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일본 노래 마음껏 부릅시다”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3.0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가수 계은숙 ‘엔카 콘서트’는 개방 신호탄 지레 겁먹기 전 문화 체질 강화해야

일본에서 활동하는 가수 桂鎭淑(33)이 자신의 일본 가요계 데뷔 10주년 기념 디너쇼를 2월26일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기로 했다. 고국의 관객 앞이 아니라 서울에 관광온 일본인 4백명을 대상으로 한 콘서트이지만, 그와 그가 소속한 일본 ‘다이이치 프로덕션’으로서는 매우 감회어린 무대이다. 아무리 애쓰고 기다려도 열리지 않던 ‘서울의 무대’를 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 공연의 베인 타이틀은 ‘Sing in Seoul’이 되었다.

 광복 이후 정부에서 공식으로 허가를 내준 최초의 일본 가요 콘서트라는 점에서 계은숙 콘서트는 한국에서도 특별한 관심을 모은다. 그것은 이 무대가 한국에서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이 어떤 모양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모법적인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이번 한번만…”
 계은숙이 고국에서 무대를 갖고 싶은 열망과, 일본이 한국에 문화 시장을 갖고 싶은 욕망은 매우 닮아 있다. 이미 성공한 자로서의 자신감, 거부당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는 처지도 공통적이다.
 공연 허가를 내준 문화체육부 관계자는 빗발치는 항의에 대해 ‘한국인을 상대로 하지않는다는 조건으로, 예외적으로, 이번 한번만이라는 전제로’ 허가를 내준 것이라고 답변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의식한 탓인지 행사 후원자로 알려진 롯데호텔측은 ‘관객에게 음식만 제공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한국측 기획자인 전국관광여행사도 보도를 꺼리고 있다. 이 역시 일본 대중문화가 한국에서 지하 시장을 형성해 나가는 분위기를 전달해 준다.
 전국관광여행사 국제관광부의 朴應祥상무는 올해가 ‘한국 방문의해’임을 들어 새로운 형태의 관광 상품으로서 계은숙 콘서트를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70% 이상을 일본 관광객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나라 국제관광 정책을 감안할 때, 일본의 유명 가수를 서울로 데려다 관광객을 몰아오는 것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계은숙 콘서트에 ‘일본 가요계 데뷔 10주년’ ‘한국 방문의 해 기념’이라는 것외에 ‘한·일회담 30주년’이라는 타이틀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개방불가피론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문화 개방을 자주 쌀시장 개방에 비유한다. 정치적 입장 때문에 자기 자신도 믿지 않는 말로 시간을 낭비한 정부와 언론, 지식인들이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최근 孔魯明 주일대사의 개방 발언과 함께 터져나온 시비와 논란은 한·일 정상회담이나 삼일절 즈음이면 으레 재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쌀시장 개방을 경험한 사람들은 이번 논란의 마무리 과정에 좀더 깊은 관심을 내보이고 있다. 그것은 더이상은 ‘당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것, ‘양키 문화’ 의 오염을 견뎌내고 있는 한국이 일본 문화의 오염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인가에 대한 검증 등으로 압축된다.

 최근 한양대 리영희교수는 한 기고문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부정적·폐쇄적 문화관으로 일관해온 사람들에게 지금 옛 공산주의 사회의 영화들이 던져주는 감동은 얼마나 신선한 것이냐” 하고 되물으며 문화적 접촉은 많을수록 좋다고 결론짓고 있다.

 리교수의 발언은 이번 문화시장 개방을 둘러싼 수많은 언설과 논의 가운데 가장 도드라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 자신 누구보다도 일본에 대해 엄혹한 자세를 견지해온 인물이라는 면뿐 아니라 일본 대중 문화를 미국 문화와의 연계 속에서 파악하면서 ‘더위해하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모르니까 ‘밀수품’ 범람
 일본 생활을 오래 해온 작가 韓水山씨는 최근 불거져나온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한 논의를 유심히 지켜보면서 화도 나고 어이도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수많은 토론자나 기고문 가운데 일본 대중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고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을 발견한 것이다. 예를 들어 이들 사이에 가장 널리 유포되어 있는 사무라이 영화의 잔혹성과 그 감염력, 그리고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신화에 대해 그는 “요즘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영화를 만들지 않으며 구로자와 감독이 대열에서 뒤떨어진 지는 이미 오래”라고 잘라 말한다. 한씨의 지적은 우리가 문제의 일본대중 문화를 알고 있는가 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해 준다.

