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와 금메달에 놀아나는 텔레포츠
  • 김기태 (서강대 강사·언론학)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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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상품화는 이제 그만 … ‘꼴지’에게도 박수를



애국심 유발 중계도 문제 … 방송인 자질 높혀야
 텔레포츠(Teleports)의 세계는 끊임없이 각종 신화를 창조한다. 텔레비전 시청자와 스포츠 관람객이 스포츠 시청자로 묶여서 새로운 수용자군을 형성하기도 한다. 기존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제작방식과 관행 그리고 기술 등이 스포츠 방송으로 인해 바뀌기도 하고 전통적인 각종 스포츠경기의 규칙이나 진행방법등이 텔레비전 중계 때문에 거듭해서 변경되기도 한다.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 방송도 바로 이런 텔레포츠의 전형을 그대로 확인시킨 사례가 되었다. 우리의 텔레비전 방송국들은 명 가지 독특한 사례까지 덧붙이며 보름간을 흥분했다. 그 짧은 흥분과 짜릿한 쾌감이 올림픽이 막을 내린 후 불과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썰물처럼 빠져나간 지금에 와서 부질없는 일로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바로 텔레포츠가 지닌 기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텔레포츠는 상업주의를 기반으로 존재하고 성장한다. 이번 올림픽 방송도 상업주의가 빚어낼 수 있는 온갖 문제를 빠짐없이 노출했다. 우리 방송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정리하는 의미에서 이 부분을 살펴보면 차라리 살벌하다는 느낌까지 든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에 입각해서 최선을 다한 선수나 경기를 소개하기 보다는 경기 결과에 따른 다양한 상품으로 평가하고 방송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상금액수나 광고 상품가치 등을 고려할 뿐 아니라 간접적인 이미지까지 감안하면 상품가치가 없는 선수나 경기는 텔레비전 화면에 자주 비추어질 수가 없다. 시청자의 눈을 끌어야 하기 때문에 외모가 수려하거나 짙은 화장을 한 선수 또는 성적인 매력을 발산하는 선수나 장면 등이 주로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다. 계약된 광고량을 소화하기 위해서, 중계중인 장면을 가차없이 중단하고 광고를 방영하는 횡포도 상업주의에 포획된 텔레포츠의 속성에서 기인함은 물론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업주의을 비난하는 것은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을 문제삼는 것 만큼이나 우둔한 짓일지 모른다. 그러나 텔레포츠의 세계는 간혹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최우선으로 하는 듯한 허위의식을 기초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새삼스런 경계지만 꼭 필요하다고 본다.

 텔레포츠는 또 경쟁심을 기초로 존재한다. 텔레비전은 시청률을, 그리고 스포츠 경기는 승리를 지상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기 때문에 텔레포츠의 세계가 경쟁을 기초로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문제는 왜, 무엇을 위해, 어떻게 경쟁하는가에 있다. 바로 이 부분에서 텔레포츠의 세계는 인류의 화합과 전진을 위한다는 올림픽 정신과는 전혀 상반되는 무한경쟁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다.

 

금메달 경기 반복은 TV 횡포

 우리나라 선수가 승리한 장면을 중심으로 올림픽 방송이 이루어지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그것을 지나치게 애국심에 호소하여 자국 이기주의 감정을 촉발하는데 이용하는 지경으로 가는 것은 세련되지 못한 방송 태도이다. 텔레비전 중계 방송을 하는 진행자나 해설자가 자국 선수를 응원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고 냉정하게 현장을 전달하는 대신 상대편의 약점과 우리 선수의 강점을 찾아내는 데만 열심인 경우도 적지 않았다.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국제경기에 나가 싸우는 우리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는 애국심에 가득한 웅변조의 목소리를 냈는데 이것을 다시 듣는 것 같아 착찹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방송은 국제경기를 중계할 때 그 결과를 국민의 애국심 함양으로 연결시키려는 충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말인가.

 진정한 애국심은 그렇게 1회용 감정을 촉발시키는 정도로 생겨나지도 않으며 그런 애국심은 이기심과 혼돈되어 국민건강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 이런 빗나간 ‘애국적’ 올림픽 방송은 훌륭한 다른 경기를 시청할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우리 국민으로 하여금 올림픽 방송의 대부분을 양궁 사격 역도 마라톤 배드민턴 유도 레슬링 핸드볼 등 금메달을 딴 종목에 한정하여 시청하도록 만들었다.

 텔레포츠는 스타를 필요로 하고 인기종목에 편중하는 것을 구조적으로 지향한다. 그것은 경제적인 이유로도 그렇고 텔레비전 방송의 속성 때문에서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스타가 탄생하므로 모두 그런 스타의 출현만 기다리는 텔레포츠의 세계는 그래서 비정하다. 수백명의 우리 국가대표 선수 중 열손가락 안에 드는 몇 명의 스타 선수를 위해 나머지는 모두 조연으로 만들어 버리는 텔레비전의 가차없는 처사는 이번 올림픽 방송에서도 여전하였다. 비인간적 방송의 전형인 셈이다.

 

올림픽 흥분에 정치·경제는 뒷전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단 1진의 귀국 소식을 전하는 우리 방송의 태도에서 잘 나타났지만 방송은 보름 동안 온통 스타와 금메달을 딴 날은 올림픽 방송이 재미 없는 날이 되고 말았다는 말은 자국 중심의 중복·반복방송을 꼬집는 표현이었다. 그나마 금메달을 딴 선수와 배경을 각 방송사마다 독특하고 개성있게 취재 보도했으면 보다 볼거리가 많은 날이 될 수도 있었다.

 텔레포츠가 흥분을 동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중계 방송을 하는 진행자나 해설자가 흥분하거나 준비를 소홀리 해서 결과적으로 허위 사실을 공표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김택수를 유남규로, 조윤정을 김수녕으로, 삼척의 황영조를 주문진 탱크로 반복해서 방송한 일 등은 올림픽과 같은 큰 국제경기에 임하는 방송인들이 책임감도 없고 사전 준비도 부족했음을 폭로한 사례이다.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기간에 국내의 정치·경제적인 중요 사안이 텔레비전 화면에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한 것도 테레포츠가 빚어내는 역기능적 폐해이다.

 무엇이든 지나친 흥분은 금물이다. 특히 텔레비전의 흥분은 금물이다. 텔레비전이 흥분하면 온국민이 흥분할 수 있다. 올림픽 방송이 온국민의 일시적 스트레스 해소에 기여하는 것 이상으로 흥분하면 정치·경제·사회적 기대감에 따르는 스트레스를 촉발할 수도 있다. 사후이긴 해도 각 방송국마다 올림픽 경기를 차분히 정리하는 자기 반성적 프로그램을 방영한 것은 다행한 일이다. 텔레포츠가 국민의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도록 지혜를 모을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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