발길도 날로 늘어 탄탄한 성장세였다.

 그러나 이 회사들은 지금 빚 5조9천억원(연리 13.14%)에다 1년에 내는 이자가 6천억원이나 돼, 장사에서 2천억원이나 흑자를 내고서도 3월말 현재(결산기) 적자가 5천억원이 된다. 자본금도 잠식 상태다. 최대 부실기업을 내려앉은 것이다. 대한투자신탁의 한 임원은 “자생력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다. 어떤 형식으로든 돈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회사를 정상화시킬 수 없다”고 말했다.

 

부실 사태는 정부?투신사 공동책임

 기관투자가로서 큰 힘을 행사하던 3개 투신사가 이런 신세로 전락한 원인은 89년의 ‘12?12 증시부양조처’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李癸成 재무장관은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서라도 무제한 주식 매입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때 투신사가 은행으로부터 지원받은 돈이 2조7천억원이었다. ‘12?12조처’이후 반짝하던 주가가 그 해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내리막길을 걷자 빚은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투신사들은 은행 이자를 갚기 위해 다시 단자회사 등에서 급전을 꿔와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렸다. 게다가 투신사의 경영위기를 우려한 투자가들이 돈을 빼가는(수익증권 환매) 바람에 빚은 더욱 늘어났다. 이른바 ‘부실증후군’.

 ‘12?12조처’는 투신사가 부실하게 된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李龍萬 재무부장관이 “5.27 지원은 ’12?12조처‘의 마무리”라고 밝혀 그 책임을 시인한 셈이지만 “국민에게 사과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많다. 경제부처 바깥에서 입안됐다. 경제에 엄청난 무리를 준 이 조처에 대해 청문회라도 열어 책임소재를 따지고 배경설명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2?12조처‘는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된 ’5?27조처‘를 불가피하게 했으므로, ’5?27‘조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사실규명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 ‘5?27조처’도 국민적 합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부실에 대한 책임은 정부뿐만 아니라 투신사에게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 ‘12?12 조처’가 투신사 부실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더 근본적인 요인은 지난 89년 4월부터 계속된 지루한 증시침체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투신사 관계자들도 부인하지 않는다. 한국투자신탁의 한 운용역은 “12?12조처가 없었더라도 2조~3조원 정도의 빚은 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에 따라 투신사의 최고경영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인책론이 나오고 있다.

 증시 침체는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85~88년 우리 경제는 거품성장을 했다. 증시도 이 영향을 받아 외형이 크게 커졌다. 이 거품이 꺼져 경제가 조정기에 접어들었을 때 증시 역시 내리막길을 걸은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증시는 실물경기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투자전문가인 투신사는 이런 경제상황을 읽고 대처했어야 했다는 주장이다. 그 동안의 타성대로 정부가 개입하면 중시가 부양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12.12행’에 동승한 것은 면책받을 수 없다고 영국계 증권사의 한 분석가는 꼬집었다.“정부가 아무리 주식을 사라고 독려해도 거부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투신 관계자들은 “현실을 모르는 주장”이라고 일축한다. 재무부가 감독권을 쥐고 최고경영자를 사실상 임명하는 현실에서 책임?자율 경영이 가능하냐는 지적이다.

 정부는 그동안 주가를 관리하는 데 투신사를 1백% 이용해왔다. 주가가 내리막길을 걷게 되면 “주식을 매입하라”고 지시했고 증시가 과열이면 “주식을 내다 팔아라”는 지시를 내렸다. 자산운용역(펀드 매니저)의 시장분석과 판단은 끼여들지 못했다. 심지어 1일 매매 동향을 보고토록 해 투신사가 ‘재무부 투신과’라는 불명예스런 별칭을 얻기도 했다.

 운용역들은 상품이 기금(펀드)을 설정해 운용할 때 일일이 재무부의 간섭을 받았다. 주가가 떨어지면 기금을 구성하고 있는 주식의 양을 줄여야 하는데도 반대로 주식을 사들여 편입비율을 높여야 했다.

 증권투자신탁업법 제9조 1항에 의하면 고객의 돈을 맡은 위탁회사인 투신사는 맡긴돈을 관리할 책임과 고객의 이익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다. 수익률이 떨어지는 것을 피해 나갈 수 있는데 이를 무시한 것은 ‘선량한 관리자‘로서의 의무를 위반한 것이다. 한 변호사는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배임죄‘의 적용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5백50만명의 고객이 더 가질 수 있는 이익을 줄였다고 볼 수 있다.

 국민투자신탁의 한 운용역은 “운용역의 책임과 판단 아래 펀드를 운용한다면 손실을 피하거나 줄일 수 있다”면서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투신은 금융기관으로서 공신력을 회복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번 지원을 정부개입 끝나야 한다

 물론 투신사의 부실은 고객 재산인 신탁계정이 아니라 회사돈인 고유계정에서 발생한다. 경영이 악화돼도 고객이 맡긴 돈을 찾는 것은 “은행이 고객의 돈을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법률로 보장된다. 문제는 환매가 일어날 때 정부가 주식이나 채권을 팔지 못하게 개입하면 이 돈이 고유계정으로 흘러들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고유계정과 신탁계정을 엄격히 구분하라는 법(제26조)에 저촉받지 않기 위해 단자사와 증권금융을 통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쓰고 있을 뿐 이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고객 재산인 신탁계정의 파행 운용은 고객이 기대할 수 있는 수익률을 떨어뜨릴 수 있으며, 고유계정에 영향을 줘 부실규모를 크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투자분석 요원인 운용역의 자질이 투신사부실 책임의 일부라는 견해도 있다. 그동안 투신사들은 분석력을 키우는 전문적인 훈련과정 없이 운용역을 임용했다. 이제 겨우 한국투신 등이 운용역 양성과정을 마련하는 등 초보 수준에 머물러있다.

 투신사의 경영정상화를 위한 조처 불가피했다. 투신사는 증시의 기관투자가로서 존재목적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부와 투신사의 잘못은 결국 무차별적으로 국민에게 부담을 지웠다. 인플레를 안겨 준 것이다. 한 경제학 교수는 “이 지원은 마지막이어야 하며 앞으로 어떤 식으로든 정부의 증시개입은 좋지 않다”고 강조한다.

 이번 ‘5?27조처’는 투신사가 새로 태어나는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율 경영을 통해 증시와 고객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정부의 증시개입도 최소화해 한 실책에서 다른 실책이 나오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한다. 어쨌든 이번 투신사태는 증시를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또 한번 일깨워준 셈이다. 대가는 너무 비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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