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대명리 ‘두레’ 50년만에 되살렸다
  • 충남 논산·이문재 기자 ()
  • 승인 1992.07.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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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주관 / 황헌만·주강현씨 발굴



농민 공동체문화의 핵심… 현대화 시급
 지난 6월 초순, 충남 계룡산 일대의 민속을 답사하던 사진작가 황헌만씨와 민속학자 주강현씨(경희대 민속학연구소·한국역사민속학회)는 계룡산 국사봉 남쪽 자락인 충남 논산군 상월면 대명리에 두레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오래 전부터 두레의 옛모습을 발굴하게 위해 촉각을 곤두세워왔기 때문이다. 두 전문가는 마을 노인들을 찾아가 1차 자료를 수집한 끝에 그 재현이 가능하다고 판단, 이를《시사저널》과 공동으로 복원하고 기록하기로 했다.

 다른 민속들도 그러하지만 두레는 지금 그 ‘원형’을 담아놓지 못하면 영원히 사라자고 만다.두레는 쌀농사를 짓는 농촌지역 공동체문화의 핵심이었고 그래서 흔한 풍경이었지만,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우리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큰 관심을 가져온《시사저널》은 사진집《장승》등을 펴낸 바 있는 사진작가 황헌만씨와 조사·고증을 맡은 소장학자 주강현씨와 함께 지난 17일 논산군 상월면 대명리1구를 찾아 그 원형을 되찾았다. <편집자>

 

 ‘神農道業’이라고 씌어진 대형 농기를 잡고 가는 박재규씨(58)는 무진 애를 먹었다. 세가닥 새끼줄을 잡은 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농기를 곧추세웠지만, 솔밭 옆 논배미로 가는 길에 무슨 놈의 전깃줄이 그리 많은지, 4백여m 남짓한 그 길에 농기를 대여섯 번은 뉘어야 했다. 장마비를 가득 머금은 깃발은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다. 농기를 가로막는 전선들은 다름아닌 농기로 상징되는 두레와, 두레로 집약된 농민공동체를 망가뜨린 ‘주범’이 아니었던가. 산업사회의 에너지인 전기가 들어오면서 농촌은 맥없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김매기할 논의 두렁 옆에 농기를 세우고 한바탕 풍장(농악)을 치고, 그 소리에 어깨를 맞추며 촌로들은 한마디씩 거들었다. 한사람이 “원래 한잔씩 해장을 하고 논에 들어가는 겨” 하자 마을 아낙들이 뒤따라 이고 온 막걸리 동이를 마을 사람들이 둘러쌌다. 안주는 딱 두가지였는데 오이와 풋고추를 고추장에 찍어 베어무는 것이었다. 옛날 두레에서도 꼭 그랬다.

 여기저기서 농지거리가 터져나왔다. 다시는 못볼 것만 같던 두레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흥분 때문이었을까. 누가 “재원이네 논 매주니까 오늘 돼지 한마리 잡아라” 하니까 그 말을 받아서 “벼에 대궁 생길 때니까 잘혀”한다. 또 다른 이가 “아녀, 두레는 벼 밟는 거야. 괜찮여”라고 맞받는다. 입가에 묻은 막걸리를 손으로 쓰윽 훔치던 이가 “걱정말여. 자기 것 아까우면 남의 것 아까운 줄 다 알여. 괜찮여” 라고 매듭을 짓는다. 막 풍장패가 논배미로 들어가려는 데 좁은 농로를 꽉 채우며 굴러오던 버스가 섰다. 구경꾼 몇이 아쉬운 듯 버스에 올랐다. 그 버스 옆 면에는 ‘삼보컴퓨터 논산대리점’ 광고가 붙어 있었다.

 취재팀은 지난 16일 논산으로 달리면서 조마조마했다. 남쪽으로 기웃거리던 장마전선이 기어이 계룡산 일대를 점령하고 장대비를 내리꽂기 시작한 것이다. 굵어만지는 빗줄기와 천둥소리를 들으며 이번 두레 재현에 앞장선 유병일씨(71·노인회장) 집에서 대명리 내력을 들었다.

 계룡산 국사봉과 향적산 남서쪽 자락을 밝고 있는 대명리는 여섯 개 마을 1백30여호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 뒤편은 계룡산이 막아주고 마을 앞뒤로 개울이 흐르는데 이곳에선 ‘앞갱변’ ‘뒷갱변’ 이라 부른다. 여섯 마을은 볕바우(양암) 강거름(강 입구) 벌듬(벌판) 깊은 구렁(함덕굴·범을 잡으려고 함을 팠다는데서 유래) 검은점(검동·거문고를 뜯는 마을) 긴등 같은 옛이름을 갖고 있고 지금도 그렇게 불린다. 

