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유럽’ 자크 들로르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2.07.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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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 뿌리 내린 EC 위원장… 프랑스적 예술 애호가에 독일식 ‘일벌레’

 

 깊은 잠에 빠진 유럽을 흔들어 깨우고 먼저 쌓인 유럽에 새 바람을 불어넣어 유럽통합의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자크 들로르. 그가 6월26~27일 이틀간 리스본에서 개최된 유럽공동체(EC) 정상회담에서 예상대로 또다시 2년 임기의 집행위원장으로 유임됐다. 85년 1월부터 유럽공동체를 이끌어 프랑스에서조차(그는 프랑스인이다) ‘미스터 유럽’으로 불리는 들르는 과연 누구인가.

 유럽공동체의 원동력이라 할 수 있는 집행위원회는 말 그대로 각료이사회에 정책을 제안하고 거기서 결정된 정책을 집행하는 기관이다. 유럽공동체 예산안을 짜서 살림을 꾸려 나가는 것도 집행위원회의 중요한 역할이며 대외적으로 유럽공동체를 대변하는 권한도 지닌다. 요컨대 ‘유럽 행정부’라고 할 수 있는 집행위원회는 12개 회원국이 임명하는 17명(큰 나라로 꼽히는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은 각각 2명의 집행위원을 임명할 권한이 있다)의 집행위원으로 구성되며, 원칙적으로 이들 집행위원은 자신들이 대표하는 나라의 이익을 떠나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는 자율성을 부여받고 있다. 그러나 선거가 아닌 임명 체제에서 과연 이들의 독립성이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집행위원회가 유럽 행정부라면 위원장은 행정부의 수반, 한 나라의 체제에 비유하자면 대통령의 지위에 해당되는 셈이다. 바로 그 자리를 자크 들로르가 차지하고 있다.

 

인기 높아 차기 프랑스 대통령 가능성

 그러나 자크 들로르가 유럽공동체 잽행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처음 브뤼셀로 길을 떠나던 85년의 상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왜냐하면 유럽 통합 문제가 유럽전체의 사활이 걸린 중대사라는 요즈음 의식과는 달리, 그 당시 유럽공동체의 분위기는 대의명분을 갖추고는 있었으나 더 이상 치유가 불가능한 정체의 늪에 깊이 빠져 있었다. 1981년 프랑스 사회당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 재무장관이던 자크 들로르가 자신이 꿈꾸던 수장자리를 로랑 파비위스에게 빼앗긴 후 떠나야 했던 브뤼셀행은 당시 상황으로는 유배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클로드 셰송 전 외무장관을 그 자리에 보내고자 했던 미테랑 대통령의 생각이 독일과 영국의 심한 반대에 부딪히자 차선책으로 임명한 대타자였음을 감안한다면…. 당시에는 재무장관 시절 들로르가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했기 때문에 곤욕을 치러야 했던 미테랑이 나름대로 분풀이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뒷얘기도 나돌았다.

 그러나 유럽은 들로르에게 완전히 생소한 곳은 아니었다. 그가 유럽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사회당에 입당한 지 5년째 되는 해인 1979년 최초의 실시된 유럽의회 의원으로 당선되면서부터이다.

 유럽의회에서 경제금융위원장직을 맡은 동안 형성했던 인맥과 몸에 익힌 분위기는 들로르로 하여금 단시일 내에 집행위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구체적 방향 및 일정표를 제시하는 데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그가 제시한 구체적 방향과 일정표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85년의 ‘유럽단일법령’ 조인으로부터 시작해서 1986년 스페인, 포르투갈의 유럽공동체가입으로 구현되었으며, 파란만장한 마스트리히트조약의 비준이 마무리되면 유럽 단일시장이란 결실로 이어질 예정이다.

 경제·사회문제 전문가로서 또 협상의 명수로서의 그의 자질에 대해서 칭찬하기에 인색한 사람들조차도 만장일치로 추켜세우는 덕목이 잇다면, 바로 그가 지독한 일벌레란 점일 것이다.

 30분간의 아침체조를 마치고 8시30분 ‘브레이텔’ 청사 12층에 자리한 사무실에 도착하면 들로르의 하루 일과는 시작된다. ‘베를레이몽’ 청사에서 17명의 집행위원이 비좁게 운신해야 했던 시절에 비하면 새로 단장한 그의 널찍한 사무실은 도약을 거듭하는 유럽의 한 상장이라고도 할 수 있다. 9시에 그의 비서실장이며 ‘들로리즘’ 구현의 중심인물인 파스칼 라미와의 단독 면담이 끝나면 소규모 참모회의가 뒤를 잇는다. 이때부터 각계 인사들과의 접촉·회의·학회 들로 빈틈없이 짜여진 숨가뿐 일과가 저녁 늦게까지 계속된다.

 여간 1백80회에 이르는 비행기 여행, 벨기에 국내나 네덜란드로의 잦은 자동차 출장도 그의 집무 일과의 일부분일 뿐이다. 85년 10월15일에서 30일까지 보름 동안 그는 브뤼셀스트라스부르 마드리드 파리 암스테르담 런던 등지에서 12차례 연설을 하기도 했다.

