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성차별 "커피 심부름 거부할 수 있다"
  • 한종호 기자 ()
  • 승인 199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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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사원 이영인 씨 부당해고 승소 전말

새해 들어 세 번째 휴일인 1월16일 각 신문은 일제히 다음과 같은 요지의 가십 기사를 실었다. '입사 11녀째인 한 금융회사 여사원이 상사의 커피 심부름과 남자 사원의 전산 자료 출력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가 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는 내용이다.
이 사건은 곧 우리 사회에 깊게 뿌리 박고 있는 직장내 여직원 차별에 대한 엄중한 경고이자 여직원 지위 향상 운동의 괄목할 만한 개가로 화제가 됐다. 그러나 직장이라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들의 편견과 이를 부정하는 여성들의 비판이 합리적 과정을 거쳐 성숙된 결론을 끌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 같았다.

사건의 개요를 살펴보면 이렇다.
李英仁씨(34)는 81년 7월 이 회사에 입사했다. 이 회사에서는 직원 사원·여자 사원·기원·용원 등으로 구분한다. 직원 정년은 만55세로 규정하고 있지만, 여자 사원이 결혼한 때에는 사직원을 수리하여 의원면직하도록 규정해 놓았다. 그래서 여사원은 결혼하면 관례적으로 사직원을 제출했고, 장기근속 여사원은 경영진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여사원 임금은 같은 직급 남자 사원보다 낮고 대리직(4급) 이상으로 승진하기도 불가능했다. 또 여사원은 남자 사원보다 약 30분 가량 일찍 출근하여 청소하는 것이 관례였다.

미혼인 이씨는 징계 당시 11년 근속중이었다. 그는 대개 남자 직원들과 같은 시간에 출근했고 상급자나 남자 직원의 잔심부름을 소극적으로나마 거부했다. 단체협약에 산전·산후 휴가와 여직원의 승진권 보장 조항을 넣으려고 애를 썼다. 그는 상사나 동료 직원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은 것 같지는 않다.

92년 1월에는 영업부의 한 남자 사원이 여사원에게 자신의 당첨된 즉석식 복권을 은행에 가서 바꿔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다가 이를 거절하는 여사원에게 욕설을 퍼부은 사건이 발생했다. 여직원들은 고작 '1주일간 청소 거부'로 반발을 표시했지만 결과는 장기근속 여사원 3명의 부서 이동으로 나타났다. 92년 11월 5일 이씨는 전산출력을 해오라는 부서 상급자의 지시를 묵살했다. 자기는 타이프를 치고 있었고, 전산출력은 누구나 할 수 있는데 다른 남자 사원은 두고 유독 여사원인 자기에게만 시키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해서였다.

다음날 또 다른 상급자가 전날 했어야 할 일을 지연시켰다는 이유로 이씨를 불렀다. 그가 이씨를 일곱 번이나 불렀지만 이씨는 대답을 하지 않고 전화만 하고 있었다. 격분한 상급자는 결재판을 책상에 집어 던지고 "야,○○아, 내 말이 말 같지 않아"라고 욕설을 하고 이씨에게 달려들어, 수화기를 들고 있는 쪽 빰을 때리고 이씨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이씨도 질세라 "야, 쳐봐. 나도 이제 남은 것은 악밖에 없다"고 반말을 하며 대들었다. 이 날짜로 회사측은 이씨에게 무보직 발령을 내렸다. 이씨는 항의의 표시로 출근부에 열흘간 도장을 찍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도 과거와 연속된 업무, 일부 여사원들의 관행적으로 해 온 커피 심부름과 청소 등은 계속 했고, 회사측에 물의를 일으킨 점을 사과하기도 했다.

회사측은 92년 12월 징계 위원회를 열어 이씨에게 무기정직 처분을 내렸다. 93년 3월 회사는 다시 인사위원회를 열고 "이씨가 그동안 반성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부 기관을 찾아다니며 구직운동을 하고 동료 및 후배 여직원들에게 자신의 비행을 합리화하는 발언을 하는 등 개전의 정이 없다"는 이유로 그를 해고했다.

동료 직원들은 이씨의 파격적 행동이 '보편적 관례를 무시하는, 조직에 부적합한'것으로 느끼는 것 같았다. 한 남자 직원은 "탄원서에 서명은 했지만 이씨를 지지해서가 아니라 해고의 선례를 남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 동료 여사원은 "어는 직장에서나 업무 외의 일을 맡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항상 여사원의 몫이었다. 이씨가 조직에 불필요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그런 일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해고가 확정된 뒤 노동부에 중재신청을 냈지만 회사측의 해고사유가 정당하다는 답변을 받자 법원에 해고무효 확정소송을 제기했다. 94년 1월 13일 서울 민사지방 법원 합의 41부는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회사가 이씨를 징계하면서 단체협약에 규정된 '노조와의 합의'를 거치지 않은 것은 절차상 무효 사유이고, 이씨가 상사들이 불러도 대뚜하지 않은 행동은 "여사원을 차별하고 피고 회사의 관행 하에서 축적된, 장기근속 여사원으로서의 불만과 피해의식이 감정적·우발적으로 표출된 것"이라는 취지에서 이씨에 대한 무기정직처분은 징계권 남용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이씨나 회사측은 이번 사건이 직장내 여사원에게 합당한 권리와 의무가 어느 선에서 획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일반적 질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회사는 이씨의 '개인적 결합'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점을, 이씨는 자신의 정당한 행위에 대한 회사측의 징계권 남용만을 되풀이 강조했다. '법원은 소송에 나타나지 않은 증거는 판단하지 않는다'는 법률적 사고에 따라 움직이는 재판부는 진실과 법리 사이를 서성거려야만 했다.
복직이라는 전리품을 어렵게 움켜쥔 이씨는 오히려 회사측을 자극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다. 이씨는 자신의 행동에 더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판결이 난 며칠 후 이씨를 만나자 그는 "이쯤에서 끝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직장내 여사원에 대한 차별과 부당한 대우도 없어지지 않았다. 소송의 진정한 쟁점은 여전히 남아 있다.
韓宗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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