 대명리가 두레에 관한 탁월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데에는 몇 가지 까닭이 있다. 우선은 교회에 다니는 집이 서너 집밖에 없을 만큼 외래 종교에 대한 ‘항체’가 강하다. 반면 유교문화의 맥을 잇는 儒道 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은천·박병두씨처럼 유도를 받드는 집이 10여가구나 된다. 시월 상달에 마을 전체가 참여하는 산제를 매년 이어오는 것도 우리 것에 대한 감수성의 화석화를 어느 정도 막아주고 있다.

 또 하나는 논산이 당초부터 풍물이 센 지방이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논산군은 향토축제인 ‘놀매축제’를 격년으로 한바탕씩 벌인다. 대명리 풍물은 예로부터 근동에서 알아줘서 대명리 풍물패가 면 대표로 나간다. 그러고 계룡산이라는 ‘풍수지리’가 밖의 문화보다는 토착적인 것에 대한 자력을 강하게 하지 않았는가 생각할 수 있다.

 

87년된 ‘神農道業’ 가로 두레기

 그러나 두레 재현이 가능했던 원동력은 지금도 변함없는 이 마을의 인심이다. 인심은 더불어살기의 핵심이다. 대명리에서는 한길가에 쌀가마니를 놓아둬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고, 인삼밭이라고 특별나게 지키는 일이 없다. ‘내 것이 아까우면 남의 것도 아까운 법’이라는 공동체의 불문율이 엄존하는 것이다.

 대명리에서 소리 하면 대뜸 손꼽히는 박명종씨(64)는 “마지막으로 두레를 본 게 30년은 족히 된다”면서 이 마을 농기가 요즘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가로로 길게 내려진 기가 아니고 거기에 씌어진 글씨도 다르다는 것이다. 민속학자 주강현시는 귀가 번쩍 뜨였다. “기가 가로로 생겼고 ‘신농도업’이란 글씨를 써넣었는데 하두 오래돼놔서 누더기”라고 박씨가 말하자 주씨는 “아, 그게 진짭니다”라며 민속경연대회에 나오는 농기와 비교했다.

 주씨에 따르면 예전에는 세로기보다는 가로기가 많았고 기의 세 테두리를 장식하는 '지네밭‘이나 깃대 꼭대기를 꿩털로 모양을 내는 ‘꿩장목’같은 것으로 한껏 멋을 내었다. 용을 그려넣은 농기도 많았고 그냥 農 자 하나를 큼지막하게 써넣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전까지 그중 많았던 게 神農遺業 혹은 신농도업이라고 쓴 가로기였다. 대명리 두레기는 87년 전인 1905년 만들어진 것이었다.

 

“옷만 빼면 옛날 두레 그대로인 겨”

 노인회장 유병일씨는 황헌만·주강현씨가 달포 전쯤 다녀간 뒤로 쉰이 넘은 ‘늙은 농사꾼들’을 불러모았다. 그 아래 나이의 농부들은 두레에 대한 기억조차 없거니와 기실 마을에 젊은이가 없기도 했다. 뜻밖에도 마을의 호응이 있었다. 세 차례 모여 입을 맞추었는데 외창(함께 노래를 부를 때 나오는 틀리는 소리)하는 한 사람을 빼면 이내 50여년 전 두레놀이를 소리와 몸짓으로 풀어냈다. 7월17일이 가까워지자 이웃 동네에서도 구경을 오겠다고 했다.

 이튿날인 17일, 호남 지방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렸고 뒤편 국사봉은 비구름에 머리를 감추고 있었다. 비는 여간해서 그칠 것 같지 않았다. 이른 밥을 먹고 유회장 집에 모은 ‘늙은 농부’들은 “아무리 장마라 해도 한두 시간은 비가 그칠껴”라며 웃는 낯이었다. “아, 옛날에는 억수 같은 비 속에서도 두레를 맸잖여” 하는 80줄 노인의 말을 듣고 취재팀은 한숨 놓았다.

 이 마을로 이사온 지 56년째된다는 이종식씨(80)가 “50년 만에 기들고 김맨다”는 그 두레는 간밤에 새끼줄로 맨 깃줄을 들고 나서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원래는 지금 방앗간 자리에 있던 세 그루 정자나무에 깃대를 세우면 한집도 빠짐없이 나오던 두레였는데, 그 정자나무가 없어지고 말아 50여년 만에 두레농기로 쓰이는 깃발이 마을 공토에 세워졌다. 군데군데가 슬어버린 농기는 높이 4m가량 되는 대나무에 매달렸고 꽹과리 하나, 장고 둘, 북 하나, 징 하나가 쳐대는 풍장이 계속됐다.

