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개혁 원년 10대 정치 사건
  • 서명숙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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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金大中씨의 정계 은퇴와 김영삼 대통령의 취임 선서로 시작된 93년은 김대통령의 의표를 찌르는 전면 개각 조처로 마감되었다. 93년 한국 정치는 한 해의 끝에 으레 따라붙는 '다사다난'이라는 수식어가 유난히 실감나는 다양한 콜라주를 만들어냈다. 국민들은 변화가 연출되는 매순간마다 감탄과 기대, 실망과 분노를 거듭했다. 그러나 강렬한 변화의 순간들만 목격됐을 뿐이다. 그런 변화가 우리의 정치 문화와 풍토 그리고 정치 세력 간의 관계를 규정짓는 어떤 밑그림을 그려냈는지는 아직도 모호하다.

 《시사저널》은 《시사저널》만의 관점에서, 올 한 해를 규정지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커다란 변화의 가능성을 함축하고 있는 '93년 정치 10대 사건'을 간추렸다. 이 정치 사건을 통해 문민 개혁 원년인 93년이 그려낸 변화를 추적해 본다. <편집자>

1. 정계 은퇴 선언한 DJ유학과 귀국, '복귀설'
 1월6일. 대통령 선거의 패배자 金大中 전 민주당 대표의 의원직 사퇴서가 수리됐다. 이로써 그는 40여 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의정 생활, 정치인으로서의 생활을 공식 마감했다. 자신에 대한 평가를 역사에 맡기겠다는 말을 남기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그는, 1월26일 예정된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승자와 패자의 명암이 분명히 드러나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만감이 교차하도록 만든 한순간이었다.

 그는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EC 통합'과 '독일 통일 과정과 통일 독일 문제'를 연구하는 한편, 동유럽권을 여행하면서 격변의 현장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그의 일거수 일투족은 한국 언론의 끊임없는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7월4일. 5개월여 유학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비정치인'DJ는 1주일 만에 동교동 자택에서 경기도 고양시 진흥아파트로 거처를 옮겨 일산 시민이 되었다. 언론에서는 '신양김시대의 도래'등으로 떠들썩하게 예상했지만, 그는 연구소(아시아 · 태평양 평화재단) 설립과 몇몇 대학에서 맡은 강의에만 주력하면서 기성 정치인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회피했다. 정계 복귀라는 쓸데없는 잡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사단은 전혀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11월 5일 吉昇欽 교수(서울대 · 정치학)가 한국정치학회가 주관한 학술대회에서 김대중씨의 정계 복귀와 15대 대통령 선거 출마 가능성이 높다는 논물을 발표함으로써 'DJ정계 복귀설'이 번져나갔다. 결국 그는 강연과 외부 인사 접촉마저 완전히 단절하고 연구소 일에만 전념하는 칩거 생활에 들어갔다.
 거인에 대한 관심은 언론의 것인가, 아직도 그가 담당할 정치 무대에서의 배역이 남아 있기 때문인가. 해답이 불투명한 가운데, 그는 12월 중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라는 자전적 에세이집을 펴냈다.

2. 인사 파동이로 첫 시련 최총장까지 물러나
 문민 정부는 국민들의 기대와 환호 속에서 닻을 올렸다. 인왕산과 청와대 인근 도로 개방 등 상징적인 조처는 문민 정부 출범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를 실감나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민호는 뜻하지 않은 사태를 맞이하면서 초반부터 기우뚱거렸다. 이른바 '인사파동'이었다. 첫 타자는 田昞旼 정책수석비서관으로, 내정된 지 사흘 만에 학력시비와 장안의 전력 문제로 내정 방침이 취소됐다. 새 정부의 도중하차 행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金?哲 서울시장의 사퇴서 수리이후에도, 새 인물을 둘러싼(불법과 편법 그리고) 도덕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정면 돌파 방침을 바꾸어 3월8일 朴憘太 법무부장관, 許在榮 건설부장관, 朴孃實 보사부장관을 경질하는 부분 개각을 단행했다. 崔昌潤 총무처장관, 權永海 국방부장관, 李海龜 내무부장관도 경질 대상에서는 제외됐지만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인사파동은 첫 조각에서 참신함과 파격성, 개혁성을 보여 주려던 김대통령의 의도에 찬물을 끼얹었다. 뿐만 아니라 문민 정부의 정보력과 검증 능력에 대한 회의와 함께, 보안을 철칙으로 삼는 김대통령 특유의 인사 행태를 재고해야 한다는 비판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인사 파동이 남긴 그림자는 다른 측면에서도 매우 길었다. 공직자의 도덕성을 재는 시대적 기준과 잣대가 달라졌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기준은 김영삼 정권의 일등 공신이자 실세인 崔炯佑 사무총장의 전격 사퇴에도 적용됐다. 당 개혁의 칼자루를 휘두르던 최총장은 아들의 부정입학 사건으로 4월14일 물러났고, 이는 정치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93년은 공직의 무거움을 새삼 곱씹게 만든 한 해였다.

