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권료’단맛에 영화는 질식
  • 송준 기자 ()
  • 승인 1993.12.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디오 판권이 영화업계 돈줄 … 내용은 뒷전, 외화 파행수입 부채질

명화들이 죽어가고 있다.<헨리 5세> <퍼즐릭 우먼> 간은 영화들은 ‘자기 소개’한번 변변히 해보지 못하고 간판을 내렸다. <고령가 살인사건> <카프카> 등은 창고에서 몇 년째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시네마 천국> <파리 텍사스> <지중해> 같은 영화는 소극장에서 잠시 개봉되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 뻔했는데, 관객이 줄을 잇는 바람에 대극장으로‘스카우트’되면서 명성을 되찾은 운 좋은 경우에 해당한다.

어떻게 이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요지경 속 같은 관행을 이해하려면 영화 시장과 비디오 시장 두 곳의 메커니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유념할 것은, 영화 시장에서든 비디오 시장에서든 계약 대상이 되는 것은 거개가 완성된 필름이 아니라는  점이다. 흔히 제작 계회서를 보고 계약을 하는데, 제작자 · 감독 · 배우의 이름값과 제작비 규모에 따라 계약금에 차이가 크다. 물건이 클수록 흥행 가능성이 크지만, 비싸고 불확실해서 위험도가 높다. 전세계의 영화업자들은 매년 3회에 걸쳐 큰 시장을 연다. 각각 2월, 5월, 10월에 열리는 ‘아메리카 필름 마켓’(미국 로스앤젤레스 샌터모니카 해변)과 ‘칸느 마켓’(프라스 칸느) 그리고‘미페드 마켓’(이탈리아 밀라노) 이 세계 3대 필름 마켓이다. 전세계 영화의 90% 이상이 이곳을 거쳐 유통된다. 충무로 영화업자들도 주로 이 시장에서 영화를 수입한다. 외화를 수입하는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사올 영화를 고르고, 상대편과 가계약을 해당하는 ‘ELF 메모’를 작성한다.

귀국 후 영화 제작사측이 딜 메모를 기준으로 쓴 공증 계약서를 보내오면, 영화 가격의 20%쯤을 계약금으로 송금한다, 영화사는 이 계약서를 가지고 비디오 제작사와 판군 교섭을 벌인다. 계약 영화에 대한 평가가 아주 다르지 않는 한, 영화 업자는 영화 가격의 1백~1백30%에 달하는 비디오 판권료를 계약 즉시 챙길 수 있다. 순식간에 몇억원이 수중에 들어온다. 이 경험은 두고두고 업자에게 마약처럼 작용한다. 자금이 궁할 때마다 마켓에 나가 계약서만 몇장 끊어오면, 비디오 제작사가 돈보따리를 들고 기다리는 것이다. 심지어“<○○○>을 사올 계획인데, 판권료를 미리 주겠느냐”고 비디오 업체와 사전에 흥정을 해서 자기돈 없이 외화를 수입하는 영화업자도 있다. 보통 6개월 두쯤이면 계약했던 영화가 완성된다. 외국 제작사가 영화 프린트를 보내오면 잔금을 치러야 한다.‘마약’의 후유증은 이때 집중적으로 발생한다. 거개는 미리 받은 비디오 판권료를 어디엔가 써버린 뒤여서 잔금 마련에 급급할 뿐더러, 영화를 극장에 거는 일도 커다란 부담이 된다. 10개 남짓한 개봉관을 뚫고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렵고, 개봉에 따른 비용이 멏천만원을 쉽게 넘어서기 때문이다. 개봉 사레비말고도 광고 · 홍보비 일체를 영화사가 맡아야 한다.