 대명리 사람들은 두레를 재현한다고 무명옷까지 준비했으나 황헌만·주강현씨의 만류로 평소 입는 옷차림 그대로 나가기로 했다. ‘의사 가운처럼 하얀’ 무명옷을 입고 논에 들어가면 민속경연대회와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이다. 황씨와 주씨는 “옛날처럼 그대로 하시라”고 누차 주문했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조화 강조

 대명리는 여섯 마을이지만 두레는 하나로 조직되었다. 두레의 우두머리는 좌상으로 그날 일을 명령하고 통제한다. 두레는 논농사의 가장 힘든 대목인 김매기에서 비롯된 것인 바, 하지 전 모내기를 한 뒤 보름 뒤에 초벌 김매기를 한다. 이 초벌매기 직전에 두레가 모아진다. 초벌매기(아시)는 흙을 호미로 찍어 뒤집는 일이다. 그 10일 이내에 두벌(이듬)을 매고 세 번째 김매기인 만물은 두벌은 끝내고 10일 뒤에 한다. 이번에 재현한 두레는 만물 두레로, 논물을 빼서 손으로 마구 문대는 식으로 김을 맸다.

 빠르게 북상하는 장마는 계속 비를 뿌렸다. 이날 좌상을 맡은 박만종씨(논산군 노인 회장)는 농기를 솔밭 옆으로 옮기고 나서 두 논배미를 가리키며 김매기를 지시했다. 풍장이 논으로 들어가 풍장을 치면 논둑에 일렬로 섰던 20여명의 농부가 논으로 들어서서 김을 매는데 금세 반달모양의 대형을 이루면서 선소리꾼(박명종씨)의 소리를 받아넘긴다. 이때 하는 소리를 ‘바심(지심)소리’(김매기 노래)라 하는데 선소리꾼이 “왔나” 하면 일꾼들이 “왔네” 한다. 이어 선소리가 “아하헤에” “참나무 괴상에” “발받쳐 놓고서” “닭잡고 술먹자” 하면 일꾼들이 이 소리를 그대로 받아준다. “헤어야 헤에야 오호라 디어아 헤에” 대목은 선소리꾼과 일꾼들이 같이 하고 “저 건너 남메봉” “뒤돌아 들온다” “풍물을 하여라”쯤에서 끝난다.

 대명리에서는 호미로 김맬 때 부르는 노동요로 ‘올카사니’가 있는데 “얼카사니야” “얼카사니야” “오작교 다리가” 하는 식으로 선소리가 나오면 일꾼들이 따라한다. 각 논배미의 김매기는 ‘쌈소리’와 함께 끝난다. 풍물이 빠져나가면 반달모양의 대형이 원을 그리고 “우이 하아, 우이 하아”하는 ‘후이 소리’(쌈소리)를 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두레를 매러가다 이웃 두레와 마주치기도 했다. 큰 두레를 만난 작은 두레는 농기를 숙여 인사를 했는데 이때 인사가 불손하면 두레싸움이 일어났다. 이 만물 두레가 끝나면 한해 농사는 거의 다 지어놓은 것과 마찬가지여서 7월 백중이면 두레가 다시 모여 농기 아래서 하루종일 먹고 논다. 그 대표적 무형문화재가 ‘밀양백중놀이’이다.

 대명리 두레는 예전처럼 집굿으로 끝났다. 유병일씨 집으로 들어간 풍물은 마당과 장꽝(장독대), 부엌 그리고 우물에서 풍장을 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두레는 힘겨운 논농사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과학’이었지만, 옛사람들은 이를 논에서 끝내지 않고 마을과 집안으로 연결시켰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조화를 강조한 것이다.

 

두레, 형식 사라졌지만 정신 거듭나고 있다

 유회장 집에서 두레를 재현한 일꾼과 이를 구경온 마을 사람들을 합해 1백50여명 넘게 모였다. 유씨는 “날씨가 좋았으면 수백명은 족히 왔을 것”이라면서도 험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레를 마쳐 흡족한 듯했다. 바로 잡은 돼지고기와 막걸리, 그리고 국수가 연신 큰상에 차려졌다. 방이 모자라 옆집으로 잔칫상들이 들려갔다. 그 옛날 백중놀이가 이날 미리 치러진 것이다.

 “민속경연대회에 두레가 많이 나오지만 그것들은 연출된 것이다”라고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주강현씨는 공설운동장에서 연출에 의해 김매기를 ‘공연’하는 것과,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억을 되살려 실제로 논에 들어가 김매기를 하는 것과의 차이는 매우 큰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재현은 농기의 원형과 김매기의 마지막 단계인 쌈싸기, 그리고 다양한 노동요의 발굴 등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50여년 만에 복원된 대명리 두레는 소박한 것이었지만 원형에 가깝고 두레나 농요 그 자체가 뛰어나다”고 주강현씨는 평가했다.

 50여년 전의 두레를 재현하여 오늘의 농촌 현실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동체정신, 일과 놀이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두레정신은 많은 연구와 논의를 거쳐 현대화해야 한다. 이미 가톨릭이나 기독교 일부에서는 두레를 원용한 공동체운동이 시도되고 있고, 환경문제를 걱정하는 이들도 두레의 현대적 적용을 통해 농약 피해를 막고 생태계를 되살려야 한다고 제안한다. 노동 문화나 사회운동 분야, 그리고 농산물 유통쪽에서 두레에 관한 연구가 많았음은 물론이다. 두레의 형식은 사라졌으되 그 정신은 거듭나려는 채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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