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세 혁명가 등소평 ‘최후의 투쟁’ 나섰다
  • 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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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22일로 중국의 최고지도자 등소평은 米壽(88세)가 되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웬만한 일에서는 손을 떼고 남은 생애를 조용히 정리해야 할 나이다. 그러나 중국의 이 老지도자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순리조차 이미 초극해 버린 것 같다. 올해 초 갑작스럽게 중국 정치의 한복판에 다시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래 최근까지 그의 정력적인 활동은 90세를 바라보는 노인의 그것으로 보기 어렵다.

“등소평의 제3의 북벌 시작됐다”

 중국문제 전문가들은 중국 개혁의 총설계자인 이 노혁명가가 지금 “생애 최후의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 혹자는 “등소평의 제3의 북벌이 시작되었다”면서 심상치 않은 눈으로 그의 움직임을 주시한다.

 얼마 전 전격적으로 발표된 한·중수교도 그가 올해 초부터 전개해온 투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8월22일자 <산케이신문>은 “한·중수교를 주도한 인물은 바로 등소평이며, 이는 올해 연말의 14차 당대회를 준비하기 위한 그의 포석 중 하나다”라고 지적했다. 국내 중국문제 전문가 중에는 수교 시기를 앞당기는 데 그가 직접 나섰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견해를 갖는 사람도 있다. 중국의 외교정책은 외교부 등 관리의 손에 의해 주도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중수교 같은 중요한 일이 최고지도자인 그의 재가없이 이루어졌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전문가들은 덧붙인다. 한·중수교 역시 그가 올해 초부터 치열하게 전개해온 생애 마지막 투쟁의 영향권 안에서 진행된 것은 틀림없으리라는 것이다.

 지난해 연말까지만 해도 등소평의 동정을 둘러싸고 서방 언론은 상당히 한가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그가 중병에 걸렸거나, 권력투쟁에서 밀려났거나, 심지어 사망했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추측이 난무하게 된 것은 지난해 연초 상해시의 구정행사 때 잠시 모습을 드러낸 이후 약 1년 동안 그의 행방이 묘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난 1월 초 그가 딸들과 손자들, 그리고 몇몇 측근을 거느리고 중국 남부의 심천, 주해 경제특구와 상해시 등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처음에는 그저 형식적인 얼굴 드러내기 정도로 여겨졌을 법했다. 그는 사망설이나 중병설 등이 난무할 때마다 잠시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남부지역 순방, 즉 南巡은 뭔가 처음부터 심상치 않은 낌새를 보였다. 우선 일정부터가 그랬다. 1월18일부터 2월25일까지의 빡빡한 일정 속에 몇 개 도시를 순방하는 것은 팔순 노인으로서는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를 끄덕없이 강행했다. 그를 가까이서 직접 본 사람들은 그가 아직도 60대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대중이 많이 모이는 민속촌이나 호텔 로비 등에서 시민에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사람들을 바짝 긴장케 한 것은 순방기간 중 그가 뱉어낸 거의 분노에 가까운 언사들이었다. 대개의 논조는 “개혁과 개방을 더욱 빨리, 더욱 대담하게 진행하라”며 현재의 당지도부를 다그치는 내용이었다. 그의 발언 중 상당 부분은 개혁의 진행을 방해하는 보수파 지도자들을 직접적으로 공격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순 발언의 핵심은 “개혁을 하지 않는 자는 물러나야 한다”는 말로 요약된다. 이밖에도 보수파 지도자인 진운을 여러 사례를 동원해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당의 선전 및 조직부서를 담당하는 보수파 지도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조정자역 포기… 보수파 제거 나서

 남부지역에서 시작된 그의 발걸음은 점차 북상하기 시작해 5월21일에는 북경에 있는 수도제철공장에 닿았다. 이곳에서도 그는 換□筋, 즉 “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의식을 개조해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또 지난 6월경에는 흑룡강성 길림성 요녕성 등 동북 3성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관측통들은 그의 동북 3성 방문은 개혁의 바람을 내륙지방에까지 확산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일련의 순방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격렬한 언행은 중국 지도부 내에서 그가 담당해온 역할에 비추어볼 때 “매우 이례적인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그는 여태까지 개혁파의 수장이면서 동시에 개혁파와 보수파의 갈등에서 초연한 막후 조정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해왔다. 최고지도자로서의 그의 권위는 당내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포기하고 보수파에 대한 투쟁 당사자로 나선 것이다.

