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일남 칼럼] 일본은 언제나 일본이다
  • (본지 칼럼니스트·작가) ()
  • 승인 199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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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초순이었다. 부산의 어떤 골동품 중개상이 일인 소유의 우리 문화재 9점을 강탈 국내로 들여왔다는 뉴스가 언론을 장식했다. 기절초풍할 일이 하도 많고 소설 뺨치는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현실이긴 하지만 이것도 희한하기 짝이 없기는 매일반이었다. 일본까지 ‘원정’한 도둑임에 틀림없으므로 법이 당사자를 가둔 건 당연하고, “어떻게 들어왔건 다시 내보낼 수 없다”는 정부 태도 또한 이해가 간다. 일본에 노략질 당한 문화재가 대충 10만점에 이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한동안 잊고 지냈던 문제를 다시 기억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그로부터 보름 후엔 이른바 ‘귀무덤’이 일본서 돌아와 역시 부산의 東明佛脘에 봉안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4백년만에야 12만6천의 원혼들이 안식의 땅을 찾았거니와 그것은 또 그만한 세월의 슬픈 역사를 되새김질하게 만든다. 그러나 노태우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벌어진 한일교섭은, 두 나라의 숙명적인 관계를 노출시키면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과거와 여전히 뜨뜻미지근한 미봉책으로 오늘에 대처하는 방식을 확인하게 한다. 당당하지 못한 피해자와 끝내 교만한 가해자의 사이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것이다.


‘知的 水準’ 파문에서 보는 민족적 우월감

 우선은 재일교포의 지위가 양자간 협의의 초점이다. 그리고 그것을 더 파고들면 그들의 외국인등록법에 의한 지문날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손도장’이라고도 일컫는 지문날인이 거의 일상화된 우리로서는 ‘그까짓 것 쯤’으로 치부할지 모른다. 지문을 찍은 주민등록증을 ‘상시휴대’하고 다녀야 하는 처지에선 더욱 그럴 법하다. 하지만 일본정부가 국내에 거주하는 ‘가이징’(外人)들에게 요구하는 이 제도의 착상과 이면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경제적으로는 국제화시대의 선두주자를 자임하며 그만큼 이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속셈은 민족차별 의식에 철저한 것이 일본 官邊의 변함없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멀리 거슬러갈 것도 없다. 나까소네 총리가 집권하고 있던 86년 가을, 그는 엉뚱한 발언으로 전세계적인 규모의 구설수에 휘말렸다. 그는 자민당 소장파를 향한 연설에서, “흑인·푸에르토리코인 · 멕시코인, 또는 스페인 語系와 소수민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지적 수준은 일본보다 낮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자 각국에서 일제히 비난이 쏟아졌다. 일본 외무성의 집계에 의하면 그 수가 60개국에 달했다니, 그의 망언에 얼마나 많은 인류가 분격했는가를 알만하다.(그때 한국은 어땠나? 전두환 전대통령과 나까소네 사이를 생각할 일이다.) 일본을 일단 백인으로 간주한 이 ‘知的 水準’파문은 그러나 미국 자체에서 제일 심한 반발을 일으키게 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로버트 로엔은 이렇게 썼다.

 “나까소네 총리가 존경한 미국인은 존 웨인이었다. 나와 작년에 뉴욕에서 인터뷰했을 때도 자기가 레이건을 그처럼 좋아하는 이유는 레이건이 존 웨인을 닮은 탓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나까소네는 존 웨인이 서부극에서 결코 연출하지 않았을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스스로의 발등에 총을 쏘았으며 그 상처는 상당히 깊다.”

‘노(No)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일본’의 역설적 의미

 영국 《옵서버》지의 지적은 더 신랄하다. “그는 구미사회에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일본인상을 완벽하게 體現했다. ‘다데마에’(명분이나 표면)와 ‘혼네’(진짜 속셈이나 내면의 진실)가 다르다는 것을….”

 따라서 지문날인의 애당초 바탕이 이런 발상과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되 발단은 비슷하다고 보아야 한다. 이 제도가 생긴건 6·25 때였다. 미·일 양국이 일본 국내에 있는 북한 · 중국파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마련했던 것인데, 그후 범위를 확대하여 ‘가이징’은 모조리 이 법으로 묶었다. 그중에서도 한국인이 주대상임은 말할 나위 없다. 공칭 84만명의 외인 중 재일교포가 70만에 이른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된다. 그 저류에는 나까소네류의 어줍잖은 민족적 우월감이 작용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기록상의 일본내 소수민족은, 아이누, 오끼나와, 길야크(Gilyak · 사할린 일부지역과 아무르강 유역에 살던 종족)와 한국인일망정, 前三者는 이야기할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런 일본이 이제는 또 백인의 우월감에 대응하여 ‘노(No)라고 말할 수 있게 된 일본’을 들고나온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어떤 재일 한국 지식인의 해석에 따르면 그쪽 동포 1세는 일본을 ‘假宿’으로 여기고, 2세 이후의 젊은 세대들은 일본은 ‘本宿’―즉 定住地로 생각해왔는데, 현재는 1세를 포함한 ‘本宿사고’를 지닌 사람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어느 편이 되었건 일본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조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異文化를 공유하는 수밖에 없는데, 여기서 필연적으로 겪어야 할 ‘境界人 현상’에 시달리는 모양이다. 배멀미를 치르는 것과 같은 불안정한 상태에 빠지고, 그것은 소수민족의 일반적인 숙명과도 연관된다.

 이들이 ‘숙명’을 극복하고 그 사회에서 ‘홀로서기’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물론 자신의 노력도 필요하겠으나, ‘기댈 언덕’은 누구보다도 본국 정부가 쌓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역대 정권은 일본정부가 아닌 정객에게 약하고 향수마저 느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해방이래 줄곧 친일파가 득세한 마당에서 그들이 이쪽을 괄목상대할 까닭이 없었다. 진작 챙겼어야 할 몫을 이제사 서두른대서 큰 효과가 없을 바에야, 한일문제 타결의 반성거리는 우리쪽에 훨씬 많다는 교훈 앞에 진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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