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泳三의 ‘변신’행로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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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가의 결단은 비정한 것이다. 한번 결단을 그르칠 때 그는 영광의 자리에서 천길 낭떠러지로 급전직하하고 만다. 내가 그런 실수를 했더라면 나 또한 국민의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30년 野人생활을 마감하고 이제는 집권여당의 대표로 변신한 민주당 金泳三총재가 지난 87년에 펴낸 ≪나의 결단≫이란 자서전에서 술회한 글이다. 건국 이래 이 나라의 政治地形을 지배해온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란 도식의 대상인 공화당과, 그 후손격이라 볼 수 있는 민정당과의 3당통합을 金총재는 ‘구국적’ 결단이라고 표현했다.

 과연 그럴까? 3당합당, 특히 ‘반독재 민주투사’金총재의 ‘변절’을 두고 세론이 분분하다. 고향인 경남 거제에서 26세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초선된 후 내리 8선, 원내총무 5선,  신민당총재 2선, 민주당총재 2선 등 화려한 경력 못지 않게 암울했던 유신시대를 통해 야당사의 한 획을 긋는 치열한 반독재투쟁을 펼쳐왔다. 5공치하에서 23일간의 단식투쟁을 통해 한때 죽음까지도 감행하려 했던 김총재가 이 모든 ‘野人의 위업’을 뒤로한 채 여당의 기치 아래로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大權慾 때문인가, 金大中씨와의 감정의 응어리 때문인가, 아니면 자신의 표현대로 ‘新정치질서의 창조’를 위해서인가. 그의 ‘화려한 변신’을 둘러싼 세간의 의혹은 끊이질 않는다.

 ‘大道無門’을 정치신조로 삼아왔다는 김영삼. 키168.5㎝, 체중 69㎏의 다부진 체격에 염색으로 드리운 물결머리에다 환갑이 지난 지금에도 童顔인 그를 보면 얼핏 ‘귀공자’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巨濟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김영삼은 ‘반항의 섬’荷衣島에서 평범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정치 라이벌 김대중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이런 출생배경은 훗날 두사람의 정치적 신념과 철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는 지적이 두사람의 정치편력을 지켜봐온 분석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즉 김영삼의 피속엔 야당기질과는 거리가 있는 ‘부르조아 家’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다.

 중학시절부터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란 휘호를 벽에 걸어두고 야망을 불태운 그는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해서도 부전공으로 정치학을 택했을 만큼 일찍부터 정치지향적이었다.  청년 김영삼의 정치경력은 집권 自由黨의 후보로 고향 거제에서 출마, 최연소 당선을 따내면서 시작되었고 李承晩 자유당정권의 3선개헌에 반대, 탈당하면서 본격적인 야당인의 면모를 드러낸다.

 특히 69년 11월엔 당 원로들의 ‘젖비린내난다’는 혹평을 무릅쓰고 이른바 ‘40대 기수론’을 주창, 71년 대통령선거에 출마를 공식선언함으로써 당내외의 주목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新民黨 대통령후보 지명전에서 김대중에게 역전패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 “나의 정치역정에서 가장 쓰라린 패배의 순간”을 맞본다. 이때의 정치적 ‘수모’로 김영삼의 뇌리에는 김대중은 동지이기보다는 ‘大權의 경쟁자요 장애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특히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직전 DJ의 ‘分家’에 대해 YS가 최근 이를 ‘천추의 恨’이라고 비난한 것은 DJ에 대한 사실상의 絶緣을 의미한다는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朴燦鍾의원은 “YS의 신당행에는 바로 이같은 DJ와의 뿌리깊은 감정응어리가 개입했다”고 주장한다.

 김영삼의 반독재투쟁의 절정기는 ‘정치의 암흑기’라는 70년대 維新시대와 신군부세력하의 5공시대이다. 75년 유신헌법에 대한 일체의 논의를 금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불구속 입건되는가 하면 79년 5월 국회에서 제명까지 당했고 급기야 8월 YH여공의 신민당사 농성사건과 10 · 26으로 이어지는 급박한 정치적 격변상황에서 그는 ‘선명야인’으로서의 뚜렷한 이미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 그를 말하는 정치평론가들의 분석이다. 또 2년여에 걸친 가택연금중 광주민주화운동 3주기를 맞아 시작한 23일간의 단식투쟁은 그에게 ‘민주 투사’라는 이름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지난 87년 6 · 10항쟁과 6 · 29선언, 그리고 대통령선거에서 ‘군정종식’과 ‘문민통치’확립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운 것도 그였고 지난해 盧泰愚대통령의 중간평가 유보결정 때 盧정권의 타도를 소리높여 외친 것도 그였다.

 이제 김총재는 “어둡고 괴로웠던 과거에 대한 집착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미래를 향한 설계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지역갈등, 민주 대 반민주란 양분법적 정치갈등을 타파하지 않는한 “정치의 악순환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의 이런 논리를 확대해석하면 그를 야당인으로 만든 것은 ‘시대 탓’인 셈이다. 그는, 지금은 국제적으로 화해와 개방시대, 국내적으로 남북관계 개선, 지역 · 계층간, 세대간의 갈등의 해소에 역점을 두어야 할 ‘新思考’의 시대이지 민주 대 반민주, 독재 대 반독재의 ‘舊熊’의 시대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김영삼의 자서전은 그가 살아오는 동안 7가지 큰 결단이 있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40대 기수론을 제창해 실현시킨 일, 반유신투쟁을 선도한 일, 총재직무 집행정지가처분에 대항 박정권 타도를 결심한 일, 23일간의 단식투쟁, 6 · 10항쟁과 뒤이은 대통령직선 쟁취 등이 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승부수이자 대도박일 수도 있는 3당합당이라는 여덟번째 결단을 내렸다.

 과연 역사는 그의 결단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그는 지난달 31일 고별기자회견에서 훗날 史家들이 자신의 결정이 시의적절한 것이었다고 평가하기를 기대하며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야당인 김영삼은 공교롭게도 자신을 데뷔시켜준 집권 자유당에 몸담은 지  근 36년만엔 결국 본가격인 민주자유당으로 귀거래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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