 이 노혁명가를 오랜 은둔 생활에서 정치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인 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그를 그토록 노하게 했는가. 그가 분노한 원인은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안문사태 이후 중국의 권력층 내에서 그가 처한 사정을 이해해야 한다. 그의 분노는 이 기간 동안 개혁을 가속화하고자 하는 그의 열망이 계속 좌절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지난 89년의 천안문사태로 개혁정책의 총설계자였던 등소평은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었다.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한 인민의 신망이 상당히 무너지게 되었다. 그의 이름 小平의 중국식 발음 ‘샤오핑’은 ‘작은 병’이란 뜻의 小甁과 발음이 같다. 천안문사태 당시 대학생들이 그들이 최고지도자를 조롱하기 위해 낚싯대에 작은 병을 매달아 들고다녔다거나, 천안문광장에 깨진 병조각이 흩어져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요즘도 대학생 중에는 작은 병을 깸으로써 등소평에 대한 불만을 표시한다고 한다.

 천안문사태 직후인 89년 11월 그는 중앙군 사위 주석직을 강택민에게 물려주고 평당원 등소평으로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무관의 제왕이 된 셈이다.

 이런 사정 외에도 천안문사태로 78년 말부터 약 10여년 동안 그가 정열을 기울려 추진해온 개혁·개방 정책이 크게 둔화되고, 경제정책을 수립하는 국무원과 당의 핵심부서인 조직 및 선전부서에 이붕·등력군 등 보수파가 대거 진입하게 된 것은 그가 원하지 않던 상황 전개였다.

 천안문사태로 정권을 장악한 이붕 총리 등 보수파는 조자양의 개혁정책 대신 소위 ‘治理整頓’책을 경제정책의 주조로 삼아왔다. 치리정돈이란 인플레와 과열경기를 잡기 위해서는 통재와 계획정책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일종의 경제 조정책이었다. 지난 3년 동안은 이 조정책을 언제까지 끌고갈 것인가를 둘러싼 보수파와 개혁파의 논쟁기간이었다. 보수파는 이 정책의 효과로 경제 안정이 이루어졌으니 더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개혁파는 이로 인해 생산의 둔화·사회 활력의 침체·외국의 투자기피 등 전반적인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개혁·개방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천안문사태 직후 어쩔 수 없이 보수파의 득세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개혁만이 중국의 살길”이라고 굳게 믿는 등소평은 당 지도부에 개혁세력을 등용, 권력의 펑형을 유지해가면서 개혁노선으로 전환하기 위해 부심해왔다.

 특히 90년 하반기부터는 “좀더 대담하고 좀더 빨리 개혁정책을 추진하라”고 다그치는 그의 목소리가 당 지도부에 거듭 전달되기 시작했다. 지난 90년 하반기 이붕 총리가 중심이 돼 작성한 8차5개년계획(91~95) 시안에 대해 개혁적인 조처가 미흡하다고 비판하고, 좀더 개혁지향적으로 수정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그의 이 지시는 당·정의 핵심을 장악한 보수파의 거부로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그는 91년 2월 상해시에서 열린 구정 축하 모임에 참석해 다시 한번 당 지도부에게 개혁·개방 정책을 대담하게 시행할 것을 촉구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의 담화 내용을 논문으로 작성해 상해시 기관지인 <해방일보>에 황보평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하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당의 선전기구 요원들이 <해방일보>에 대해 논문 게재 경위를 조사하는 등 그에게 거의 직접적으로 도발하는 행위를 했다. 보수파는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황보평의 논문을 빌미로 ‘姓資姓社’(어떤 일을 하기 전에 그 일이 자본주의 성씨에 해당하는 것인지, 사회주의 성씨에 해당하는 것인지 미리 분간하여 실행해야 한다는 것) 논쟁을 제기하면서 개혁세력을 압박해왔다.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 등소평의 지침이 보수파에 의해 계속 거부되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역으로 공격을 받는 상황에까지 몰리게 된 것이다. 지난번 남순 때 그는 특히 황보평의 논문 게재를 당의 선전부서에서 조사한 사실에 대해 극심한 불쾌감을 표시하며 “조사하려면 나를 조사하라”고까지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뿐만 아니라 지난해 8월의 옛 소련 붕괴는 중국이 경제개혁의 고삐를 더 이상 늦추어서는 안된다는 위기의식을 그에게 심어주기에 이르렀다. 보수파가 옛 소련 사태를 주로 자본주의 세력에 의한 ‘和平演變’(평화적인 수단을 이용한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보고 사상통제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데 비해, 등소평은 이와는 반대로 옛 소련의 붕괴 원인을 경제 개혁의 실패에서 찾았다.

