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목격한 생체실험”
  • 남문희 기자 ()
  • 승인 2006.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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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세균전부대 통역관 지낸 崔亨□씨 증언



 崔亨□씨가 중국 山東省의 성도 濟南에 주둔했던 ‘日本 北支□파견군 濟南지구 방역급수반’에 중국어 통역관으로 차출된 것은 태평양 발발 직후인 42년 2월이었다. 평북 義州가 고향인 최씨는 중국 河北省의 天津시립초급중학교 2학년에 다니다가 중·일전쟁을 맞았다. 16세 때 일본군에 통역관으로 차출돼 약 4년간 일선부대를 전전하다가 이곳의 방역급수부대로 전출온 것이다.

 방역급수부대의 외형적 임무는 일선 군부대에 대한 식수 공급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군 방역급수부대는 東京 군의학교 안에 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중장의 방역연구실 휘하 세균전 부대들의 별칭에 지나지 않았다.(《시사저널》146호 참조) 세칭 ‘이시이 부대’라고 불린 세균전 부대는 만주 하얼빈의 731부대를 필두로 중국내에 북경(1855부대) 남경(多□1644부대) 광동(8604부대) 등 네곳과 싱가포르에 한곳(9420부대) 등 모두 다섯곳에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최씨는 이들 지역 외에 제남지역에도 세균전부대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증언했다.

 

 장티푸스 균을 음식에 타 먹이기도

 최씨가 이 부대의 내막을 소상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 부대에서 유일한 중국어 통역관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부대에 근무한 1년6개월 동안 수많은 생체 실험 과정에 통역관으로 참석해 그 참상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일반인들의 통제가 엄금돼 있던 부대의 안쪽에는 1백여명의 중국인 포로를 수용해 놓은 수용소가 있었다. 포로들은 1방에 10명씩 10개방으로 나뉘어 감금돼 있었다. 밖에는 고압선을 설치했고, “접근하는 자는 사살한다”는 푯말을 5m 간격으로 걸어놓았다.

 부대에 배속된 지 1주일쯤 지난 어느날 그는 말로만 듣던 생체실험을 처음으로 목격했다. 천연두균을 포로들에게 투입해 병세의 진전 상황을 관찰하고 새로 개발한 백신의 효능을 알아보는 실험이었다. 약 20명의 포로들이 수용소에서 끌려나왔다. 그들은 백신을 미리 맞은 그룹과 그렇지 않은 그룹으로 나뉜 뒤 차례로 천연두균을 맞았다.

 실험기간 동안 포로들은 3면과 천장에 반사경을 부착하고 마이크까지 설치한 특수실험실에 감금되었다. 일본인 군의관들은 밖에서 병세의 진전 상황을 체크하고 환자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4,5일쯤 지나면 백신을 투여하지 않은 포로 중 약 85%가 병원균에 감염돼 고통을 받았다. 그중 몇사람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사망하기도 했다. 일본인 군의관들은 시체에서 대뇌 소뇌 심장 등 주요 장기를 떼어내 포르말린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소각장에서 불태워 버렸다.

 이 부대의 실질적인 임무는 이와 같이 전장에서 사로잡은 포로들을 대상으로 천연두 콜레라 장티푸스 페스트 등 세균들로 생체실험을 해 백신이나 세균무기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은 이 실험을 위해 장티푸스나 콜레라균을 음식물에 섞어 포로들에게 먹이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고 최씨는 증언했다.

 실험대상은 수용소 내의 포로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중국인 마을을 대상으로 콜레라나 페스트 등 풍토병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이 실험은 현지에 파견된 일본인 관공서까지 동원해 대대적이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일본군 병사 몇명이 인근 마을의 개똥을 수집해 여기서 병원균을 분리해낸다. 이 병원균을 1차적으로 포로들에게 실험해 거기서 콜레라균이나 페스트균이 발견되면 이것을 2차로 음식물에 주입해 동네 개들에게 은밀히 나눠먹인다. 며칠 후 병원균이 퍼지면 관공서를 동원해 이 지역을 전염병 감염구역으로 선포해 외부와 완전 차단한다. 마을 사람 전체가 온전히 생체실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실험재료를 확보하기 위해 방역급수부대는 다른 일본군 부대의 지원을 받아 주기적으로 토벌작전을 전개하기도 했다. 포로로 끌려온 사람은 대부분 미처 피난하지 못한 인근 농민들이었다. 이들은 서류상으로는 군인이나 유격대원으로 둔갑해 실험용 모르모트로 사라져갔다. 이들 중에는 중국 대륙으로 흘러들어가 살고 있던 한국인 유량민도 상당 수 있었을 것으로 최씨는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은 신분을 위장하기 위해 중국이름으로 변성명을 했기 때문에 그 숫자는 파악할 수 없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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