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현모양처 신화 90년대 위기의 여성
  • 여운연 기획특집부 차장 ()
  • 승인 1991.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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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참여 여건 ·기회 막힌 40대 ‘새역할 찾기’ 부심

한국 최고의 여배우로 꼽히는 김지미가 새 배우자를 만났다는 뉴스는 요즘 장안의 화제거리다. 한동안 독신으로 지내온 그가 또다시 50대 의사와 결혼할 것이라는 얘기다. 50대 초반인 김지미의 결혼은 이번이 네번째다.

최근에 40대 중반에 접어든 ㅅ여고 출신의 여고동창 모임에서도 김지미의 결혼이 화제에 올랐다

ㄱ씨 : 김지미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의 결혼이 몇번째라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그동안 대외적인 활동을 하면서 여자이기 대문에 겪은 외로움이 많지 않겠는가. 바람직한 결혼인 것 같다.

ㄴ씨 : 남의 이목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그의 인생이 부럽다. 우리는 도무지 용기와 능력이 없다.

ㄷ씨 : 첫번째 결혼은 아버지 같은 남자, 그 다음엔 동료를 만났고, 다음은 젊은 남자, 이제 같이 늙어갈 수 있는 남편을 만났다는 것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이 얘기는 모임에 참석했던 사회학 교수 ㅂ씨가 요즘 40대 여성들의 의식이 이렇게 달라졌다면서 들려준 내용이다. ㅂ씨에 따르면 몇년 전까지만 해도 한낱 스캔들로 치부될 수 있었던 여배우의 결혼을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주 긍정적 시각에서 보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남성들이 앞장서는 생활에 갇혀 살아오며 허망함을 느낀 여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삶의 모습이 당당하게 보였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해석을 붙였다.

90년대의 40대 중년여성들. 이세대를 가리켜 많은 사람들은 ‘전통과 현대의 갈림길의 어머니 群’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신여대 김태현 교수(가족학)는 급속한 산업화와 전문화된 사회변화에 따라 이 여성들은 그 어느 대보다 의식이 높아지면서 과도기적 갈들을 겪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들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느라 중년기를 거의 못느끼고 살아온 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정내 역할이 줄어들면서 긴 중년기를 맞고 있다. 그런 가운데 가정을 잘 지키는 게 여성의 최대 미덕인 어머니 세대와, 일찍부터 자기 생활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젊은 세대 틈바구니에서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지나간 40대들에게는 없었던 기회와 고민을 함께 안고 있는 셈이다.

주부가 천직이기엔 사회가 너무 변해
지난 30년간 각 연대별로 중년층 여성들은 어떤 의식의 변화 속에 살아왔을까. 이를테면 60년대 각 신문들이 다뤘던 여성문제 관련기사는 이런 것들이다. ‘주부로서의 재클린 케네디의 매력, 그의 미용법과 부엌살림’ ‘한국의 모성, 절망도 패배도 모르는 자식 위한 가시밭 생애’.

그러다 70년대에 다시 변하기 시작한다. ‘활발히 번져가는 둘만 낳기 운동’ ‘부정에는 남자도 책임, 낡은 윤리관으로 돌던지기 없어야’ ‘여성학, 대학서 첫 강의’.

80년대는 ‘가사노동의 가치는 공헌도로 평가해야 한다’ ‘어머니들 소외감 깊어간다’ ‘어머니像과 사회적 역할 사이에 죄의식’.

90년대에 들어서는 이런 내용이 두드러졌다. ‘직업 갖는 40대 주부 는다’ ‘주부 가사노동 가치 한달 88만8천원’.

사회가 급격히 변하면서 90년대의 한국여성들은 지금가지와는 다른 영역과 역할을 요구받고 있다. 그렇다고 사회에 뛰어들 수 있는 여건은 전혀 갖춰지지 않고, 변하는 사회를 따라가기 위한 교육의 기회도 막혀 있다.

서강대 조옥라 교수(인류학)는 “요즘의 주부들은 현대교육을 받았으며, 주변 정보에 항상 접해 있기 때문에 무조건 남편과 가정이 만들어놓은 한계 속에서 안주하기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즉 현대의 주부는 개인성을 찬양하는 산업사회 속에서 종속적 삶을 살면서 또한 만족하도록 기대되기 때문에 딜레마 없이 주부역할을 해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적 현모양처 상은 물론 주부로서의 갊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 사회가 이미 너무 변해버렸다는 분석이다.

