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깨우는 ‘광야의 외침’
  • 김재일 편집위원보 ()
  • 승인 1990.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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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과 더불어 20년 金鎭洪목사… "총칼 아닌 사랑으로 혁명 일으켜야"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숱이 적은 머리. 헐렁한 옷에 낡은 구두를 신고 있는 그의 수더분한 차림새는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중년남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 위에 파인 거친 주름살들은 그가 걸어온 길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말해준다. 착 가라앉은 목소리와 돌출한 이마 밑에 그윽하게 꿰뚫어보는 듯한 눈매는 어떤 깊이를 느끼게 한다. 

  金鎭洪목사. 48세. 기독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일반인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그가 지금 조용하지만 폭넓은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그가 토해내는 '광야의 소리'는 특히 중산층과 청년층을 깊이 파고들고 있다. 그의 현재 직함은 활빈교회 목사이자 두레선교회 이사장. 교회라야 경기도 남양만 한구석에 틀어박힌 교인 2백명의 시골 교회에 불과하고 두레선교회는 아직 등록도 되지 않은 단체이다. 그러나 그가 강연하는 집회는 항상 초만원을 이루고 그의 강연과 설교내용을 담은 카세트테이프는 전국 목사 설교테이프 중 가장 많이 팔릴 뿐 아니라 단가 또한 가장 높다. 김목사는 종교담당기자 1백2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조사에서 '존경하는 목사'로 한경직목사에 이어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의 자필수기 《새벽을 깨우리로다》는 46판째 찍어 30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이고 최근 같은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가 시중에서 상영되고 있다.

  김목사는 최근 5년 동안 5백여회의 강연기록을 세웠다. 그는 요즘도 하루 15~16통의 강연요청 전화를 받고 있으며 그의 강연 테이프는 한달에 8천개 정도가 나간다는 최동묵간사의 말이고 보면,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잠재인구는 매우 클 것으로 짐작된다. 

  그의 모습은 여러가지다. 70년대초 서울 청계천 뚝방촌에 가족과 함께 뛰어든 빈민운동가, 유신체제에 제일 먼저 반기를 든 민주투사, 빈민들을 이끌고 소금기가 채 가시지 않은 간척지에 도전해 결국 개척에 성공한 농민운동가, 그리고 최근에는 베스트셀러 작가, 인기 강사 등 다채로운 얼굴로 주위사람들에게 비춰진다. 그렇다면 그의 실체는 무엇인가. 보장된 대학교수직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빈민들과 어울려 쥐약 먹고 죽은 개고기를 안주삼아 유유히 소주잔을 기울였던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는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활빈'의 뜻 펼치다 '사기꾼'으로 몰리기도 

  김목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의 역정을 훑어볼 필요가 있다. 대구계명대학 철학과를 나온 그는 대학을 수석으로 입학하여 수석으로 졸업한 덕분에 모교에 조교로 남았으나 어느날 '진리가 무엇이냐'는 학생의 질문에 내심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대답하기에는 너무나 큰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그는 방황의 길에 들어섰다. 아이스케키 장사, 약장사, 화장품 외판, 보험 세일즈를 하면서 삶의 뜻을 찾기를 바랐으나 별 소득을 얻지 못했다. 그러던 중 67년 12월 어느날 밤 그는 성서 속에서 '예수 즉 진리'와 만난다. 그는 그때의 감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기쁨의 강이 내 심장을 흘렀고 세포마다 나의 새로운 출생을 감사했다. 다음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은 이전의 태양이 아니었고 부는 바람도 이전의 바람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을 선택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고 장로회 신학대학 2학년인 71년 "가난한 자를 돌보라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해" 아내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청계천의 빈민촌에 뛰어든다. 당시 청계천의 3·1고가도로가 끝나는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양대학 뒤편에 이르기까지의 청계천 양쪽 제방에는 1만2천여 세대 6만여명의 빈민들이 '내일이 없는' 막바지 인생을 살고 있었다. 그는 굶주림, 온갖 질병, 칼부림, 습기찬 방, 악취, 절도, 강간, 게으름, 무기력 등으로 묘사될 수 있는 그곳 송정동 74번지에 "신앙으로 가난을 이기자"는 뜻으로 '활빈교회'를 세운다. 