 金容雲 교수 (한양대·수학과)는 우리 학생들을 일본에 보내놓으면 아예 ‘미쳐버린다’고 말한다. 그는 학생들이 압도 당하는 것은 일본 문화가 우리보다 우월해서가 아니라 ‘전혀 몰랐던 것을 만나는 충격’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이미 ‘밀수품 일본 문화’가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스며들고 있으나 정상적인 관찰의 대상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와 대학은 어떤가. 한 문화 평론가는 광복후 배타적 한·일 관계의 흐름속에서 일본 전문가를 배출해내지 못한 대학 현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판을 제기한다. "대학은 이와 같은 민족의 진로에 대한 당면과제 앞에서 대답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대학들은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김용운 교수는 자기가 전공하는 한국 수학사의 예를 들면서 “한국 수학사를 공부한 한국인 학자는 10명도 안되는 데 반해 일본 학자는 40명이 넘는다”라고 말한다 서울대의 경우 교수 2천여명 가운데 일본학 전공자는 동양사학과의 김용덕 교수 한사람뿐이다. 서울대 밖의 교수까지 합해야 모두 10명이 채안된다. 安秉直 교수(서울대 경제학)에 의하면 일본의 한국 전공자는 모두 5백명 가량이나 된다.

 김용운 교수는 “국립 서울대에서 일어과신설을 두고 교수 간에 수년간 격렬한 찬반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서울대가 지나치게 국수주의적인 4·19 세대에 의해 장악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각 세대마다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을 놓고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안교수는 ‘세대와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인 대부분이 일본에 관한한 비슷한 태도를 갖고 있으며 그것은 학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기 싫다고 눈 감으면 뺨 맞는다”
 그는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발전의 동인은 개방에 따르는 문화적·경제적 종속의 위험을 압도할 것이다. 보기 싫다고 눈 감고 있다가는 결국 뺨을 맞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러나 한·일간 대중 문화 자본이 경쟁을 시작하고, 대규모 상업자본으로 무장한 일본자본이 들어올 경우 우리 문화는 초토화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는 개방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있다. 특히 문화 침투를 통해 아시아 패권을 차지하려한다는 의심의 눈초리는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좀체 거두어지지 않고 있는 편이다.