3. 공직자 재산 공개 회오리 바람 뒤의 정적
 취임후 곧바로 대통령으로서 재산을 공개하겠다. 새로 임명될 국무총리 이하 장 · 차관들도 이에 따를 것으로 믿는다. 2월20일 첫 청와대 수석비서관 내정자 회의에서 운을 뗀 김영삼 대통령은 2월27일 자신과 직계 가족의 재산 17억7천8백22만원의 내역을 공개했다. 공직자 재산공개 돌풍은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그리고는 한 해 내내 공직 사회를 뒤흔들었다. 누구도 파장의 범위와 여진을 정확히 내다보지 못한 채 사태의 추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공직자윤리법 개정이라는 법적 · 제도적 장치가 채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자발적인'내부 결의에 기대어 고위 공직자 · 민자당 의원 · 당무의위원 들의 재산 공개가 속속 진행됐다. 3월18일 장관 · 청와대 수석비서관의 재산 내역이 공개된 데 이어, 22일에는 민자당이 우리나라 정당 사상 처음으로 소속의원과 당무위원 1백61명의 재산 내역을 일괄 공개했다. 이른바 1차 재산 공개였다.
 두 번에 걸친 재산 공개가 이 사회에 몰고온 파랑은 실로 엄청났다. 국회의장 · 대법원장 · 검찰총장 등 이른바 권부의 수장들이 모두 바뀌었고, 민자당 의원 8명이 의원직을 사퇴하거나 탈당 또는 출당 조처됐다. '토사구팽'과 '격화소양'이라는 말을 남기고 정치권을 떠난 金在淳 朴俊圭 전 · 현직 국회의장은 오랜 외유 끝에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시기에 돌아왔다.

 재산 공개 과정은 단순히 몇몇 공직자와 정치인에 대한 검증과 단죄만이 아니라,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한국 사회 파워 엘리트의 치부 과정과 양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를 남겼다.
 그러나 법 절차에 기대어 진행된 2차 재산 공개 결과는 개운찮은 뒷맛을 남기고 있다. 정부의 공직자 윤리위는 대상자 7백10명에 대한 실사를 벌인 끝에 재산을 누락 신고한 4명에 대해서만 경고 조처를 했을 뿐이다. 국회 윤리위도 의원 3명을 비공개 경고하는 선에서 실사를 마무리지었다.

 폭풍우로 출발해 여우비로 끝난 셈이라고나 할까. 해마다 재산 변동 추이를 감시하고 객관적 기준에 따라 처리하는 지속적인 감시체제의 필요성을 숙제로 남긴, 공직자 재산 공개의 끝마무리였다.

4. 한여름밤 더위 식힌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8월12일 오후 8시 김대통령은 금융실명 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권을 전격 발동해 이 시간 이후의 모든 금융 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라고 선포했다. 금융실명제가 전격 실시되던 역사적 순간이었다. 그 다음날 결과가 나오는 대구 보궐선거에서의 패배가 예상되었던 시점이었고, 또 김대중씨의 대대적인 강연회도 예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김대통령의 긴급 택일은 미묘한 여운을 남겼지만, 역대 대통령이 이루지 못한 실명제 실시 선포의 의미를 흐리게 하지는 못했다.