  치료비가 없어 환자를 받아줄 병원을 찾아다니던 중 그의 등에 업혀 죽은 사람만도 수십명. 시체를 염하는 일, "등 밑에는 구더기가 바글거리는데 방바닥에 닿은 척추 부분의 살이 썩어 척추뼈가 환히 노출된" 환자를 돌보는 일 등 궂은일은 모두 그의 차지였다. 수제비도 없어서 가족과 함께 굶기 일쑤였던 그는 생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넝마주이를 하면서 빈민들에게 삶의 희망을 일깨워간다. 그는 그때 어떠한 어려움도 돌파할 수 있는 '넝마주이 철학'을 터득하게 됐다고 술회한다. "쓰러져도 쓰레기통 옆에만 쓰러지면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거지요." 

  74년 1월8일 석간신문을 받아든 김진홍 전도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를 공포하니 개헌에 관해서는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고 움직이지도 말라는 내용이었다. "단순한 정치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기본권을 짓밟는 종교적인 문제로 파악했어요." 그는 즉각 긴급조치 철회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시국기도회를 열기 위해 세력 규합에 나섰다. 결국 준비과정에서 총책임을 맡아 성명서를 작성했던 그는 이 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I5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13개월의 옥살이를 끝내고 청계천에 다시 돌아왔지만 출감 한달후 아내는 그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해 아들딸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것이 그의 가슴에는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아픔"으로 각인돼 있다.

  출옥 1년4개월후, 도시계획에 따라 서울시청에서 청계천 판자촌 전면 철거령을 내리자 그는 주민들과 협의하여 '활빈귀농개척단'을 조직, 1백세대 5백20명을 이끌고 남양만 간척지로 떠났다. 소금땅 위에 무성한 바다풀을 뽑아내고 개펄을 농토로 만드는 일에 도전, 천신만고 끝에 개척에 성공했다. 그러나 성공의 꼭대기에는 참담한 좌절이 숨겨져 있었다. 농민소득 증대사업의 하나로 79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젖소 4백60두와 종돈 92두를 수입했는데 선적서류의 증발로 동물검역소에 도착한 소를 반출할 수 없어 1억4천만원의 빚더미 속에 빠지는 신세가 된 것이다. "빚쟁이들이 종로 5가 기독교회관 건물에 '사기꾼 목사 김진홍을 처단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연좌데모를 벌이기도 했어요." 그는 투신자살을 결심, 남양만 바닷가 제방 위에 올라가 하루 저녁에 신발을 다섯번이나 벗었다가 다시 신었다고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회상한다.

 