 소련과학아카데미 세계문학연구소의 김영호 교수는 “과거는 덮어두고 미래지향적 관계를 구축하자는 일본의 제안은 거부당하고있다. 일본이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맞게 국제 공헌을 하려 해도 아시아 국가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이유 있는 일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조용필의 ‘아시아는 하나’와 같은 캠페인성 국제무대 역시 아시아 맹주 사상을 이끌어가는 일본의 기획상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용운 교수는 ‘아무리 일본이 원한다 해도 대중이 호응하지 않으면 상품 가치는 없다’고 전제하면서, 이와 같이 주장하는 배후에는 우리 문화의 경쟁력에 대한 지나친 자기비하와 일본문화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가 숨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한국인의 체질상 일본 문화는 거부당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면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못 박고 있다. 김교수에 의하면, 가장 일본적인서민 문화라 할 수 있는 가부키·노·다도 등은 우리에게 역겨움의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이는 “일제 36년 간의 지배 속에서 이미 곁증이 끝난 사항”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의 근원 정서가 다르다는 관찰은 우리 문화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주요 단서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작가 한수산씨는 “풍요 속에서 성숙해온 일본문화 속에는 우리와 같은 한 (恨)의 정서가 없으며, 우리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는 것에 심각해하는것이 일본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가 경계할 대상으로 삼는것은 결국 일본의 상업주의 문화라고 보고 있으나 이 역시 일본고유의 문화가 아니라 개화기 이래 일본인들이 받아들인 서양 문화의 일본식변용에 불과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일본 식으로 변용된 미국 문화는 이미 우리가 50년간 경험해온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이 상업적 대자본과 기술력이다. 우리 문화자본의 경쟁력은 이들 앞에서 정말 무력한 것일까.
 안병직 교수는 이 질문에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는 자국 기업 중심의 한국이 이미다국적 기업을 이겨낸 경험을 예로 들면서 “오히려 이 때문에 투자가 안되고 기술개발이 늦어지는 측면이 있다”라고 말한다. 즉 일본 대중 문화의 국내 투자를 유도하고 기술개발을 통해 문화 체질을 강화해야 한다는것이다. “세계에서 민족 감정이 가장 강한 것이 한국인이다. 동남아에서 차이나타운이 없는 곳도 한국뿐이다”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남은 문제가 ‘정책 선택’이라고 입을 모은다. 무엇을 열고 무엇을 막을것인가. 선별적 개방 또는 단계적 개방으로 지칭되는 개방 정책의 핵심 대상은 영화 및 비디오, 가요 및 음반, 출판, 미디어 부문이다 이중 일본 대중 문화와 비교하여 가장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미디어 즉 방송 부문이며, 비교적 여유를 보이는 부문은 영화이다.

개방은 감정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
 유학생인 李虎榮씨(일본 上智大 신문학과 박사과정)는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개방될 경우 가장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는 “내가 서울서 보던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모두 일본 것들이었다”면서 일본 베끼기로 일관해온 우리나라 방송사들의 경쟁력을 개탄하고 있다. 그는 “일본에 와서 보고 가장 실망한 것은 영화 부문”이라고 전제하면서 1년에 백여 편씩 제작되지만 볼만한 고급 영화는 한두 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일본 영화가 세계적 수준이라는 국내소문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문공부장관을 지낸 李元洪씨 역시 “극영화는 합작 형태를 거치면서 단계적으로 개방할 수 있겠으나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열어서는 안된다”라고 주장한다. 특히 영화 방영은 제한하되 가요 방송은 엄격히 금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방송의 경우 이미 위성방송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선택사항이고, 3개 방송사에서 공식적으로 송출할 경우 문제가 심각해진다는 것이다.

 한수산씨가 가장 염려하는 분야는 출판시장이다. 그중에서도 만화에 관한 한 경쟁력은 거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대부분 영역에서 질이 낮은 것들은 일시적 수요를 보이다 곧 시들해질 것으로 본다 문제는 일류급이다. 예술가로서 존경받는 일본 만화가들의 작품이 한국말 대사, 고급인쇄기술로 제작되어 국내에 시판될 경우 우리 만화의 싹은 잘려나갈지도 모른다.”

 일본 문화 개방에 대한 저항은 결국 일본문화 자본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그 저항의 기본이 되는 것은 그들의 존재 양식을 모른다는 데에 깊이 연유하고 있다 지금까지 경제·문화에 관한 한 역차별을 고수해 왔으나 대일 역조는 산더미처럼 큰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과거 30년간 한국 고도성장의 필수 조건은 국제화·개방이었으며, 그 전제 조건이 없었다면 민주화 정착조차 자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은 식민지였다가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한 가장 전형적인 국가인 한국을 통해 세계사의 새로운 동태를 파악하려 하고 있다. 도쿄 대학은 이미 지난해에 한국학 전공학자들로 구성한 한국 연구 코스를 열었다. 백년전 우리 선조들의 독립운동은 도덕적으로 정당했다. 그러나 전후의 국제법 질서는 그 ‘마음 속의 장벽’이 자연 해체되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있다. 전후와 전전의 한·일간손익계산서는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고 준비해야 하는지를 지시하고 있다. 이제 일본 문화에 대한 개방은 민족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비즈니스 문제’로 대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