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俊炳 민자당 사무총장
  • 박중환 편집위원대리 ()
  • 승인 1990.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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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체제 특별한 변화 없을 것”

거대여당 사무총장 朴俊炳. 여의도 민주자유당사의 집무실에서 만난 순간, 그의 표정에서최근 민자당이 겪고 있는 진통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피로해 보였고,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감기약인 듯한 조제약을 입에 털어넣고 물을 꿀꺽 마셨다. 육군대장출신답지 않게 선비풍의 인상을 지닌 그는 민자당내 계파간의 갈등, 朴哲彦 전 정무장관의 정치행태에 관한 사무총장으로서의 평가, 대구서갑 및 음성 · 진천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놓고 당내 일각에서 일고 잇는 그의 인책사퇴주장, 그리고 88년 12월19일 光州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당시의 심경 등 결코 달갑지 않은 질문을 계속 던지는데도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담담하게 답했다. 그의 답변에는 이제 간신히 수습된 당 내분을 아무쪼록 안정시켜야 한다는 초대사무총장으로서의 바람이 깊이 배어 있었다. 그 대문인지, 최근 정치권 주변에 나돌고 있는 3당합당 ‘秘事?’에 대해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고 있을 수도 없다”고 못박는다.

그는 “민자당의 지도체제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밝히면서 盧泰愚대통령이 총재로서 당을 대표하면金泳三대표최고위원이 당무를 맡는 혼합형 단일지도체제를 유지하는 데 대해 세 최고위원간에 이견이 이미 조정됐음을 시사했다.


● 전당대회 준비는 잘 돼갑니까?

오는 5월9일 오전 올림픽공원내에 잇는 펜싱경기장에서 열립니다. 대의원 4천명과 일반참관인 3천명 등 모두 7천여명이 참석하게 됩니다. 행사는 화려하지 않지만 알차게 치를 계획입니다.

● 전당대회에 대한 관심은 아무래도 지도체제문제에 집중되어 있는 듯합니다.

내가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입장은 아니지만 세분의 최고위원들이 합당 당시 합의했던 사항을 특별한 변화 없이 전당대회에서 제의할 것으로 봅니다. 당헌이 5월4일이나 5일께 확정될 것이므로 그때쯤이면 발표될 것입니다.

● 합당 당시 합의를 보았다는 지도체제에 대해 민정계측은 최고위원 합의체제야???다고 주장하지만 金泳三최고위원은 자신이 당무를 맡는 대표최고위원의 단일체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도체제 내용을 지금 거론하기엔 적절하지 않습니다. 세 최고위원의 합의사항이 변경될 만한, 또 변경되어야 할 특별한 사항이 없기 때문에 합의된 대로 당헌개정안이 제안될 것으로 봅니다.

● 지난 4월17일 청와대회동 때에 이 문제가 거론됐습니까?

별로 거론된 것이 없습니다.

● 그럼 이미 세 최고위원간에 이견이 조정됐다고 봐도 됩니까?

더이상 조정할 이견이 없습니다.

● 이번 전당대회 때에 특별한 행사계획은 없습니까?

전당대회 전, 4월27일 전경련 대회의실에서 정책토론회를 열고 주택 · 교통 · 경제문제 등 현안들을 폭넓게 논의해 정책대안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 박철언장관의 장관직 사임 이후 당내 내분이 표면상 진정된 것 같으나 여전히 그 불씨는 남아 잇는 듯합니다. 민주계 소장의원들의 불만이 주목되는데 전당대회에 이들 의원이 불참하는 사태를 빚는다든지, 전당대회를 전후해 민자당의 개혁의지를요구하는 성명을 낸다든지 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을 법한데….

최근 3당통합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가 낮아졌다는 여론조사결과에 깊은 우려를 갖고 있습니다. 창당 당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내부에 계파가 있는 것처럼 비쳐진 것이라든지, 개혁의 정도가 미진하다는 것 등은 합당 자체의 어려움이 혼합되어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4월17일 청와대회동은 대단히 의의있는 자리였지요. 국민에게 죄송하다고 사과했고, 개혁은 완급을 가려서 적절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구 민주계에서 요구하는 개혁의 당위성문제는 어느 면에서는 바람직한 요소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요소를 수용한다는 뜻에서 정강정책을 만들 대 ‘민자당은 개혁을 지향하는 정당’이라 명문화했습니다. 그런데 집권당 입장에선 모든 개혁을 일시에 할 수 없기 때문에 개혁을 견지하면서 선후를 가려서 하려 합니다. 개혁하지 않으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어느 계파(민주계를 지칭)에서 개혁을 제기한 것 같은데, 이것이 당을 화합시키는 데 나쁜 영향을 주고 계파간의 알력을 조장하는 결과를 낳기 쉽기 때문에 자제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의견들은 당 공식기구를 통해 제기되고 수렴되는 것이 당 발전에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 전당대회 전 당직개편은 사실상 어려워진 듯 한데…. 언제쯤 있을 것 같습니까?