 

‘프랑스 보통사람의 모습을 한 독일인’

이처럼 끈질긴 일에의 집념이 그로 하여금 장수 집행위원장이 되게 했음에 틀림없으나, 상관의 초인적인 리듬에 맞추어야 하는 보좌관들에게는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저녁 7시까지 남아서 일하는 관리의 수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는데, 요즈음에는 9시가 넘도록 주차장이 가득차 있다”고 푸념하는 한 ‘유로크라트’의 말은 이들의 고충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모든 업무가 정지되어버리던 휴가철 8월에 회의를 소집하는 새로운 전통도 들로르가 위원장이 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누구나가 인정하는 들로르의 권위주의적이고 성마른 기질은 빡빡한 이들의 나날을 더욱 고되게 만드는 듯 하다. 또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자만심과 우월감, 섬세한 인간심리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때문에 들로르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각기 다른 12개국 사람들의 심리가 교묘하게 얽혀 들어가는 브뤼셀 집행위원회 내에 친구가 거의 없다는 단점을 안고 있다.

 그렇다고 들로르가 일만 아는 남편, 귄위만 내세우는 아버지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일요일에는 미사에 참석하고(축구시합을 보기 위해 못가는 수도 있다), 딸 마르틴(현 프랑스 노동부 장관)에게 미술과 영화에 대한 취미를 심어준 사람도 바로 들로르이다. 들로르는 라디어 인터뷰에서 자신의 친구인 재즈 음악가를 한명 동석시킨 후 그가 연주하는 음악에 맞춰 체통없이 엉덩이를 흔들어가며 박자를 맞출 정도로 소문난 재즈광. ‘고래가 플랑크톤을 삼키듯이’ 무지막지하게 자료를 수집해야 비로서 직성이 풀리는 그의 편집광적인 면모가 취미활동에서는 대단히 많은 재즈음반을 모으는 일로 대체된 것일까.

 유럽을 무대로 활약하는 들로르의 프랑스내 위상은 어떠한가. ‘프랑스 보통사람의 모습을 한 독일인’으로 들로르를 묘사한 〈르 푸엥〉지의 알랭 도베르뉴 기자는 확실히 프랑스 정치계에서는 들로르가 별종에 속한다고 말한다.

 우선 유럽정치의 두 주류인 사회민주주의 경향과 기득민주주의 경향을 동시에 포용하려는 그의 정치철학이 그러하며, 유난히 학벌을 숭상하는 프랑스 사회에서 내놓을 만한 학력도 없는 업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나, 여러 사람들이 내놓은 의견의 다양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으로 치는 골(Gaule)족 나라에서 끈질기게 합의점을 모색하려는 그의 기질로 볼 때 그러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일국의 대통령이 산적한 국사를 제쳐놓고 고서점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우려 아닌 우려를 자아내는 풍토에서, 소설 한줄 안 읽는다는 자크 들로르는 프랑스 정치가 유형에는 들지 않는다고 하겠다.

 

정치에 식상한 프랑스 국민의 기대에 맞아

 그런데 신기한 일은 최근 3,4년 들로리의 인기가 계속 상승한다는 점이다. 프랑스에는 “자리에 없는 자가 언제나 잘못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들로르를 빗대어 말할 때에는 흔히 “자리에 없는 자가 옳다”고 바꿔 말하기도 한다. 날이면 날마다 반복되는 비방과 파벌사움에 식상한 프랑스 국민의 새얼굴 기대 심리가 자연히 국내정치 일선에서는 한발짝 떨어져 있는 들로르의 주가를 높인다는 말이다. 지난 봄 치러진 시·지방의회 선거에서 사회당이 참패하자 억울한 속죄양이 되어 물러나게 된 에디트 크레송 전 수상(프랑스 최초의 여수상이었다)의 후임을 놓고 베레고부아 현 수상과 더불어 제일 많이 거론된 사람이 들로르였다. 그를 브뤼셀에 계속 남겨두라고 미테랑 대통령에게 전화까지 한 일은 유명한 일화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로카르를 제치고 가장 유망한 미테랑 대통령 후계자로 떠오른 들로르가 이 두 거물과 이루는 관계는 참으로 흥미롭다. 마르틴 오브라는 자신의 부친인 들로르가 1957년 ‘프랑스 기독교 노동자동맹(CFTC)'에서 알게된 로카르와 때때로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견해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언제나 진심으로 높이 평가한다고 예기한 바 있다. 들로르와 로카르의 관계가 이념적 공감과 인간적 존중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와 미테랑의 관계는 필요에 의한 이해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5월 한 텔레비전과의 대담에서 들로르는 자신이 “현재로서는 그 어느 자리(수상직과 대통력직을 암시)에도 출마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출마하지 않는다는 뒷부분보다 앞부분, 즉 ‘현재로서는’을 더욱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점을 모르는 이가 있을까. 들로르의 나이 올해 67세. 유럽공동체 집행위원회장으로서의 새 임기가 종료되는 시기(94년)가 차기 대통령선거 시기(95)와 공교롭게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면 ‘혹시’가 ‘역시’로 되는 날이 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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