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明浩 한국은행 총재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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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가 고성장 통하지 않는다”

한국은행 金明浩 총재는 늘 ‘걱정’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시중 돈의 양을 적절히 조절해 통화가치를 안정시키는 일이 가장 큰 걱정거리이다. 통화가치 안정은 곧 물가안정과 같다. 한국은행은 최근 내년도 물가상승률과 실질 경제성장들을 올해보다 높은 6.1%와 6.3%에 이룰 것이라고 전망했다. 고물가 속의 고도성장을 오랫동안 체험한 우리 국민에게 이같은 수준은 불만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김총재는 인위적인 부양책으로 경기를 급격히 끌어올리는 것은 좋지 않다고 믿는다. 과열성장은 물가 불안을 부르기 때문이다. 김총재는 중앙 은행의 역할을 자동차로 비유하면 ‘브레이크’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장애물이 나타나면 급제동을 걸어야 하고 과속 질주도 막아야 한다는 말이다. 김총재의 브레이크가 과연 믿음직한 것인지 12월2일 그의 집무실을 찾았다.

최근 ‘소신이없다. 대가 약하다’는 지적에 대해 스스로 ‘소신이 강한사람’이라고 피력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은행 총재가 신경제 1백일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소신 없이 돈을 풀었다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올해 자금 공급량은 제가 은행감독원장이던 작년 하반기에 세원 계획대로였습니다. 경제가 계속 나빴고, 금리자유화는 연내 실시가 예고돼 있었으며, 금융실명제도 실시될 가능성이 있다고 봤지요. 이럴 때 돈을 조였다면 엄청난 도산 사태가 일어났고, 조금씩 살아나려는 경기에도 찬물을 끼얹었을 겁니다. 정부와 이견 조율이 잘되는데도 ‘정부가 들렸다’ ‘긴축해야 한다’ 이렇게 꼭 딴 소리를 해야만 소신이 있는 거냐고 되묻고 싶습니다.

물가가 불안하다는 지적이 많은데, 인플레는 결국 화폐적 현상 아닙니까. 시중에 돈이 많았으니까 물가가 오른 것이죠.
물론입니다. 돈이 전혀 없었다면 인플레가 안될 테니까요. 그러나 돈을 푼 것이 인플레 주범이라는 시각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총수요 요인(디맨드 풀)에 의한 물가상승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공공요금 인상, 농수축산물 가격 상승 등 공급 측면(코스트 푸시)의 인플레 압력이 컸다고 봅니다. 또 92년에는 물가가 4.5% 올랐고 올해는 5.5%로 추정되니까 분명 물가가 더 올랐지만, 작년과는 반대로 농수축산물을 제외한 다른 물가는 올해가 오히려 안정됐습니다. 질이 나쁜 물가 수준은 아닌 셈입니다.

3/4분기 경제성장률릉 잠정치 발표일(11월 27일)보다 보름이나 앞당긴 11월12일 언급해서 의혹을 샀습니다.
당시2/4분기보다 3/4분기 성장률이 더 나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지요. 실명제가 실시됐고, 기업 활동이 얼어붙어 있다고 봤으니까요. 그런데 추계치를 뽑아 보니 소문과 달랐습니다. 예상보다 높은 6%대에 이를 것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이를 빨리 알려 가계난 기업 활동에 참고하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우리 경제에 탄력이 붙었다고 보십니까?
3/4분기 경제성장률이 6.5%로 높아지기는 했지만 조업일수 증가같은 이례적 요인과, 지난해 같은 기간 성장률(3.3%)이 낮은 데 따른 반사 효과가 작용했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매우 완만한 회복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나 92년은 상반기 상승 기조, 하반기 하강 기조라는 추세였던 데 비해 올해 흐름은 그와 정반대입니다. 그만큼 질이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년은 이 상승 기조가 더 뚜렷해 질 것으로 보이지만 물가는 걱정입니다. 불안 요인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앞으로 경기가 눈에 띄게 회복되면 돈이 도는 속도가 빨라져 통화량과 물가의 상관관계가 밀접해질 텐데요.
4/4분기 국민총생산(GNP)이 나와야 유통 속도를 알 수 있지만, 현재 제 수준을 거의 찾아가고 있다는 심증을 갖고 있습니다. 경기 회복이 가시화하면 돈이 도는 속도가 빨라질 수 있겠지요. 이를 염려해 10월부터 통화의 군살빼기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적정 통화량 수준으로 복귀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94년도 경제운용에서 가장 역점을 두어야 할 분야는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안정입니까, 성장입니까?
안정 따로 성장 따로가 아닌 ‘안정식 성장’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경기 상승세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지, 부양책을 써서 끌어올리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물가 수준을 해치지 않으면서 성장할 수 있는 적정한 수준(잠재 성장률)인 7%대가 바람직합니다. 분명한 건 안정을 해치면 성장도 없다는 겁니다. 고성장과 고물가가 같이 갈 수 있다는 생각은 낡았을뿐더러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경기가 살아나고 있는데도 부양책을 써서 물가를 자극한 89년·90년의 정부 정책이 잘못됐다고 보시는군요.
당시 저는 부총재였는데, 그때 얘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현재는 잘되고 있지 않습니까

