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한 환멸만 남겼다"
  • 대구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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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홍역 속의 대구표정/"유권자 철저하게 소외된 싸움" 인식 팽배

 “우리라고 뭐 모르는 줄 아나본데…." 단정한 점퍼차림의 40대 남자가 말을 꺼내다 말았다. "이게 다 뭡니까? 돈을 길가에 뿌라놨다 아닌교." 옆사람이 거들었다. "이 종이값이몬  예, 없는 사람 몇은 먹여살릴 수 있을 겝니다. 하도 시끄러워 싸서 한번 나와봤는데 이런저런 꼴에 속이 마 콱 상해뿌렸심니다." 처음 남자가 주위를 살피며 나직이, 그러나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마치 추태의 상징처럼 청중들이 버린 갖가지 선거홍보물로 쓰레기천지가 된 유세장바닥을 한참이나 쏘아보고 있었다. "갈비탕 한그릇으로, 수건 한장으로 표를 끌어모으겠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데…글쎄요, 그것이 아직도 통하는 유권자의 수준이 더 문제긴 문제겠지예?" 그가 자못 안타까운 심정으로 기자에게 되물어 오는 사이, "연습이 너무 지나쳐" 목이 쉬어버린 여당후보의 지지호소와 공약행진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당후보의 사자후와 널부러진 홍보물

 "주택건설을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고 있는 본인은…어린시절 보리밥과 연탄배달로 고등고시 공부를 한 본인은…누구보다 서민을 잘 이해하고, 더불어 잘사는 경제를 위해 앞장서 일해왔습니다. …세분의 대통령을 배출한 자랑스러움, 대구시민의 긍지를 잊지 맙시다. …저를 뽑아주는 것이 곧 노대통령을 밀어주는 것입니다. 대구에 베풀어주시는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이 기회에 그분을 화끈하게 밀어주십시다."

 "저는 대통령의 도움을 받아 대구 발전에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지하철 건설을 위해 4조원을 중앙에서 마련해 오겠습니다. …2백억원의 정부지원을 받아 대구를 세계적인 섬유도시로 만들겠습니다. …첨단산업 기계공업 자동차공업을 유치해 불황이 없는 대구를 건설하겠습니다. …정귄(증권)시장을 건전하게 육성하겠습니다. …우리들의 꿈인 주택문제를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소방도로를 …도서관을…서민 위한 의료시설을…여러분, 저는 예산 따오는 것 하나는 자신있습니다."

 박수는 많지 않았다. 그냥 경청할 뿐이었다. 청중들이 그 수많은 공약에 얼마나 설레이고있는지는 알길이 없으나, 다만 점퍼를 입은 그이만큼은 "서민을 위해 봉사하는 경제정치인이 되겠다"는 후보의 '사자후'와 땅바닥에 널부러진 고급지질의 홍보인쇄물을 동시에 떠올리면서 무표정한 얼굴로 유세장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날 '싸나이' 후보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大邱 西甲의 많은 유권자들은 2년전 꼭 이맘때 총선유세를 하던 그가 연단 위에서 보여준 '싸나이다움'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시 유세장에 모인 운동권학생들이 "학살원흉 물러가라"고 외치자 그는 이렇게 일갈했던 것이다. "어허, 시끄러." 뿐만 아니었다. 경찰도 직접 진두지휘했다. "저놈 잡아! 저기 저놈도. 뭐하는 거야! 빨리 잡지 않고."

 

"나는 야당 찍을 기라요"

 그 '기개'가 그리웠던 것인가? 大邱시민들은 무엇 때문에 그에게 그토록 동정을 보냈으며 집권당은 또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유권자 몇사람에게 이에 대한 궁금증을 말해보았다.

 89년형 '엑셀'을 몰고온, 그래서 중산층 이상일 것 같은 30대의 한 청중에게 '대구의 명예와 자존심'에 대한 설명을 청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다 지역감정 아니겠어요? 김대중이가 정호용 몰아냈다고 생각들을 하고 있으니 동정심이 일었던 것이겠지요". '압력'때문인지 '권유'에 의해서인지 사퇴한 후보측은 따라서 그 망령 같은 지역감정을 타고 명예와 자존심 회복을 내세우며 사퇴 전까지 우세를 지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당동 ㅅ아파트에 사는 한 주부(42)는 '아줌마'들의 '극성'이 더 대단했다면서 "자살기도로 입원한 후보부인을 문병하고 다니는 데 놀라울 정도였다"고 전해주었다. "인심이 그렇다는 얘기이고, 이제 사퇴했으니 표는 어이될지 모르지예. 얻어먹은 데 찍을지…." 그렇게 말하는 자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니까, "저요? 저는 야당 찍을 기라요"하면서 겸연쩍어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이 지역이 그분의 고향이고 유세 가보니까 말씀도 잘하데예. 여당후보는 그동안 높은 자리에 많이 있었잖아요." 향응을 받아본 적이 있느냐고 하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다. "비싼 음식은 아니고 빵이나 음료수 같은 것을 차려놓은 자리에 몇번 불려나가보긴 했어요. 선물도 받아오고요. 하지만 표는 바로 찍자는 얘기도 아줌마들 사이에서 많이 합니다. 우리를 너무 무식하게 보지 마이소."

 

사업하는 사람들 '여당이 질까 신경 쓰여"

 사업하는 사람들은 이번 선거가 더욱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의리'를 지키려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될 사람이나 되라'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고나 할까. 평리동에서 요식업을 하는 한 주민(48)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억울하게 물러난 그 사람을 지지하는 게 우리로서는 그래도 부담이 없었습니다. 야당이나 재야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주변에서는 대통령이 너무했다고 얘기가 되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여당을 패배시킬 경우 그 결과에 대해서도 장사하는 우리들은 신경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구지역은 선거 때마다 나타난 결과로 보아 일반적으로 20~30%의 야당 고정표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번 보궐선거를 치른 西甲지역의 특성은 서울 강남과 같은 신흥 아파트단지와 재개발을 앞둔 달동네가 혼재돼 있고, 20~30대가 65%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고정야표가 평균치보다는 약간 더 많았다고 봐도 될 것이다. 이들 중에는 이번 선거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유아원 교사인 金모(26 · 여)씨는 이번 선거는 정치에 대한 환멸만 남기게 된 것 같다며 이렇게 말했다.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왜 유권자가 또 판단을 해야 하는지 기분나빠요. 우리가 들러리밖에 안되나요? 그렇지만 ‘불쌍하다'며 동정을 보내는 학부모들이나 받을 것 받으러 몰려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습니다. 물론 그 정치인들의 책임이 더 크겠지만요."

 金씨와 같은 이들은 무시당했다고 불쾌감을 표시하고 있지만, 전국의 이목이 집중된 선거에 한표를 쥐고 있는 유권자로서 '엄청난 부담'을 느끼고 있는 시민들도 있었고, 뭐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던 가운데 치러진 이번 선거는 일반 국민들에게 무엇을 남기고 있는 것일까. 유세장에서 만난 이 지역대학의 한 교수는 그것을 정치에 대한 허탈감과 회의라고 말했다.

 "유권자의 의사와 관계없이 선택이 강요되고, 그에 따른 갈등과 부정으로 사회가 혼탁해지고…실망한 국민들의 정치로부터의 소외현상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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