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행외교로 정치권뒤흔든 ‘청와대밀사’
  • 이흥환 기자 ()
  • 승인 1990.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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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哲彦정무제1장관의 개인 비망록과 6공화국의 정치일지는 일치하는가, 다른가. 다르면 얼마나 다른가? 정치일지가 교과서라면 그의 비망록은 아마도 교과서를 친절하게 풀이해주는 훌륭한 한권의 참고서가 될 것이다. 일지에 기록된 각종 사건들의 주체가 누구이며, 어떤 배경에서 나왔고,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일목요연하게 풀어주는 해설서가 곧 박장관의 비망록일 듯싶다.

6공의 탄생설화격인 6·29선언, 또 그로부터 민자당 창당에 이르기까지 정치무대에 올려진 ‘6공 連作’의 총감독이 바로 朴哲彦장관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돼버렸다. 최근 3년간 정치권을 떠들썩하게 한 화제작 치고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다.

廬대통령의 6·29선언을 그의 데뷔작으로 손꼽는 데는 이견이 거의 없다. 이 첫작품은 대작인 동시에 문제작으로 남아 아직까지도 표절 시비가 그치지 않고 있다. 원작자가 金斗煥전대통령이라는 說이 그 첫 시비다. 또 한편에서는 全씨로 하여금 원작을 쓰게 한 이가 박장관으로, 결국 6·29선언의 지적소유권은 박장관에게 귀속돼야 마땅하다고 이야기한다. 박장관은 87년 그의 두 번째 작품 ‘13대 대통령선거’에서 킹메이커로 부상했고, 이듬해 4·26총선에서는 權翊鉉씨 등 당시 민정당 거물급 현역의원들을 대거 공천에서 탈락시킨 장본인으로 지목되면서 여권내 실세로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총선 결과는 민정당의 참패로 나타났다.

그의 88년 대표작은 ‘푸른 다뉴브강’이라는 작전명으로 극비리에 진행, 화려하게 대미를 장식한 헝가리와의 국교수립이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총리 집무실에서 당시 그로스 공산당서기장과 나란히 서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은 그의 위치를 확인시키는 일종의 증명사진이기도 했다.

89년 1월에 그는 또 한번 정가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대통령정책보좌관 자격으로 북한 외교부 부부장 韓時海와 싱가포르에서 비밀회담을 가졌다는 보도가 나온 것이다. 청와대는 접촉 사실을 부인했다. 그러나 얼마 후 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의 북한방문을 둘러싼 뒷얘기로 미루어보아 그가 대북한 접촉의 열쇠를 쥐고 있는 주역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89년 7월초의 평양축전 참관설과, 대북한 비밀접촉창구로 알려진 ‘88라인’ 가동설 파동도 그의 작품이다.

국내정치에서도 3단계통치구상 발언, 5공청산의 해결사 역할 등 박장관과 관련된 것은 그 어느 것 하나 순조롭게 넘어가는 것이 없다. ‘廬대통령의 악역을 기꺼이 담당하고 있다’는 그에 대한 평가는 자칫 廬대통령에 대한 평가로 전이될 수도 있다는 우려는 반드시 기우만으로 그칠 성싶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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