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대북정책 부드러워진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1994.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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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 획기적 관계개선 담은 유화책 마련… 상황 따라 단계적 추진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것을 주내용으로 하는 대북 유화책이 지난해 연말 정부 당국자들에 의해 마련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당시 정부의 유화책은 북한 핵 문제가 발생한 후 강경일변도로 치달아왔던 데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북한과 국제원자력기구 간의 협상 타결 이후 이방안의 가시화 여부와 관련해 주목된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에 대해 “정부는 올해 더 이상 북한 핵 문제로 인해 남북관계가 악화해서는 안된다는 판단 아래 그동안의 대북정책 기조에 대한 전면적인 방향 전환을 시도한 바 있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그동안 이러한 정부의 대북 관계개선 구상이 북한과 국제 원자력기구 간의 뜻하지 않은 마찰로 잠시 수면 아래 잠복돼 있긴 했지만, 이제 이런 마찰이 해소됨에 따라 앞으로 핵문제 해결 과정을 지켜보면서 점차 표면으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북정책 전환 내용과 관련해 이 관계자는 “핵문제 이후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가 되었던 연계 정책의 고리를 풀겠다는 것과, 동시에 그동안 중단됐던 대북 경제교류를 재개하겠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남북관계 개선의 실질적인 내용들은 지난 92년 2월 발효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에 대부분 들어 있는 만큼, 내용 자체가 새롭다기보다는, 핵문제에 의미있는 진전이 이루어질 경우 단계적으로 대북 유화책을 발표하겠다는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또 “문민 정부가 출범한 후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온건론과 강경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나, 올해 들어서는 더 이상 남북관계에 긴장이 지속돼서는 안된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정부 내의 새로운 유화 분위기는 미국과 북한 간의 핵협상 과정에 투영돼 있는 남북 간 협상 과정에서 일단 우연한 형태로 가시화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북한 핵을 둘러싼 핵 담판은 미국과 북한 간의 협상을 주축으로 하되, 당사자주의라는 원칙으로 남북 특사 교환과 남북 상호 핵사찰 문제가 각 단계별 진전의 전제 조건으로 되어 있는 특사교환과 관련해서는 그동안 세차례 실무회담을 통해 합의서 초안까지 마련한 만큼 몇군데 자구 수정만 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다만 의제와 관련해 상호 핵사찰과 핵통제위원회 재개를 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우리측 안을 완화하는 문제가 정부 내에서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핵금조약 복귀 확인되면 표면화 할 듯
 또한 미·북한 3단계 회담 이후 실시하게 되어 있는 상호 핵사찰 문제에 대해서도 상당히 유연한 접근 방법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미국측 협상대표인 갈루치 차관보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호 핵사찰 형식은 유지하되 실질적인 내용은 북한측 주장을 받아들이는 방안을 비공식 경로로 정부에 제안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이런 방식은 현재 정부가 고려할 수 있는 가장 완만한 수준의 접근 방법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대북 유화책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시점은, 미·북한 3단계 회담이 이루어지고,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 복귀가 확인되는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빠르면 3월 중에도 가능할 것으로 정부는 보고 있다. 또한 미국과 북한이 4단계 회담을 통해 국교수립을 논의하고, 특사 교환 정례화가 이루어지는 6월께가 되면, 남북정상회담 문제를 포함해 전면적인 대북관계 개선책이 공표될 수 있을것으로 판단하고 있기도 한다.

 지난해 연말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 획기적인 대북관계 개선책이 마련됐다는 사실은 다른 경로로도 확인되고 있다.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핵사찰을 수락한 뒤인 지난 17일 상공자원부는 기자회견을 통해 “정부는 핵문제가 해결되기 전이라도 의미있는 돌파구가 마련되면 한국 기업인의 방북을 허용하고 소규모 시범 사업에 대한 대북투자를 추진할 방침”이라고 밝히면서 이는 이미 지난해 확정 해놓은 방침이라고 설명해 이같은 사실을 뒷받침했다. 또 민족통일연구원의 한 관계자도 이같은 내용을 확인하면서 “문민 정부 출범 당시 정부는 남북관계에 대해 상당히 의욕적이었다. 그동안 핵문제로 인해 안보 논리가 우세했었는데, 지난해 연말을 계기로 출범 당시의 기조로 복귀한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국내 정치 상황·북한 동향과 밀접
 정부가 대북 유화책을 마련하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주·객관적인 요인이 있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객관적인 요인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난해 12월29일 미·북한 간에 있었던 ‘소 일괄안’형태의 핵문제 타결이었다. 또한 지난해 연말 북한 최고인민위원회의 경제정책 실패 인정, 나진·선봉 등 경제특구 확대와 경제개방 관련 20여 법안에 대한 재정비 등으로 미루어보아 북한이 핵무장보다는 경제건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판단하게 된 점 등이 꼽히고 있다.

 이런 객관적 요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국내 정치적인 요인이었다. 특히 올해 국정운영의 최대 목표가 경제 회생 및 국제경쟁력 확보라는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핵문제로 인해 남북관계가 더 이상 악화하면,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이후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제사정이 악화돼 정부의 국제경쟁력 확보 노력이 무산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강하게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몇차례 위기 국면을 겪으면서 그동안의 강경책이 아무런 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위기만 심화시켰던 데 대한 자체 반성도 제기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정부의 통일정책에 깊이 관여하는 한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주최하는 각종 대책회의에 참여해 보면 그동안 강경했던 인사들의 입장이 상당히 완화된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 사찰을 수락한 이후 낙관론75%, 비관론 25%로 상황이 반전됐다. 그러나 앞으로 중요한 것은 25%의 비관론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말한 25%의 비관론이란 북한의 예측 불가능한 태도로 인한 상황 돌변 가능성과 이에 따른 정부 안팎의 보수적 흐름의 재등장이다. 그러나 북한 핵문제 및 남북관계는 앞으로 다소 우여곡절을 겪을 수는 있어도 ”이전의 위기 상황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상상한기 어렵다“라고 이 관계자는 말했다.
南文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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