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깨어나는 동유럽
  • 앙드레 퐁텐느 (〈르 몽드〉 고문)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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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보았다고 해서 반드시 그 열매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유럽의 혼돈 상태를 보면 이 프랑스의 격언이 떠오른다. 3년 전 자유의 물결이 동유럽을 휘몰아칠 당시 행복에 도취된 상태와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갑작스레 자유를 되찾은 동유럽 사람들은 아마도 많은 환상을 가졌을 것이다. 영화나 텔레비전, 여행객의 이야기를 통해 이들은 민주주의란 곧 풍요와 동의어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수십년에 걸친 판단 착오를 한순간에 바로잡을 수는 없다. 과도한 생산비와 인위적으로 낮게 책정된 물가, 대규모 부채를 기반으로 했던 이들의 경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긴축재정 및 시장경제로의 복귀가 요청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완전 고용과 광범위한 사회보장 정책에 익숙한 동유럽 사람들은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바야흐로 낙원에 거의 도착했는가보다고 믿었던 수천만명이 생활 수준의 저하라는 문제에 봉착했다. 이만저만한 실망이 아니다. 물론 실망의 정도는 나라와 지역에 따라 다르다. 한 예로 동유럽에서는 현재까지 어느 나라도 공산주의 정권을 폐지시킨 지 2년 만에 공산주의자들에게 70%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몽골 유권자들의 본을 따르려 하지 않는다.

유럽공동체, 동유럽국 가입신청에 신중

얼마 전 유고의 베오그라드에서 1주일동안 계속됐던 가두시위는 유럽의 마지막 공산정부인 밀로세비치 정권을 전복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아니 전쟁 덕분에 밀로세비치가 주창하는 범세르비아 민족주의가 국민의 지원을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옛 체제에서 요직에 있던 유고연방 각국의 지도자들 역시 민족주의자로 전향했다. 이러한 방식은 이미 오래 전부터 알려져온 것으로 무솔리니나 히틀러,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것이 아니다. 맞붙어 살아가는 민족 사이의 증오심을 키우는 것은 일상생활의 어려움을 잊게 하는 효과적인 방편이었다. 이같은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지난 40년간 유럽공동체가 이루어놓은 업적은 수세기 동안 백여 차례에 걸쳐 유럽국가들 간에 벌어진 무력충돌에 종지부를 찍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옛 바르샤바조약 가입국 몇몇이 오늘에 와서 유럽공동체의 문을 두드리는 이유는 또 있다. 이런 나라들은 민주주의 경험이 별로 없던 이탈리아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 그리스 등이 유럽공동체에 가입한 이후 민주주의의 토대가 좀더 견고해졌음을 잘 안다. 그러나 유럽공동체 지도자들은 이들의 가입신청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배척 움직임이 날로 거세지는 서유럽으로 수백만의 이민이 밀어닥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그런데 이 선망의 유럽공동체는 유고슬라비아 코카서스 지방에서 벌어지는 ‘형제살육’에 버금가는 민족분규를 예상하지도 못했고 저지하지도 못했다. 또 대부분의 유럽공동체 회원국은 실업·파업·불안한 치안상태·각종 시위 등의 문제를 노출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공산체제로부터 해방된 민족들에게 민주주의의 새로운 이미지를 심어줄 만큼 긍정적이지 못하다. 마치 잘사는 친척집에 초대받은 가난하고 초라한 사람마냥 동등한 자격의 구성원이 될 것으로 믿었던 소비사회와 자기네 현실사회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보고 동유럽 사람들은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옛 동독 지역에서조차도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가 때로는 공산주의의 색채를 띠고, 드물게는 네오나치즘의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벨의 숭고한 가치가 패배한 이유

가장 당혹스러운 예는 아마도 체코슬로바키아의 현실일 것이다. 2년반 전 이른바 ‘비로드 혁명’이라는 평화적이며 범국민적인 혁명을 마무리지으면서 바출라프 하벨은 국회에서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어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으로 선출됐었다. 하벨은 1968년 모스크바가 세워놓은 옛 정권 아래에서 여러 차례 투옥된 경험이 있는 저항운동 지도자이자 극작가였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치러진 국회의원서거와 대통령선거에서 하벨의 지지자들은 1차 투표에서 참패했고, 그 자신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 두 공화국으로 분리되는 것은 기정사실이 됐다.

이는 부분적으로 하벨과 그의 협력자들의 실책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슬로바키아인이 체코인의 주도권 장악에 대해서 느끼는 반감의 정도를 간파하지 못했고, 여기에 슬로바키아 지역의 주요 수입원이던 무기산업이 국제적인 해방 무드로 큰 타격을 받게 된 점도 알았어야 했다. 그런데도 하벨은 동서를 통해 숭고한 용기·불편부당·자유의지·민주주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실패 역시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그의 실패는 전세계에서 이러한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이들의 실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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