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통신
  • 베를린·윤도현 통신원 ()
  • 승인 1992.06.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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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벽에 부딪힌 통합 유럽의 꿈

‘통일 유럽’이라는 미래는 대다수 유럽인에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마치 수평선 같은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93년 초 유럽공동체(EC) 내에서 시장단일화를 이루고 회원국 간의 국경 개방을 실시한다고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러나 작년 12월 마스트리히트에서 경제통합 및 통화단일화가 논의되고 늦어도 99년까지 각국 통화를 ‘유럽 통화’(ECU)로 단일화한다는 일정이 제시되자 사람들은 그제서야 관심을 갖고 지켜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도 유럽 통합의 꿈은 낙관적이지 않다. 지난 2일 유럽공동체 회원국으로선 처음으로 덴마크가 유럽 통합 참여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찬성 49.3% 반대 50.7%로 부결된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에 따라 덴마크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인준된 마스트리히트안은 효력을 상실하게 됐다. 이번 국민투표의 가장 큰 쟁점은 인접국이자 덴마크 상품의 가장 큰 고객인 독일을 둘러싼 것이었다. 찬성론자들은 유럽 통합이 독일을 유럽의 일부로 묶어둘 수 있는 역사적 기회라고 주장한 반면 반대론자들은 ‘독일의 식민지’가 되느니 차라리 ‘유럽의 시골’로 남는 것이 낫다고 주장했다. 덴마크가 유럽 통합을 꺼리는 가장 큰 이유는 히틀러 시절 5년간 통치받은 경험이 주는 역사적 부담과, 통일로 더욱 커진 독일의 영향에 예속되는 게 아니냐 하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다. 덴마크의 이번 ‘반란’으로 만장일치제로 일을 꾸려가는 유럽공동체는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영향력 커진 독일의 유럽 지배 우려하는 목소리 확대

 앞서 5월13일 프랑스 의회에서는 두 개의 새 내용을 담은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하나는 유럽의 정치·경제통합이 좀더 쉽게 이뤄지도록 유럽공동체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에 사는 유럽공동체 회원국 시민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헌안 통과 과정에서 미테랑 대통령이 의회에 상당한 압력을 넣었고 국민의 정서와도 거리가 있어 앞으로 국민투표에서 확실한 지지를 얻을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통합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이 조약을 인준하게 되면 앞으로 프랑스의 정체성이 침해되며 이는 곧 ‘마르크 왕국’의 탄생과 프랑스 멸망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독일이 강력해진 정치·경제력으로 통일 유럽을 지배할 것을 우려하는 견해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닥엔 독일이 마치 아무런 재정 위기도 정치 갈등도 없이 ‘통일 유럽’에 기꺼이 다가갈 것이라는 단순한 가정이 깔려 있다.

 물론 독일의 콜 정부는 현재 프랑스의 미테랑 정부와 함께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러나 독일 국내로 돌아오면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독일 정부는 현재 동서독의 통일로 인해 엄청난 재정적 어려움에 허덕이고 있으며, 해외 파병 등의 대외 군사정책을 두고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있다. 이같은 위기속에서 콜 정부가 앞으로 유럽의 정치적 경제적 통합정책을 가속화할 수 있을지 두고볼 일이다. 독일에서 좀더 본질적인 문제는 연방독일 내 각 자치주들의 태도에 있다. 그들은 ‘하나의 유럽’에 대해 겉으로는 찬성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돌아올 이익이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주저하고 있다. 오히려 초국가적 조직 아래 놓이게 되면 자율성과 부를 잃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지난 5월21일 유럽공동체 통합 관련법을 통과시킨 영국은 오는 9월 이전까지 조약 비준을 끝낸다는 계획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동의를 거쳐 국회가 의결함으로써 모든 절차는 끝나게 된다. 벨기에의 경우 외국인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기 위해 개헌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총선 후 정부 구성이 늦어져 조약 비준에는 꽤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은 헌법재판소에 개헌 필요성 여부를 묻는 질의서를 냈으나 아직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국회에서 개헌 정족수인 5분의 3 의석 확보가 무난해 조약 비준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는 지난 4월 그리스와 함께 마스트리히트조약 비준권을 유럽의회에 일임하여 비준에는 별 문제가 없다. 이밖에 통합에 적극적인 그리스 포르투갈 룩셈부르크는 국회 의결만으로 비준을 마무리하며 국민투표는 실시하지 않는다.

 유럽 경제가 전반적으로 호황국면이 아니고 많은 국가에서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덴마크 국민의 반대는 다른 유럽공동체 회원국의 국내 인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인다. 독일 브레멘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후프 슈미트는 “마스트리히트에서 여러 나라 정부는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유럽공동체와 전유럽이 처한 커다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나갈 것인가에 대해 결정은커녕 깊이있는 논의조차 없었다. 환경 문제는 안건에도 오르지 못했고 사회보장이나 유럽공동체 내 민주화 확대에 관한 논의는 차단됐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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