 실명세 실시는 언제든 누군가가 반드시 실시해야 할 문제이고, 경제정의를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정치권 정화와 부정부패 추방을 위해서도 할 빨리 실시되었어야 하는 조처였다. 이 때문에 전격적인 실명제 실시는 '개혁 중의 개혁' '개혁의 핵심'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깨끗한 정치, 깨끗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김대통령의 일대 결단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금융 개혁을 골자로 하는 실명세 실시에 경제 논리보다는 오히려 정치 논리가 우선 고려되었다는 잡음이 나왔다. 돈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고, 검은 돈 마련이 어렵게 됐다는 점에서 김대통령이 정치인들의 아킬레스건을 한 손에 거머쥘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자당내 민정계는 이를 '친위 쿠데타'로 평가했고, 민주계는 이제 누구도 김대통령의 뜻을 거스를 수 없게 됐다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처음부터 긴급명령으로 출발한 숙명 때문인지 실명제는 수차례 보완 조처가 뒤따랐고, 처음의 초강경 조처에서 상당 부분 후퇴하게 되었다.

5. 전직 대통령 조사 놓고 청와대 · 감사원 '삐걱'
 李會昌 감사원장을 총리로 기용한 것은 감사원과 청와대 사이에 미묘하면서도 심각한 알력을 눈여겨 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예상되던 일이었다.
 이원장은 3월11일 취임소감에서 '성역 없는 감사활동'을 강조한 이래 끊임없이 감사업무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강조했다. 김대통령도 1월31일 부정부패 척결을 국가 통치의 근본으로 삼게 될 차기 정부에서 감사원장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라고 역설하는 등 처음에는 감사원과 청와대의 호흡이 비교적 잘 맞았다.

 그러다가 평화의 댐 및 율곡사업 비리 관련 문제로 감사원이 全斗煥 · 盧泰愚 두 전직대통령에 대한 조사 방침을 밝히면서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원장은 5월4일 특별 기자회견을 통해 다른 사정기관과 상관 없이 독자적인 감사 활동을 펴나갈 것이며, 이 과정에서 현 정권이 관련된 사안에도 성역을 인정치 않겠다라고 말해 검찰과의 갈등을 시사했고 전직 대통령에 대해서도 법이 정한 대로 조사의 직분을 다하겠다라고 청와대 압력에 반발했다.
 청와대는 전직 대통령 비리 조사와 관련된 여러 가지 파문을 고려해 전 · 노 두 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곤란하다는 입장 아래 두 전직 대통령을 조사하지 말라고 압력을 넣었다.

 또한 朴?用 비서실장 등이 고속전철사업 감사를 철회할 것을 종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가 이처럼 감사원 활동에 잇달아 제동을 걸면서 개혁 의지가 크게 퇴색되었고, 두 전 대통령에 대한 조사도 흐지부지 넘어가버렸다. 그러나 이원장은 李萬燮 국회의장과 함께 청와대 마음대로 '조율'하기가 힘든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는 감사원의 의지가 김대통령과의 기밀한 협력에 의한 '역할분담'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6. 대북정책 첫 감사에 걸린 '훈련조작 의혹 사건'
 감사원은 李東馥 안기부장 특보의 훈령 조작사건과, 관련 안기부에 대한 직무감찰로 인해 또 한번 갈등을 겪었다. 감사원의 11월23일 안기부 검찰은 대북 정책에 대한 첫 감사이자, 대북 정책을 사실상 주도했던 안기부에 대한 첫 실질 감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기부는 이에 대해 역시 청와대를 통해 감찰을 반대했으나 감사원의 '의지'에 따라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사건은 민주당 李富榮 의원이 11월16일 국회 예결위에서 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이동복 우리측 대표단에 전달함으로써 타결직전에 있던 이산가족재회문제 등이 결렬됐다라고 폭로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의원의 주장은 원래 그 이전에도 폭로된 것이었으나, 별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안기부에 대한 민주당의 대공세와 맞물리면서 폭발적인 정치 쟁점으로 부각됐다. 이로 인해 정책 사안마다 대립해온 통일원과 안기부의 불편한 관계가 다시 한번 눈길을 끌었고, 정기국회에서 민자당과 안기부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사실과 전혀 다르다는 주장을 편 이씨의 사표는 11월26일 수리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당시 鄭元? 총리, 李相淵 안기부장, 朴東源 통일 차관 등이 조사를 받았다.