어느 전업주부의 고민을 살펴보자. 대기업 중역인 남편과의 사이에 1남2녀를 둔 홍성혜씨(45 ·서울 강남구 청담동). 큰아들은 대학생, 밑으로 재수생인 딸, 막내가 고교생이다. 대학졸업 수인 71년 결혼해 비교적 순탄한 결혼생활을 해온 전형적인 ‘강남주부’이다.

홍씨의 말을 빌리면 평생의 중심과제가 남편뒷바라지와 자녀양육이었다고 말한다. 여느 주부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온 홍씨가 며칠 전 가족 몰래 신경정신과의를 만나고 돌아왔다. 대학입시를 앞둔 둘째 아이 뒷바라지에 여념이 없는 그는 언제부터인가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병원을 찾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입장은 우성 대입 수험생을 자녀로 둔 어머니란 사실만으로도 엄청나게 부담스럽다. 자녀교육의 실패는 거의가 어머니의 책임으로 돌려지는 게 이 사회 분위기다. 그는 고3 아들 뒷바라지에 지친 한 친구가 가출해버렸다는 얘기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틈틈이 취미 삼아 이것저것 손을 대보기도 했다. 그것도 한두번이지, 주변에선 등 따습고 배 부르니까 저런다며 냉소적이다. 남편은 “애들이나 잘거두고, 살림이나 잘하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홍씨는 어느날 아무 이유 없이 아파트 잔디밭에 나가 날이 어둑어둑해질때까지 주변에 돋아난 토끼풀을 모조리 뽑으며 스트레스를 쏟아부었다고 한다. “주변의 가족들은 멀어져 가고, 이제부터 나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40대 전후는 ‘화약고’ 같은 시기
홍씨와 같은 40대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이계경씨(여성신문 발행인)는 “40대 전후는 폭발할 수 있는 잠재욕구와 불만이 쌓인 ‘화약고’와 같은 때”라고 말한다. 40대만 해도 50대와 달리 일단 뭔가 시작해볼 수 있는 가능성과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성들의 사회적 욕구분출 방법으로 이씨는 70년대에 자원봉사로 시작해서 80년대엔 사회단체 활동을 통한 의식화 운동쪽으로 눈을 돌린데 비해, 90년대 들어서는 보다 구체적인 일거리, 기술을 갖고 있는 전문직종을 찾는 추세에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최근 한국여성개발원(원장 金?德)이 2천5백여명의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상 따르면 현재 미취업상태인 기혼여성들의 64.9%가 취업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5년 전 한국갤럽이 조사한 결과(5.38%)에 비해 월등 높아진 것이다.

‘여성의 의식과 생활실태에 관한 연구’란 주제의 이 조사에서 기혼여성들이 말하는 취업희망 이유로, 57.5%의 응답자가 자신의 생활을 갖길 원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서 직장을 갖고 싶다고 말했다. 또한 취업희망 여성의 37.3%가 자신의 비취업상태에 대해 스트레스와 불만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고, 여성의 1차적 영역인 가정 안에서만 만족해 생활할 수 없다는 여성이 4할 가까이나 됐다.

경제기획원 통계에 따르면 40~49세 사이의 여성인구는 2백40만명 정도, 우리나라 전체 여성인구중 12%에 이르는 숫자이다.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는지 몰라도 우선 이들 중년여성은 수치 하나만으로도 관심을 가질 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중년 여성이 겪고 있는 경험은 그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내와 어머니 역할을 인생의 제1과업으로 택한 모든 여성들의 문제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30대를 힘겹게 보내다 40대에 문단에 데뷔한 소설가 ㅊ씨. 한 때 정신적 갈드이 너무 심해 육체적 지병까지 얻어 수년간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다. 보수적인 가정에서 곱게자란 그가 평소 생각해온 이상적 가정이란 부부가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끼니때 온 식구가 둘러앉아 밥먹는 그런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가정 분위기를 모르고 자란 탓인지 도무지 절도가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내일은 애들 데리고 놀러가자”고 해놓고는 노름에 빠져 아무 연락 없이 다음 날 안들어오기가 일쑤였다. 그러기를 몇년. 좀처럼 앞길이 보이지 않는 그 시절, 그는 매일 밤 베란다에 나가 떨어져 죽을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내 이름 석자로 혼자 설 수 있는 일을 가져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뼈아픈 채찍질을 가했다. 한편으로는 ‘내 가정이 파괴돼가고 불행하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노력했다. 전통적 유교가정에서자란 그에게 그같은 가정교육이 큰 굴레였다는 피해의식 때문에 아이들은 그대로 풀어놓아 키우고 있다. “예의범절, 도덕은 너희들 스스로 선택하라”고. 19세기식 교육을 받은 부모 밑에서 자란 그로선 21세기를 살게 될 자식에게만큼은 ‘통념’의 짐을 지워주지 않겠다는 거다.

