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기법 높여 독자 지키자
  • 안면도 송준 기자 ()
  • 승인 1992.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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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작가협회, 여름학교 개최…작가 ? 독자 ? 경찰 등 1백여명 참석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은 안면도 삼봉해수욕장(충남 태안군)의 민박촌. 마당을 중심으로 십여개의 방이 둘러서 있는 한 민박집에서는 1백여명의 사람이 숨을 죽인 채 건물벽에 투영된 슬라이드 화면을 지켜보고 있다. 화면에는 피가 흥건희 괸 방 안에 신원을 알아볼 수 없게 부패된 시체들이 엎어져 있다.

이 시신들은 쇠망치로 머리를 맞아 세사람이 참혹하게 살해된 윤노파 피살사건의 피해자이다. 현장 사진을 통해 추리의 방법론을 설명하는 이 강좌는, 지난 7월31일 한국추리작가협외가 여름추리소설학교의 프로그램 중 하나로 마련한 ‘현장은 증언한다’이다.

1989년 출범한 한국추리작가협회는 작가들의 수준 향상과 추리문학 인구의 저변 확대를 위해 추리산업회 ? 추리야유회 ? 추리문학상의 제정 ? 경찰과의 교류 따위 사업을 펼쳐왔는데 여름추리소설학교는 그중에서도 핵심적 사업에 속한다. 협회의 이같은 활동에 힘입어 지난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추리문학계는 최근 들어 60여명의 작가와 그 나름의 독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막 출발선을 떠난 우리의 추리소설 수준이 애거사 크리스티 ? 프레드릭 포사이드 등과 같은 유명작가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를 만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인 감이 있다. 게다가 올해 들어 톰 클랜시 ? 마이클 크리튼 ? 움베르토 에코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이 광고 공세를 동반하고 서점가에 쏟아져나와 한국 추리소설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시사저널》142호 참조).

7월31일부터 3일동안 안면도에서 열린 제5회 여름추리소설학교는 세계 수준을 따라잡기 위한 한국 추리작가들의 노력으로 열렸다고 하겠다. 이 여름학교는 지난 88년 지리산을 시작으로 충주호반 ? 산정호수 ? 서해 무인도인 사승봉도에서 해마다 문을 열였다. 올해는 권경희 김성종 노 원 이상우 한대의씨 등 20여명의 작가와 80여명의 독자 이외에도 영화감독 정지영씨와 추리강좌의 초청강사들, 그리고 고려원미디어  ?명지사 등 후원 출판사의 관계자가 자리를 함께 했다.

추리퀴즈 ? 추리백일장 ? 작가와의 대화?캠프파이어 등으로 짜여진 여름학교의 백미는 초빙강사들의 추리강좌였다. 추리강좌는 작가로 하여금 사건현장을 간접적으로 접하고 전문지식을 축적하는 기회를 주는 동시에 독자의 이해를 돕는 구실을 한다.

이번 여름학교에는 경찰청 수사간부연수소 李三載 부소장의 ‘현장은 증언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催?圭 박사의 ‘유전자지문(DNA fingerprint)과 범죄수사’, 한국추리 작가협회 李祥雨 회장(<서울신문> 전무이사)의 ‘추리소설이란 무엇인가’, 鄭智泳감독의 ‘미스터리 영화의 문제들’, 金聖鍾씨의 ‘원작소설을 텔레비전 드라마화할 때의 문제점’등의 강좌를 준비했다. 특히 앞의 두 강좌는 추리작가들의 전문성을 넓히는 데 긴요한 내용으로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현장은 증언한다’는 영구 미제 사건이 돼버린 윤노파 피살사건을 통해 사건현장 보존의 중요성, 그리고 증거물과 정황을 토대로 올바른 추리를 세워가는 요령 등을 가르친다. 이삼재 부소장은 형사들이 찍어온 윤노파 피살현장 사진만으로 피의자였던 고숙종 여인의 무죄를 추론해냈는데, 슬라이드 사진에 나타난 핏방울의 위치 ? 핏자국의 형태 ? 시체의 위치 ? 집 구조 등을 분석하여 당시 법정에 나왔던 증인들의 발언과 경찰의 조서 내용에 담긴 모순을 잡아낸 것이다.

추리소설의 영역 확대 계기

유전자지문은 최첨단 수시기법의 하나로 지문 ? 성문 ? 혈액형 등과 같이 범위의 개인적 특성을 가려내는 데 쓰인다. 특히 이 기법은 강간살인사건의 범인을 잡는 데 탁원한 ‘솜씨’를 가지고 있다. 강간살인의 경우 아무리 증거물을 남기지 않아도 살해된 여자 시체의 질 내부에는 범인의 정액이 남아 있기 마련이며 정액만으로 용의자가 범인인지 여부를 정확하게 가려낼 수 있다.

유전자지문은 증거물에서 떼어낸 DNA의 일부를 특수처리한 다음 특수 X선 필름으로 찍어 현상했을 때 나타나는 무늬를 말한다. 최상규 박사에 따르면 일란성 쌍둥이를 제외하고는 유전자지문이 일치할 확률은 3천억분의 1밖에 안된다. 사건현장에서 확보한 모발 ? 담배꽁초 ? 정액 ? 혈액 등에서 모두 유전자지문 감식이 가능하다. 따라서 유전자지문이 일치할 경우 그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확률은 3천억분의 1에 불과하다(혈액형 감식의 경우는 70분의1).

이같은 강좌들은 한국 추리소설의 깊이와 영역을 넓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또 여름추리소설학교를 찾은 독자들의 성원은 문학의, 좁게는 소설의 한 분야이면서 대접을 받지 못했던 추리소설의 수준을 끌어올리려는 추리작가들의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넘어야 할 벽은 더 있다. 높은 차원의 추리기법은 물론 더 높은 차원의 문학성을 독자들은 끊임없이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확보된 추리독자만을 상대로 작품을 내는 것은 동인활동에 다름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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