 감사원 감사 결과 이씨가 평양 상황에서 만든 예비전문을 청와대에서 보낸 정식 훈령인 것처럼 보고한 부분은 사실로 확인되었으나 사건의 진상 발표는 아직 미루어지고 있다. 신임 李時潤 감사원장이 이에 대해 어떤 의지를 보일지 주목된다.

7. 쌀 개방 파동으로 빛바랜 에이펙 지도자 회담
 에이펙(APEC) 각료 및 지도자 회담(11월19일~21일)과 한 · 미 정상회담(23일)이 열리는 동안 한국 외교는 건국 이후 최초로 장미꽃에 뒤덮인 길을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고, 또 정부 당국자들과 언론에 의해 그렇게 강조되었다. 국민들은 시애틀에 모여든 태평양 연안 14개 국가의 정상이 모두 한국을 치켜세우기에 바빴다는 착각 속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쌀시장 개방이라는 충격적 소식과 함께 이같은 환상의 놀음에서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25일 ‘금의환양’을 기대하며 돌아온 김대통령의 부푼 꿈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야권과 국민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했다. 쌀시장을 개방할 것이 확실하고, 한 · 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같은 약속이 합의되었다는 ‘소문’은 정국 주도권을 더욱 강력하게 틀어쥐고 국제화 · 개방화로 나가려던 김대통령 구상의 발목을 붙들었다. 청와대와 행정부 · 여당은 ‘쌀시장 개방불가’방침의 목청을 드높였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쌀시장 개방에 대해 거의 손을 놓은 채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있던 행정부는 12월2일 허둥지둥 許信行 농림수산부장관을 대표로 하는 협상팀을 제네바로 급파했다. 허장관이 제네바에 도착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개방 ‘불가’는 ‘불가피’로 바뀌어 대다수 국민을 분노와 허탈에 빠지게 만들었다. 정부에 대한 배신감도 극에 달해서 김대통령은 결국 담화를 통해 이에 대해 정중히 사과했다.

 허장관은 관세 유예화 10년 등의 ‘성과’를 얻고 17일 귀국했다. 이번에도 청와대와 행정부 당국자들은 개방 사실 자체는 외면한채 일본보다 유리한 성과만을 홍보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민주당은 제네바에서 불거진 ‘쌀개방 한 · 미 밀약설’을 계속 물고늘어질 것이 분명해 이를 둘러싼 공방전이 내년에도 계속될 전망이다.

8. 역시 달라진 ‘문민’여당 날치기 통과 실패하다.
 12월2일 국회 농수산위 · 재무위 · 예결위 날치기 처리와 본회의 날치기 실패는 민자당뿐만 아니라 김대통령에게도 심각한 정치적 타격을 안겨 주었다. 여권에서 보자면 본회의장에서의 날치기 시도 자체가 실패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이어서 근본적으로 여당의 원내전략 및 실행력의 한계를 드러냈다.

 민자당은 정기국회 초반만 해도 민주당 전략이 늘상 해오던 것에서 별 다를 게 있겠느냐 하는 안이한 태도로 대처하다가 민주당의 필리버스터 전략에 휘말리면서 무게 중심을 잃고 전략다운 전략 한번 쓰지 못한 채 밀기리만 했다. 민자당과 청와대는 날치기 사태로 인해 정권의 개혁성이 본질적으로 의심받게 되고, 여권 내부의 계파 갈등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등 심대한 상처를 입었다. 민정 · 공화계는 민주계 주도에 의한 이번 강공에 팔짱만 끼고 구경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더구나 이만섭 국회의장이 날치기를 거부함에 따라 대신 사회를 맡은 黃珞周 부의장이 사태 와중에서 상처를 입고 병원에 실려가고, 황부의장과 黃明秀 총장 등이 격한 언사로 이의장을 비난하는 등 볼썽 사나운 사태를 연발했다. 이에 따라 이의장과 민자당에 대한 김대통령의 불만도 상당히 심각한 지경에 다다른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민자당에 대한 청와대의 불만은, 개혁 전선에 앞장서고 김대통령의 바람막이를 해 주어야 할 당이 오히려 발목을 붙잡는 일만 도맡아 하고 있다는 것으로 집약될 수 있다. 이번 개각에 따라 당직 개편도 불가피해졌지만, 날치기 사태로 불거진 민자당의 문제점은 쉽사리 치유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9. 정보위 신설 · 예산 감사로 감시권 안에 든 안기부
 쌀시장 개방은 뜻하지 않게 안기부 개방을 몰고 왔다. 민주당이 예산안 연계 고리를 걸어 안기부법 개정 투쟁에 나섰을 때만 해도 민주당 주장이 먹혀들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기부로서는 불운이겠지만 국내외 정세가 민주당의 공세를 살려주었고, 12월7일 국회는 여야 합의로 안기부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정부는 쌀개방으로 몰린 궁지에서 안기부를 희생양으로 삼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이번 국회 회기 내내 안기부는 중앙정보부 창설 이래 최초이자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그 권한 또한 실질적으로 축소되었다.
 안기부법 개정안은 정치 목적 악용 및 인권 탄압 시비를 불러일으켰던 국가보안법상의 고무찬양과 불고지죄에 대한 안기부 수사권을 박탈했다. 전국 2천여 행정관서에 대한 보안감사권 역시 폐지했다. 전국 2천여 행정관서에 대한 보안감사권 역시 폐지했다. 안기부 담당자들의 정치 관여에 대해 5년 이하의 징역 · 불법 체포 · 구금에 대해서는 1년 이하 징역이나 5백만원 벌금이라는 엄격한 처벌조항이 마련됨으로써 정치 간섭 역시 철저하게 차단되었다. 앞으로 안기부 예산은 국회에 의해 상당 부분 그 베일이 벗겨질 것으로 전망된다.