여기에 한가지 부담이 더 있다. 비디오 제작사와 판권 계약할 때 설정하는 담보와, 개봉극장의 수준과 광고 · 홍보비 규모 등을 구정한 계약 조건을 이행해야 하는 것이다. 최근의 담보율은 판권료의 1백~1백30%에 이른다. 궁지에 몰린 영화업자는, 영화 마켓에 나가 죽기 살기로 계약에 임하는 한편, 극장 사영에 드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쓴다. 더욱이그동안 비디오 판권료를 미리 받은 영화들이 창고에 줄줄이 밀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의 질과관객의 취향을 고려해 합리적인 흥행 전략을 짜기란 불가능하다. 영화사는 결국 계약 조건이 까다로운 영화부터 극장에 내걸 수밖에 없다. 그밖의 영화부터 극장에 내걸 수밖에 없다. 그밖의 영화들은 광고 · 홍보도 전혀 없이 변두리 삼류극장으로 밀려난다. 우리 영화 · 비디오 회사가 선호하는 영화는 대략 미국 영화70%, 홍콩 오락영화15%, 유럽 영화10% 순이다. 나머지 5% 미만이 제3세계의 예술 필름들이다. 뒤의 것부터 창고에 오래 남아 있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예정에 없던 영화도 덤으로 사와
 영화사들이 수입 마켓에 목을 매는 풍토는 제살 깎기 경쟁으로 이어진다. 전문가 ㄱ씨는“극소수의 영화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막바지에 몰려 마켓으로 뛰쳐나가는 업자들이다. 비행기 한 대가 전세를 낸 듯, 온통 한국 영화업자로 바글거린 적도 있다”라고 개탄했다. 마켓에 참여하는 한국 업체들은 영화사 · 비디오 제작사 · 방송사 및 여러 프로덕션을 합쳐 대략 3백여개(한 회사당 평균 2~3명)에 달한다. 일본의 경우는, 전국적인 배급망을 가진 대형 회사 5개 정도가 치밀한 구매 전략을 세운 뒤 마켓에 나간다고 한다. 과당 경쟁의 뒤탈은 불리한 계약으로 되돌아온다. <다이하드 3>처럼 비싼 값에, 예정에 없던 5편의 다른 영화를 덤으로 사오는 사례도 나온다. 외국 제작사가 한국 업자에게‘작품 값의 50%를 미리 지불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촬영 들어가니까 돈 더 보내라’거나‘잔금 미리 내면 필름 보내주겠다’‘계약금을 이틀 안에 가져오라’는 식의 억지를 부릴 때도 있다. 위와 같은 비정산적인 계약 관행이 가능한 것은 비디오 판권료라는 도깨비 방망이가 있기 때문이다. 이 안전판이 있는 한 외화 수입은 최소한 본전치기 장사는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왜 영화업자들은 여전히 줄타기 경영를 하는가. 전문가들은 그 이유로 주먹구구식 작품 선정과 부실 경영을 든다. “비디오 판권료를 챙기는 순간 정신이 나간다. 영화에 대한 애정도 노하우도 없이 뛰어든 영세업자 대부분이 이때부터 빌딩을 올리거나 벤츠를 굴리면서 호텔 생활을 시작한다”라고 ㅁ사 ㄱ기획실장은 지적했다. 화려한 시절만 기억하는 것도 우리 업자들의 고질이라고 ㅅ사 ㅈ실장은 꼬집는다.“큰 것은 5편 가운데 1~2편만 터져도 본전은 건진다. 영화사 대부분이 실패한 여러 경허보다 성공한 한 건의 추억에 젖어 사는 것 같다”라는 것이다. 해마다 1백~1백50개 영화사 가운데 3분의 1이 망하고 새로 생겨난다. 올해만도 이화예술 · 세경영화등 선두에 섰던 영화사들이 줄줄이 도산했다. 그런데 비디오 업체들은 뭘 믿고 막대한 판권료를 선금으로 선뜻 내놓는가. 왜 직접 외화 수입에 나서지 않는가. 그 만큼 비디오 시장의 수익률이 높기 때문이다.

최근 5년 사이에 비디오 시장이 2천3백억원 규모(영화 시장 규모는 1천억~1천3백억원)로 2배 가까이 커진 사실이 증거가 된다. 한편‘극장 흥행작은 비디오로도 반드시 흥행한다’는 법칙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에 비디오 업체는 반드시 영화업자를 통해서 판권을 구입하려드는 것이다. 이 경쟁의 와중에 판권료가 치솟았으리아는 지적이다. 그 결과 88년 2백80여개에 달햇던 문공부 등록업체가 지금은 8개 메이저사로 축소되었다. 수입이 파행으로 치닫게 된 것은85년, 영화사 설립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부터이다. 1억원의 에치금만 있으면 영홧가 하나 태어난다. 이로 인한 무질서와 과당 경쟁에 대해 정부는 무신경하거나 속수무책인 것처럼 보인다.

과당 경쟁 피해, 관객에게 돌아가
 영화 수입업자들의 과당 경쟁과 안목 부재는 그들의 경제적 이익 또는 손해로만 그치지 않는다. 그 피해는 결국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에게 돌아간다. 수입 가격과 직배영화 관람료를 합하면 할리우드 영화 제작비의 5% 이상을 한국 관객이 지불하고 있는 셈이면서도, 정작 좋은 영화를 볼 기회는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jdlT는 것이다. 영화 수입업자들이 좋은영화를 창고에 묵히고 있기 때문이다.‘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는 안방에서 비디오로 보면 된다’는 일반의 통념이 있긴 하지만 영화와 비디오 매체의 본질적인 차이가 무시되고 있다.

비디오 회사의 판권료를 챙겨외화를 수입하는 업자들의 농간으로 관객들이 극장과 안방을 동일시하게끔 돼버린 것이다. 영화 평론가 이정하씨는“밥 먹고 전화 받으면서 보는 비디오와, 밀폐된 어두운 공간에서 스크린에 몰입해 보는 영화를 같다고 여기는 생각은 큰 착각”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비디오은, 영화 화면의 반쪽밖에 보여주지 못한다(76쪽 상자 기사 참조).
宋 俊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