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사외교 주역 퇴진 북방정책 ‘새 돛’ 달려나
  • 변창섭 기자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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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부 중심이 되어야” 당위론 대두

영향력 줄어든 朴哲彦씨 對北관계에 주력할 듯

‘문제’의 정무1장관실이 위치한 정부종합청사 17층. 4월18일 하오. 이곳 부설회의실에서 6共각료 가운데 최강의 힘을 과시해온 정무1장관 이임식이 열렸다. 舊官의 이임사는 자못 비장했다.

“지난 9개월은 우리에게 있어 참으로 중요하고 엄청난 일들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9개월이란 朴哲彦장관 자신의 장관직 재임기간을 말함이요 ‘엄청난 일’이란 그 자신이 부연했듯 3당통합과 북방정책의 결실을 의미한다. “북방정책이 마무리 단계를 맞아 민족문제의 돌파구 마련을 눈앞에 두고 있다”며 6공의 ‘大役事’인 북방외교에 대한 자신의 ‘공’을 은근히 자랑했다.

북방밀사 박철언씨를 위한 이날의 이임식은 박씨가 金泳三 민자당최고위원을 겨냥한 ‘정치생명’운운으로 자초한 ‘강제퇴역’이어서 눈길을 끌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주도해온 북방외교의 한 시대에 획이 그어지는 시점이어서 상징적인 행사로 받아들여졌다.

과연 박씨의 고별인사와 함께 그가 주도해온 북방정책의 주인도 달라지는가? 그렇다면 그가 맡아온 막후의 대북창구도 함께 주인이 바뀌는가? 그의 퇴진으로 예상되는 손실은 무엇인가?

이같은 물음에 대해 정부의 북방정책은 앞으로 주무부서인 외무부 중심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당위론이 일고 있는가 하면, 소련 · 중국과의 수교를 추진함에 있어 공개외교보다는 아직은 비밀외교가 바람직하다는 현실론의 기세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외무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은 “동유럽과의 수교는 알바니아만 제외하고는 거의 다 끝마쳤거나 추진중”임을 들어 “더이상 일개인의 밀사외교는 곤란하다”는 입장이다. 다시 말해 ‘박철언 無用論’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외무부의 고위당국자마저 “아직 소련 · 중국과의 수교가 남아 있고 이 두 국가가 북한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에 비추어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며 “어느 정도 교섭이 이루어지기까지는 비밀외교가 필요하다”고 말해 박씨의 역할이 아직도 유효함을 강조하고 있다.

지금가지의 북방정책이 외무부 · 안기부 · 통일원 등 유관부처의 협조하에 추진되어왔다고는 하지만 실제 입안과 실천의 주체는 박씨가 이끈 북방팀이었다. 이 팀에 소속되어 있는 한 요직의 관리는 “6공의 북방정책은 박장관을 중심으로 우리가 주체가 돼 추진해온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박씨 訪蘇團에 포함 안될 듯

그렇다면 박씨가 탈락된 상황에서 현재의 북방팀은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박씨가 장관직은 물러났어도 의원직은 계속 보유하고 있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 기존 팀과의 협조관계는 유지될 것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기대 밖의 굵직한 예상도 나온다. 박씨의 한 핵심측근은 그가 이임식에서 행한 북방정책 ‘마무리단계론’을 들며 “현재 박장관의 관심은 북방정책보다는 향후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에 있다”고 말해 박씨가 앞으로 대북관계에 전력할 것임을 시사했다.

이 측근은 이어 “5월말로 예정돼 있는 정부의 訪蘇團에는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박장관이 끼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그 이유로 앞서 언급한 ‘북방정책 마무리론’과 함게 민자당내 민주계측의 강한 反朴기류를 들었다. 이 측근은 이어 “박씨가 의원직은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만큼 의원외교 차원에서 일조할 수 있지 않겠느냐”며 항간에 떠도는 박씨의 대소 ‘特使외교’설이 한갓 ‘설’차원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한편 방소단의 규모나 파견시기 등에 대해 외무부의 한 고위실무자는 “우선 저쪽(소련)의 사정이 분명치 않아 현재로서는 아무 것도 결정된 바 없다”며 “그러나 수석대표는 차관급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현재 방소단의 구성과 역할 규정은 안기부 등 유관부처가 참여한 가운데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경협관계는 기획원내의 북방경제협력관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蘇 孔영사처장 모종의 ‘정치성’ 작업 착수

외무부 관계자들은 설령 박씨가 일선에서 물러난다 해도 북방외교 기조에 큰 변화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한 당국자는 “이미 우리측이 닦아놓은 훌륭한 채널이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김영삼최고위원측이 방소시 활용했던 소련의 IMEMO 및 당 고위인사들과의 대화채널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이 채널의 활용과 함께 현재 주모스크바 한국영사처(처장 孔魯明)도 지금까지의 문화 · 영사업무를 벗어나 다른 업무를 활발히 진행시키고 있다”고 말해 孔영사처장이 모종의 ‘정치성’ 작업에 착수했음을 시사했다.

외교전문가들은 70년대초 닉슨 행정부 시절 헨리 키신저 대통령안보보좌관이 중국과의 막후 외교교섭을 통해 마침내 닉슨의 역사적인 訪中을 따내는 동안 美국무성이 뒷전으로 밀렸던 사실을 지적하며 6공의 북방외교에 관한 한 “지난 2년여간 외무부의 역할이 제자리를 못찾았던 것은 불가피했던 사실”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일단 美 · 中관계가 그같은 막후절충을 통해 다듬어지자 나머지 업무가 국무성으로 이관됐었음을 들어 향후 소련은 물론 중국 및 여타 미수교 사회주의 국가와의 교섭 역시 같은 순서에 따라 당연히 외무부가 맡아야 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또 김영삼최고위원이 “모든 외교문제는 외무부가 맡아야지 옆에 누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며 박씨의 행동반경에 강력한 제동을 건 사실과 박씨 자신이 ‘마무리론’을 내세운 점을 들어 향후 북방정책에 있어 박씨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것이 외교가의 지배적 판측이다. 다만 남북문제만큼은 작년초 싱가포르에서 박씨가 은밀히 북한의 韓時海를 만난 사실에서 보듯이 여전히 박씨가 맡게 될 것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 하고 잇다. 더구나 남북정상회담의 실현이란 과제에 매달려 있는 그로서는 이 비장의 채널을 어느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으리라는 게 중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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