 여야가 국회 안에 정보위를 신설하고 안기부 모든 예산의 집행 내역에 대한 실질적 심의가 가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어떤 정권도 예비비라는 명목으로 이른바 통치 유치비라는 쌈지돈을 마련하기 어렵게 되었다.
 민주당은 이밖에도 도청을 금지하는 통신비밀보호법 관철이라는 부수적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는 과거 여소야대 국회에서도 달성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10. 김대통령 야심작 ‘통합선거법’미뤄져
 정치권이 재산공개 ·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의 충격파로부터 채 벗어나기도 전에 선거혁명 가능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김대통령은 8월23일 민자당 원외지구당 위원장들과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실명제 실시에 따른 선거제도의 일대 혁신을 촉구하면서, 영국식 선거 제도를 슬며시 언급했다.

 김대통령의 언급을 전후해서 ‘정치권에 새로운 무혈혁명이 닥쳐온다’는 관측이 무성하게 제기됐다. ≪시사저널≫은 김대통령이 실명제 실시 직후 정무비서실에 과감하고도 전면적인 선거혁명을 이룰 수 있도록 선거법을 개정하라고 지시했으며, 그 골격은 쌍벌죄와 연좌제를 도입하고 선거 비용을 4천만~5천만원선으로 대폭 낮추는 쪽으로 잡혀 있다고 보도했다(≪시사저널≫ 제202호). 대통령이 연말 국회 통과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민자당 당무회의와 의원총회를 거쳐 민자당의 통합선거법안이 국회에 제출된 시점은 11월8일. 법조문 하나하나를 김대통령이 일일이 챙겼다고 알려질 정도로 청와대 쪽의 복안이 그대로 관철된 것이었다. 민자당 내 민정 · 공화계 일부 의원들은 ‘민정계 고사를 위한 정지작업’이라며 의혹의 눈길을 보냈지만, 통합선거법에 담긴 뚜렷한 명분과 시대적 요구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의했다. 집권당이 내놓은 획기적인 통합선거법안에 허를 찔린 민주당은, 정기국회 정치관계법 심의 특위가 본격 가동된 지 20일이 지난 11월24일에야 비로소 당 선거법 개정안을 상정했다.
 김영삼 개혁 1기를 마무리짓는 제도 개혁의 완결판으로 일컫어지는 선거법 개정은 미완의 숙제로 남게 되었다. 예산안 날치기, 쌀개방 여파로 말미암아 양당 간의 이견을 조정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커다란 쟁점이 없는 만큼 통합선거법안은 내년 2월 임시국회에서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시대를 부수고 흔들고 먼지를 터느라 부산했던 한 해. 그러나 ‘표적 수사’‘선택 사정’‘유전무죄’라는 그늘진 측면도 유달리 많았던 한 해가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잉태한 가운데 저물어 간다.
 徐明淑 · 趙瑢俊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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