 이와 같이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권력 내에서 전개된 상황은 노혁명가의 입장에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공직 사퇴 후 그는 가급적 공식적인 활동을 자제하면서 그의 의중을 강택민 총서기 등 당·정의 개혁 세력들을 통해 관철시키는 방식을 택해왔다. 그러나 강택민 총서기는 입장이 분명하지 않은 것 같았고, 당·정의 핵심부는 이미 보수파에 압도돼 있어 이제 자신이 직접 나서 개혁·개방의 물꼬를 터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다.

 이와 함께 92년이라는 시기적인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올 11월경 5년 만에 14차 당대회가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의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이번 당대회에서 그가 추진해온 개혁정책을 이어받을 인물들로 당 지도부를 구성하지 못하면 자칫 평생의 노력이 도로아미타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올해 초부터 갑자기 표면화된 등소평의 일련의 움직임을 그의 생애 마지막 투쟁으로 보는 일부 전문가들의 관점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모택동의 ‘외곽에서 중앙 공격’ 전술 원용

 최근까지 그의 움직임을 보면 이 위대한 중국의 전략가는 문화혁명 직전인 1964년 그를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모택동이 사용한 전술을 원용하고 있는 것 같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다.

 중국식 사회주의 건설자로서의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전설적인 영웅 모택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혁명기간 중 모택동은 그의 스승이자 동지였다. 1957년 모택동이 ‘三描黑描論’(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을 수 있으면 된다는 것)이 처음 등장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자인하고 권좌에서 물러난 모택동은 점차 소외감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당 중앙을 장중악한 등소평과 유소기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은밀히 북경을 빠져나가 상해에서 대중을 결집해 북경의 당 중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등소평이 ‘화려한 외출’의 행선지로 북경을 선택하지 않고 개혁·개방의 선진지역인 상해 삼척 주해 등을 방문한 것도 이 지역의 상징성에 기반해 북경을 공격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불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전략은 현재까지 진행 상황으로 볼 때 적중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돌연한 출현에서부터 지난 7월의 北戴河회의 (매년 여름 휴양지인 북대하에서 열리는 원로 지도자들 회의로 이번에는 14차 당대회에 제출된 정치국 정위원과 후보위원들의 명단을 선정하는 게 주요한 의제였음)까지 중국 내에서 전개된 상황을 보면 不□□의 괴력이 대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한 전문가는 그의 남순 발언 이후 “개혁의 대합창이 중국 천지를 진동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개혁파, 당·정·군 요직 장악할 듯

 남순에서 행한 그의 발언(南巡講話)은 공산당 중앙이 ‘中發2호’ 문건으로 공식화해 이미 전국 당원에게 회람했고, 14차 당대회에서 당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될 것이라고 전해진다. 등소평의 남순강화 이후 평소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인민일보> 등 북경의 주요 언론 매체가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을 대서특필했고, 평소 보수파로 지목되던 인물들의 개종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5월 보수파의 거두 진운이 다소 뉘앙스를 달리하기는 했지만 개혁·개방을 가속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천명했고, 이붕 총리와 강택민 총서기의 지지발언도 계속돼 왔다.

 이와 함께 북대하회의에서는 등소평이 지지하는 개혁파 인사들이 당 정치국 정위원과 후보위원에 다수 추천돼 바야흐로 개혁파가 당·정·군의 요직을 모두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등소평의 마지막 투쟁은 일단 그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이다. 그러나 그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은 지도부 내 보수파만은 아니라는 지적도 설득력이 없지 않다. 특히 당과 기업의 중간 간부들의 비협조나 앞으로 개혁정책의 추진 과정에서 나타나게 될 사회보장비의 삭감·평생고용제도의 폐지 등으로 국여기업체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의 반발이 심화될 가능성이 있다.

 여러 가지 우려되는 상황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이 ‘작은 거인’의 필사적 투쟁이 멈추어 있던 중국 개혁의 수레바퀴를 힘차게 밀고가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게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힘이 한국의 이해와도 맞아떨어져 한·중수교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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