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銀의 자전소설《나,高 銀》이 민음사에서 나왔다. 이 자전소설 세권에서, 고 은 산문 문체는 그의 문체의 힘이 절정에 달했던 시절, 말하자면 그가《노래의 社會史》(1972.한국일보사)《이중선 評傳》(1973.민음사)《韓龍雲 評傳》(1975?민음사)《濟州道》(1975.일지사) 같은 산문들을 봇물 터뜨리듯 쏟아냈던 시절 문제의 힘에 닿아 있다.
고 은의 문체는, 여전히, 이 세계의 무질서를 무질서로서 수용하려는 열정으로 들끊고 있다. 그는 삶의 아비규환에 문법을 부여함으로써 문체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무질서에 문법을 내맡김으로써 문체에도 달한다. 그의문체는, 대상을 정조준해서 격파하는 이어령의 관통력이나, 대상에 몸 비비며 스며들어 대상의 속살을 주무르는 김 현의 삼투력, 혹은 이성과 감성의 평화로운 접점 위에 문체를 세우는 김화영의 단정한 인문주의적 교양과도 다르다. 그의 방대한 페이지 속에서 그의 문체의 힘이 응축되어 잠언적 결구에 도달하는 대목들에서도 그의 문체는 논리적 명증성이나 관통력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생의 실존적 열정과 충동을 보여준다.
고 은은 다만 자신의 감성과 체험에만 의지해서 무질서의 극을 향해 떠돌고 헤매려는 문체의 넋을 단속한다. 그는 사물의 인후를 조준하는 명중률 높은 언어가 언어와 사물간의 거리 위에 설치하는 조준선 위에서의 긴장과 떨림을 어느 정도 사양하는 대신, 언어의 관통력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새로운 문체의 마당을 열어내는데, 그 마당에서 그는 세계의 무질서를 육친화(肉親化)해낸다. 아마도 고 은이 이룩해내는 육친화 속에서는 50년대 명동 페허 위의 모더니즘과 60년대의 종로3가 사창가와 70년대의 긴급조치와 80년대의 군사법정은 동일한 절대값을 지닐 터이다. 그는 시대의 야만과 절망까지도 마침내 육친화해 버리는 것인데, 그 열정적인 육친화에 의하여 그는 자신의 개인사와 시대사를 접합시킬 수가 있었다. 또 개인사와 시대사를 접합시키는 열정 속에서 그의 생애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 지향성에 의해 염색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당대의 모든 악과 야만, 광기와 열정, 절망과 비탄, 심지어 한시대를 총체적으로 지배하던 정신질환 현상들에게 모두 동일한 절대값을 긍정함으로써 그는 여전히 예술지상주의자로 남는다.
유마와 창녀를 동시에 향하는 열정
그는 화해할 수 없는 많은 모순과 대립들의 들끊음을 들끓음으로서 육친화했고, 그의 문체는
세계의 모순과 대립을 글 쓰는 자의 자아의식 안으로 끌어넣는 어떤 특수한 언어적 필연성을 따라 전개되고 있다. 그 모순과 대립은 모두 거역할 수
없는 매혹으로 변해, 그 어떤 논리적 화해의 절차도 유보한 채 그의 의식과 문체 속에서 동거한다. 차마 된장을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모더니즘에
열광했던 그는 승려가 되어 산천을 유랑하면서, 언어의 순환 구조를 격파해 나가는 부처와 수보리의 그 용맹스런 아름다움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승려 고 은은 그 말 길 끊어진 자리의 아름다움에 대한 배반과도 같이 해인사 퇴설당에서 그의 첫 시집《彼岸感梧》(1960?청우출판사)를
펴내는데, 그 시집 중의 몇몇 절창은 허무주의와 모더니즘의 현란한 결합이었다. 아마도 그의 입산은 허무적 탐미주의를 따라간 산행이었으며, 그의
하산은 세상의 온갖 색깔에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아상(我相)을 청산하지 못한 내면의 불화, 말하자면 '종교와 예술, 문학과 종교가 결코 하나일 수
없는 근대적인 불화'에 따른 환속이었을 것이다.
그는 첫 시집을 낸 60년<한국일보> 지면에 '환속선언'이라는 기상천외한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하산하는데, 그의 하산은 60년대의 판자촌과 바라크의 혈거부락 속에서 센세이셔널했다. 환속 이후 그는 제주도에서 그의 전설적인 광란의 세월을 보낸 뒤 서울로 입성했고, 박정희 군사 정권이 국민의 절대 빈곤 위에 독재 정권을 수립해 나가던 시대를 향하여 들끊는감성의 산문들을 폭발시켰다. 무질서를 수용하는 그의 문체는 그 무렵 그 구조와 질감이 완성되어갔다. 그때부터 그의 문체는 논리적 명석성을 따라가기보다는 생(生)의 작열감을 따라서, 그 작열감과 더불어 명멸하는 구문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타가 악기라기보다는 인생 그 자체이듯이' 고 은의 문체는 문법의 틀이라기보다는 삶의 온갖 소리가 그곳에서 울려나오는 어떤 현악기와도 같은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그 현악기의 어떤 현은 서양제 모더니즘이거나 혹은 허무주의이며, 또 어떤 현은 선적(禪的) 자유의 현이다. 그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그의 문체는 짙은 인생감(人生感)에 의해 침윤되게 마련인데, 그는 무질서를 하나의 실존안에 통합하려는 열정에 의하여 인생론풍의 문체를 넘어선다.
아마도 고 은의 다음과 같은 진술은 그의 생애와 문체의 열정과 무질서가 어디서부터 비롯 되는 것인지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사물을 사랑할진대, 그 사물이 그 이전의 사물로서만 존재하겠는가, 그 사물이 사랑과 관심을 통해서 전혀 다른 존재로 변하는 일을 착각이라고 단정하여 말할 수 있겠는가."
“《유마경》이 성립된 땅은 매혹의 창녀이자 창녀기업가이기도 한 미녀 암바파마가 부처님에게 기증한 울창한 사과나무숲이고 망고나무 숲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유마의 고향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
유마와 창녀를 동시에 향하는 그의 열정이 그를 한없이 수다스럽게
하고있다. 그의 자전소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소설은 지금 70년대로 진입하려 하고 있다. 그는 당분간 더욱열정적으로 수다스러워질 것이다.
그가 그려나가는 한 생애의 벽화를 시대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광기와 상처를 개인의 삶으로 부딪쳐내는 자의
개인사이다. 그리고 그의 문체가 시대사와 개인사를 접합 시키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