남북한의 모순 극복 위해 두레운동 전개 

  김목사는 주민들에게는 '왕초'로, 교계에서는 '기독교 민족주의자'로 불린다. 그는 스스로를 '온건개혁주의자'로 분류하지만 재야운동권에서는 '개량주의자'라고 그를 비난한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NCC 관계자는"유신체제에 제일 먼저 항거했던 김목사가 이제 한풀 꺾여서 부조리한 현실의 구조적인 원인을 도외시하고 부분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개량주의자로 변신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김목사는 '손톱 이야기'를 들려준다. "감옥에서 손톱이 빠져 고통당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새 손톱이 자라나는 만큼 병든 손톱이 밀려나는 현상을 보고 큰 깨우침과 영감을 받았습니다. " 그 깨달음이란 헌 손톱을 뽑아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새 손톱을 길러내는 것이 문제이며 비판보다는 대안이 중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노선에 대한 비판 외에 김목사 자신에 대해 "사기꾼" "정치목사"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꽤 있다. 이에 대해 경북대 주창근교수는 "그가 해온 일이 밑바닥 사람들의 삶과 직접적으로 관련돼 있는 활동이어서 일이 잘못될 경우 이해가 상반되는 관계로 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필연적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따라서 개인적인 감정으로 사람을 평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행위'를 그에 대한 평가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밑바닥 인생들과 함께 생존의 문제에 매달리면서 형성된 강인한 기질은 같이 일하는 사람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다치게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그를 아는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쓴 글 중에는 ‘목숨걸고'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 등의 강한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그를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바로 기독교 지도자들이다. 그가 한국교회의 물량주의 경향과 독재정권을 합리화시키는 조찬기도회 개최 등 역사의식이 결여된 교계지도자들의 행위를 가차없이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민중의 삶 속에서 호흡을 같이해야 하며 物이 아니라 民에 투자해야 합니다. '교회당 건축에 수십억을 들이는 기독교 지도자들의 의식구조가 한심한 노릇입니다."라고 지적하면서 '부르조아화되어 거친 혼을 포용하지 못하는' 오늘날의 한국교회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또 김목사는 자신을 향한 비판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안주하는 목사가 되기보다는 말썽많은 개척자로 남기를 기꺼이 원합니다. "

  일각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목소리를 찾는가? 김목사가 강의하는 두레성서연구모임에 참석한 몇사람의 말을 들어보자. 성산실업 대표 김정필씨는 "그는 몸으로 성경을 해석하며 대안과 방향을 제시한다. 몸소 체험한 실패, 좌절, 그리고 고통을 통해 나온 그의 메시지는 현대인의 정신적인 갈증을 풀어주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서울고등법원 김영훈판사는 "김목사의 말과 글은 평이하나 힘이 있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남다른 고뇌를 해온 사람답게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뜨거운 사랑을 담고 있다"며 그가 "자신의 약점까지도 객관적인 심판대에 올리는 진실한 지도자"라고 평했다. 

  그는 요즈음 성경강의를 위해 서울 부산 대구 울산 진주 전주 광주 안동 그리고 해외 각국을 돌며 눈코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87년 4월에 시작한 두레성서연구 모임은 전국 각지에 조직돼 있고 해외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각 도시와 일본 독일 스위스 오스트레 일리아 남미까지 뻗어나가 있는 데 국내회원 1만여명과 해외회원 3천여명을 확보하고 있다.  그는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이화리에 '두레마을'을 세워 무의탁 노인, 병자, 전과자 등 50여명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틈나는 대로 농장에서 노동을 한다. "두레마을은 성서적 삶의 실현으로 시작했지만 이 작은 시작이 넓게 적용되어 남쪽 자본주의의 병폐를 극복하고 북쪽 공산주의의 모순을 치료하는 국민운동으로 발전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

  김목사는 민족공동체 형성을 위해 90년대엔 '두레운동'에 전념할 것이라면서 이렇게 외친다. "총과 탱크를 앞세운 군사혁명이 아니라 사랑으로 무장한 군대가 혁명을 일으켜야 합니다." 청계천에서, 남양만에서 빈민과 농민의 새벽을 깨우려 애썼던 그는 이제 잠든 이 시대를 깨워 새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소명을 스스로에게 짐지우고 있다.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을 찾아 '사랑의 혁명'을 꿈꿨던 인간 김진홍. 이 갈등의 시대에 그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가.

 

김진홍목사 약력

1941 경북 청송 출생.

1971 활빈교회 창립, 빈민선교 시작.

1974 대통령 긴급조치 1호 위반 구속.

1975 빈민 이끌고 남양만 간척지 개척.

1978 협동농장 '활빈두레' 시도,

1981 '두레마을' 시작.

1982 《새벽을 깨우리로다》 발간.

1986 농산물 직매장 두레유통 세움.

1987 두레성서연구모임 시작.

1989 두레선교훈련원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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