자의식 갖고 세상 보는 여성 제1세대
지난해 ‘아직은 마흔아홉’이란 텔레비전 드라마를 써내 시청자들의 인기를 모았던 방송작가 이금림씨. 그는 이 드라마에서 한국전쟁, 4 ·19 등을 겪어온 ‘49세 여성’을 한국 여성세대에서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 ‘제1세대’로 규정했다. 40대 중반인 이씨 역시 지금의 40대가 가장 어중간한 갈등의 세대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예를 들어 자녀문제만 하더라도 지금의 30대는 당연히 따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테지만, 자신의 세대는 함께 살아야 할지, 떨어져 살아야 할지 구분이 안되는 혼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주부의 역할이 사회적 신분이나 법적 보장면에서 남편보다 훨씬 열등하다고 생각한다. 그저 집을 나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일자리라도 좋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직장을 가진 여성들은 또다른 고민을 안고 있다. 그들은 가정과 직장, ‘두마리의 토끼사냥’으로 인해 적지않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 여성개발원 조사에서도 65.1%정도의 기혼 취업여성들이 ‘직장과 가사에 지쳤다’며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여기에서 취업주부들은 평균 9시간의 직장생활과 5시간 38분의 가사노동으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 비해 기혼 남성들은 하루 평균 가사노동시간이 38분에 그치고 있다.

여성에게 40대란 나이는 직장에서도 큰 부담을 느끼는 시기로 간주되고 있다. 친정어머니가 살림을 맡아해줘 남들보다 훨씬 좋은 상황에서 15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석달전 회사를 그만 둔 양정수씨(41). 그의 직업은 방송국 사서직이었다. 결혼 후 두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숱한 고비 속에 직장생활의 위기를 넘겨왔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회사를 그만 두자, 주변 친구들은 남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당에 그 좋은 직장을 왜 버리고 나왔냐며 펄쩍 뛰었다.

양씨가 직장을 그만둔 이유는 회사에서 계속 쌓여온 부담감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함께 입사한 조사부 남자 동기생들은 다 차장으로 승진했는데 그에게는 좀처럼 승진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40세 나이라면 가정적으로는 어려운 시기를 넘긴 안정권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한창 일의 즐검움을 느끼며 직장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시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주저앉고 말았다. “내 나이쯤 되면 남자들은 한창 성취욕을 느낄 때다. 그런데 친구들을 보더라도 여자들은 나이 먹어갈수록 직장생활이 더욱 힘들어지고 불안해진다”는게 그의 변이다.

중년의 여성들은 흘러가버린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불안해 한다. 그동안 거의 남편과 자녀에 의존해 살아온 여성일수록 자신감을 못가진다.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을까, 진정한 관심사가 없다는 두려움에 주눅이 든다.

40대에 겪는 심리적 혼란을 설명하기 위해 발달심리학자들은 40~45세 시기를 ‘중년의 전환기’로 보고 있다. 이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내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등 실존적 의문과 공허감이 중요한 주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시기에 느끼는 중년의 위기감은 결코 병리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게 서울신학대 강사(심리학) 김애순씨의 지적이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사람에겐 이 시기가 긍정적이며 성장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의 공허감’을 느낀다는 이 시기를 오늘의 40대 여성들은 거센 사회적 압력으로 인해 더욱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에게 많은 대안을 제사하고 있는 여성운동가들 조차 때때로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는 혼란을 느끼고 있다고 토로한다. 어떻게 대처해가야 하는가, 누구도 결정적인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다만 이 시기의 고민을 겪은 후 50대가 되어서야 ‘지천명’이란 인생의 구조를 깨달을 수 있다는 김애순씨의 진단이 중년여성들에겐 기대를 걸어볼 만한 충고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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