실제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은 전당대회에 전력해야 할 때 입니다.

● 보궐선거의 패배 책임을 들어 박총장에 대한 인책사퇴 주장도 있었는데….

선거 직후 패배 책임은 나에게 있다고 분명히 밝힌 바 있습니다.

● 당직개편의 필요성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현 당직이 출범한지 3개월도 안됐다ㄷ는 점에서는 개편이 필요치 않다는 지적도 있으나 민자당이 창당전당대회를 갖고 정식 출범하면서 새로운 자세로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습니다만….

전당대회 때까지는 특별한 변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알 수 없지요.

● 얼마전 당내 내분이 심각할 때 민정계내 중간보스격인 다섯명의 중진들이 청와대에 불려들어갔었지요. 그 뒤 ‘5인위’라는 중진그룹이 새로 생겼는데, 며칠 전에 박총장께서는 “나도 포함된다”며 “6인위”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6인위’라는 말은 지나가는 이야기일 뿌입니다.

● 5인위든 6인위든 중간보스급들이 나름대로 계보를 꾸려가며 민정계를 단합시켜 받쳐나가겠다는 뜻인 것 같은데, 민정계의 계보정치는 가능하리라 생각하는지요.

민자당은 뿌리가 각기 다른 3당이 모여 합당했으니 지금은 3계파가 하나로 융합되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점에서 민자당이 계파별로 운영되는 것은 시기적으로 적합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짧게는 올 연말까지, 길게는 14대 선거 때까지 3당이 하나의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조직기반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민주계나 공화계에서도 계보 · 계파정치를 자제해주기를 바랍니다. 민정계의 경우 1백20여명 방대한 숫자의 의원들이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일부는 소외되어 당무를 잘 모른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과거에 총장 · 총무를 맡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소외된 분들에게 이를 알려주고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역할을 하자는 것이지요. 이것은 朴泰俊최고위원대행을 도와주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내년이나, 아니면 다음 선거를 치루면서 계파가 생겨나더라도 지역이나 인물 중심이 아니라 광범위하게 정책을 놓고 논의한 뒤 주의 · 주장을 중심으로 모여 발전돼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 계보 · 계파정치는 모두 자제되어야 한다는 뜻입니까?

최근에 월계수회도 자제하고 있지 않습니까.

● 지구당 조직책 선정 문제로 당 내외에서 시그러웠는데 어느 정도 진척됐습니까?

2백24곳의 지역구 중 지금 60여곳이 남아 있습니다. 전당대회 전까지 아주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10곳 내외를 제외하면 선정이 무두 완료될 것으로 봅니다. 지금까지 1백60여곳을 개편했는데 다행히 별다른 사건이 없이 치렀지요. 일부 지역에는 참여가 덜된 경우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반대로 민정 · 민주 · 광화계가 하나가 되어 훌륭히 치른 곳도 있습니다. 참여가 덜된 곳은 조직을 다지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김영삼최고위원의 ‘공작정치’발언 이후 정칭권 주변에는 3당합당 당시 민주 · 광화계에 엄청난 액수의 정치자금을 지원해주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고 있는데….

전혀 엉뚱한 오해입니다. 합당명분을 훼손시키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적어도 세분 최고위원이 마음의 문을 열고 구국적인 결단으로 합당을 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나도 직접 감명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 평소 박철언장관의 정치행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왔습니가?

내가 무어라 이야기해야 할지 생각이 잘 나지 않아요. (머뭇거린 뒤)박장관이 합당하는 과정에 여러가지 심부름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지금 사임한 상황에서 이야기하기엔 적합치 않은 것 같군요.

● 박태준최고위원대행과는 손발이 잘 맞습니가?

잘 모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정치일선에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정치를 지켜봐온 분입니다. 경영력이 탁월하짓지요. 지난 2년 동안 국회 경제과학위원회에서 상임위 활동을 같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朴대행이 독주형이라는 이야기도 잇는데….

경영을 하는 경우엔 그분이 한 분야의 전문가 입장에 계셨기 대문에 회사경영을 어떻게 하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 운영에서는 그런 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 총장직을 맡고난 뒤 가장 어려운 점은?