내년에 유입될 의화 자금(1백20억달러로 추정)이 통화관리에 두통거리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자본 자유화가 진전되면서 한국도 통화와 환율 간의 상호 연결성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통화 따로 환율 따로 정책대응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주식시장 개방으로 외국인 투자 자금이 유입되면서 통화량과 환율의 상층성이 부각돼 통화관리에 애를 먹었듯이 내년에도 이 현상이 지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과도한 통화 증발이나 환율 변동을 막기 위해서는 자본수출을 늘려 돈이 밖으로 나가게 해야 합니다. 외화 자금을 적정 수준으로 관리할 수 있는 효과적인 정책 대응이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2단계 금리자유화가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보십니까?
1개월이 넘었습니다만, 우선 과잉반응(오버 슈트)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명목 대출금리는 1~2%포인트 올랐습니다. 그러나 기업이 무는 실질금리는 큰 변화가 없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회사채 유통수익률 등 시장 실세금리도 자유화 이후 오히려 떨어지는 등 안착으로 가는 좋은 징후들이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의 압력 때문에 금리자유화를 실시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금리를 시장 기능에 맡겨야 할 필요성은 우리 쪽에서 더 절박했습니다.

통화량과 금리를 동시에 본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금리자유화 이전에는 금리가 규제돼 있었기 때문에 기업과 가계의 경제 활동은 통화량에 더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경제 주체들이 금리에 민갑해지고 있으므로 이 요인을 고려해야 합니다. 금리 변동은 즉각 투자와 소비에 영향을 미치고 이것이 자금 수요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금리의 중요성을 갈수록 커질 겁니다.

가계는 금융 정책에서 가장 불리한 대접을 받아왔는데요.
가계에 대한 금융 서비스가 충분하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규제 금융체제여서 불가피했습니다. 금리자유화가 더욱 진적되어 돈에 대한 초과수요가 커지고 기업의 자금 조달 방식이 다양화하면 가계 대출이 쉬워질 겁니다.

총재 취임 이후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입니까?
통화 정책 수행에 어려움이 적지 않았습니다. 경제 활성화와 안정 기조 유지라는 단기적으로 상층되기 쉬운 두가지 목표를 조화시켜야 했습니다. 게다가 일련의 개혁 조처로 사회가 요동쳤으며, 특히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는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높였습니다. 이제는 수습 국면으로 들어가고 있어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은 많은 분야에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개방과 국제화에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개방과 국제화는 필요성 자원이 아니라 생존 문제입니다. 정부의 규제와 보호에 의한 경제 운용은 더 이상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변화는 당장 고통을 가져오겠지만, 자율과 경쟁을 촉진해 한국을 한 단계 발전시킬 것입니다. 일방적으로 혜택을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혜택을 주고받자는 호혜적 의식이야말로 국제화와 자율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응하는 자세라고 봅니다.

한국은행의 독립성이 충분히 보장돼 있다고 보십니까?
물가가 오르면 국민들이 누구한테 ‘이 따위로 하느냐’로 다그칩니까. 책임은 한국은행에, 한국은행 총재에게 떨어집니다. 책임을 가진 사람이 최소한의 구너한을 가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62년 한국은 행법 개정으로 권한을 많이 잃었습니다. 정부가 운용 측면에서 책임에 걸맞는 권한을 한국은행에 배려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제도로 분명히 해두는 게 옳다고 봅니다.

한국은행이 독선적이고 관료적이라는 비판이 있습니다. 한국은행이야말로 개혁의 새 바람을 맞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변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공감합니다. 특히 정책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힘쓰겠습니다. 금융기관에 대해서도 감독 대상이 아닌 정책 파트너로 존중하면서 규제보다 지원을 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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