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화] 작가 魂에서 우러난 정치신념
  • 고명희 기자 ()
  • 승인 1990.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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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의 극작가 대통령 바츨라브 하벨의 정치관, 예술관

비공산주의자로서는 지난 48년 이후 41년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체코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츨라브 하벨. 최근호 <더 가디안>지에 실렸던 인터뷰 기사를 통해 그의 정치관ㆍ예술관을 알아본다.

68년 봄, 한 젊은 극작가는 프라하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적이 있다. “예술은 진실을 추구하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한다. 반면 정치란 현실을 변모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힘을 필요로 한다. 지식인이 자신의 목표인 진실에 성실하면서 정치생활에서도 중요한 몫을 행사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후 21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이 극작가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동안 그는 다른 연극인들과 함께 소극장을 중심으로 ‘진실 추구를 위한 집념’을 불살라왔다. 당시 프라하극장감독이며 현재는 대통령 자문역을 맡고 있는 오스르츨리씨가 “그때 우리들은 하루의 3분의 1은 연극에, 나머지 시간은 반독재투쟁에 바쳤다”고 밝히고 있듯이 하벨이 소속했던 극단은 반독재투쟁의 중심 거점이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입을 다물거나 망명을 택하는 암울한 시대였던 75년, 하벨은 ‘프라하의 봄’을 짓밟았던 당시 대통령 후사크에게 공개서한을 보냈고 77년에는 인권침해에 대한 대안제시를 목적으로 ‘77헌장그룹’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 그룹은 작년 민주화시위를 주도했던 ‘시민광장’의 모체가 되었다. 하벨은 79년부터 83년까지 4년동안 ‘국가전복죄’로 복역했으며 그의 작품은 동유럽 개혁이 있기전까지 출판은 물론 공연이 금지되었다. 하벨은 당시의 심정을 <시련>이라는 수필에서 “나는 근본적인 문제를 회피하려는 권력의 모든 기도에 엄청난 격분을 느꼈다.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계에 대해 구역질마저 났다”라고 토로하기도 했다.

‘비참한 것을 보았을 때 얼굴을 붉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 받기도 하는 하벨. 그는 프라하의 부르조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작가 생활을 한 적도 있는 외교관이었고, 삼촌 중의 한 명은 60년대 체코영화계의 산물결을 탄생시켰던 인물이다. 특히 그의 아버지는 빌딩을 여러 채 소유한 부자로 그 빌딩 가운데는 예술적으로 장식된 레스토랑, 바, 영화관, 콘서트홀이 들어 있는 종합예술관도 있었다. 하벨의 친구이자 반독재운동의 동지였던 루드비크 바구리크가 이 빌딩에서 있었던 ‘우리의 특별한 친구’의 생일파티를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하벨은 부르조아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같은 신분이 하벨에게는 걸림돌이기도 했다. 그는 철학공부를 하고 싶어했으나 ‘新부르조아’의 자손이었기 때문에 공산정권은 그의 대학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그래서 간곳이 영화학교의 드라마분과였다. 그때는 이미 그의 첫 희곡작품 <샤라드니 슬로브노스트>를 무대에 올려 극작가로서 등단한 뒤였고, 또 다른 희곡 <가든 파티>가 성공적인 개막을 한 뒤였으며 그의 가장 뛰어난 희곡이며, 카프카적 기지와 부조리로 체제를 비웃은 작품 <메모랜덤>도 완성시킨 뒤였다. 결국 그든 일류 극작가로 명성을 떨치고나서 연극수업을 받은 셈이지만 하벨은 이러한 사회경험을 “정부뿐만 아니라 나의 부르조아 조상들에게 감사한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다.

68년 그와 그 윗세대 공산주의자들과의 차이에 관해서 하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윗세대들은 일정한 범주에서 현실에 접근하는 것 같다. 반면 우리 세대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지만 젊은 사람들은 모든 이데올로기적 여과정치를 거부한다.”

최근 발표된 논문과 연설문을 보면 그의 정치적 신념이 극작가로서 그가 지났던 철저한 작가정신에서 비롯됐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89년 10월 서독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한 연설문에서 그는 “함부로 날뛰는 속빈 말들속에 잠재하고 있는 ‘함정과 공포’를 드러내 진정한 모습을 밝혀내는 것이 지식인들의 의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회주의는 전제군주에게 탄압받던 세대에게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목숨까지 바치게 하는 매력적인 단어이지만 그가 살고 있는 국가의 경우에는 아니라는 것이다. “사회주의”는 그 자체가 경철봉으로 바뀌어버린 지 오래다. 이 경찰봉은 냉소적이고 벼락출세한 관료들이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국미들을 밤낮으로 ‘만사회주의자’로 몰아 위협하는 데 쓰일 뿐이다라고 그는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이다.

당국의 거듭된 서방 망명요구를 거부한 채 20년 동안 체코 국민들에게 민주화의 희망으로 남아 있던 하벨은 동유럽에 밀어닥친 개혁의 물결을 타고 마침내 체코라는 거대한 무대에 ‘제2의 프라하의 봄’을 연출해 낸 것이다. 최근 프라하에서는 하벨의 76년도 작품은 <청중>이란 연극이 14년만에 무대에 올려졌다. 89년 노벨평화상 후보에도 올랐던 그의 철저한 작가정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관객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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