2人事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각각 다른 정당에 뿌리를 내렸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놓으려까 기준과 보직에 상충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여당을 오래한사람과 야당을 오래한 사람들의 생각을 적절한 수준에서 타협, 조정하는 게 어려웠지요, 나는 상식과 보편성을 중시한다고 늘 주장해왔는데 그런 점에서 고위당직이든 아니든간에 인선문제로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었지요. 아직 인사가 완전히 끝나지도 않았지만…. 또 정책결정에서도 상이한 주장과 입장을 하나의 통합된 정책으로 만드는 것은 어렵기 마련이지요. 계파별로 수를 정하는 게 가장 어려웠고 당무위원 결정 때 가장 힘들었습니다. 그때는 며칠씩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고심했지요.

● 정치에 입문한 지 7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때는?

요즘입니다. 광주청문회에 증인으로 나갔을 때가 가장 어렵지 않았냐고 주위에서 이야기하지만 그때는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증인으로서 담담히 응했을 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 박총장의 정치관은 어떤 것입니까?

정치는 갈등을 해소시키는 일이라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갈등은 오히려 증폭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새 정당이야말로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에게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때문에 민자당의 출범은 지역간, 세대간, 빈부간의 갈등을 해소시키고 국민생활을 고루 안정시켜야 하는 어려움을 안고 시작됐다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소명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초대사무총장으로 막중한 소임을 갖고 잇지요. 당내 갈등이나 불협화음을 깨야 하고, 그것이 나라 안의 불화를 해소하는 것이기도 하겠지요. 거대여당이라는 정치적 상황을 전제로 하여 보더라도 국가발전에 야심적인 비전을 내놓아서 국민에게 희망을 줘야 하겠습니다. 또 남북통일에 대비해 광범위한 국민의 지지를 받아놓아야 하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나는 그런 입장에서 당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최근 당내에서 있었던 사건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자성케 하는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비온 뒤 땅이 굳어지듯이 당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는 여러분들에게 귀중한 교훈이 되어야 하고 나도 그렇게 노력할 것입니다.

● 내각제 개헌에 대해 총장께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내각제로 개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야 갈등이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 민자당이 너무 큰 것 같지는 않습니까?

다음 선거에서 견제를 많이 받을 것 같습니다. 과반수를 조금 넘는 1백70석에서 1백80석이면 적당한 것 같은데…. 아무튼 3당합당은 잘된 것이지요.

● 지난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국회특위의 청문회 때 당시 朴의원은 증인으로 출석한 바 있습니다. 그때 軍관계 출석 증인 중에서는 가장 성실하게 답변을 했다는 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때 못다 한 증언이나 왜곡된 것이 있다면….

추가할 것도 정정할 것도 없습니다. 그때 모든 것을 밝혔습니다. 그 사건은 가슴아픈 역사적 사건이란 점에서 제 생각은 지금도 변화가 없습니다.

● 두 김최고위원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두분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분(김영삼최고위원을 지칭)은 이땅에 민주주의를 반드시 정착시키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30년을 외길로 살아왔습니다. 또 한분(김종필최고위원)은 다양한 경험과 연륜을 가졌습니다. 두분이 마음을 합친다면 한국정치와 역사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입니다.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모였다고 믿습니다.

● 군생활과 정치생활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그 간극을 어떻게 극복합니까?

군은 단순한데, 정치는 생활자체가 정치이지요. 정치에는 메커니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는 경험과 경륜이 중시되는 것 같아요. 아직 저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경륜을 넓히는 일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1933년 충북 沃川에서 태어나 大田高에 다니던 중 6 · 2352를 맞았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이때 학도병으로 “끌려간 것”이 군에 첫발을 디딘 계기가 됐다. 휴전 후 大田高에 복학했으나 곧바로 육군사관학교 12기로 입대했고, 그것이 육군대장으로 예편하기까지의 입신 역정의 시작이 되었다. 그는 지난 83년 국군보안사령관직을 마지막으로 예편한 뒤 12대 국회의원선거 대 민정당 충북 3지구당 위원장으로 출마해 의사당에 진출했다. 이어 88년 민정당 사무총장을 역임, 5共과 6共에 걸쳐 기린아로 급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80년의 봄’ 당시 20사단장으로 5 · 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하는 데 한 역할을 맡았고, 이 땜누에 광주청문회의 증인으로서 ‘가슴아픈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현장에 섰었다.

그는 그후 목소리가 없는 평의원 생활을 지내오다가 3당통합 후 거대여당의 사무총장으로 발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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