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의 적, 환상과 오해
  • 장영희 기자 ()
  • 승인 2006.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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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부패 · 지하경제 척결” “증시 악영향”등 이점 · 부작용 과장돼



 한 재벌총수는 돈의 속성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돈은 어둠과 밝음 속을 왔다갔다 한다. 이 돈의 속성을 거스르지 말아야 돈을 벌 수 있다. "그는 금융실명제(이하 실명제)가 되면 돈이 햇빛에 노출되므로 기업인들이 꺼릴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사업을 하려면 정치자금을 주어야 하고 밝히지 못할 비자금도 필요한데, 유리알처럼 투명해지면 이 돈의 조달과 처리가 곤란해진다는 것이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실명제 실시를 찬성한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3당 대통령후보들도 앞다투어 실명제실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지난 83년과 90년 두차례 좌절된 실명제가 다음 정권에서는 실시될 것이라는 전방도 있다.

 그러나 실명제를 둘러싼 논의는 오해와 무지로 얼룩져 있다. 실명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이나 부작용이 과장되거나 잘못 전달되고 있다. 또 실명제가 주는 이익이 크다면 어떻게 실시해야 할지 구체적 논의도 하지 못한 채 '단계적 실시'나 '즉각 실시' 등 소모적 논쟁만 벌여왔다.

 재무부의 한 관계자는 "기득권층은 내용에 대한 이해가 없이 공포심을 갖고, 지지계층은 과잉 기대를 한다. 이들은 실명제를 이념으로 인식한다. 실명제는 제도이고 문화일 뿐이다"라고 지적했다. 실명제 도입은 최종목표가 아니라 한국경제가 선진구조로 가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라는 얘기다.

 실명제를 둘러싼 가장 큰 오해는 실명제를 이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실명제의 정의는 단순하다. 땅 · 자동차 · 집 등을 살 때 실명을 쓰는 것과 같이 금융기관에 예금을 하거나 주식을 사고팔 때도 자신의 이름으로 하자는 것이다. 또 이 거래에서 발생하는 소득을 개인별로 합산해 과세하자는 두가지를 골자로 한다. 결국 그동안 잘못된 경기규칙을 바로잡자는 것이 실명제의 취지이므로 자유경쟁 질서를 원칙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배치하는 것도 아니다.

  실명제를 실시하면 세금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생각도 오해 가운데 하나다. 현재 실명거래에는 21.5%의 세율을 적용하고 비실 명거래에는 64.5%로 중과하고 있다. 정부는 이같은  세율이 높다고 보고 실명제를 실시하기 전에 세율을 내리려 했다. 실명거래자들은 오히려 세금을 덜 낼 수 있고, 실명으로 전환한 사람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부담이 적어질 수 있다는 것이 재무부 세제실의 설명이다.

 부동산투기 재연 가능성 많아

 실명제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점도 과장된 부분이 많다. 지지계층의 상당수는 실명제 실시로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부정부패가 척결되리라고 믿는다. 재무부 김용진 세제실장은 "실명제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라면서 공정한 분배와 형평을 실현하는 가장 유익한 제도라고 지적했다. 한 경제학자는 "우리 사회의 이중구조 중 하나를 푸는 열쇠가 실명제"라고 말했다. 실명제를 통해 정부는 금융자산을 누가 얼마나 어떤 형태로 가졌는가를 알게 되 공평한 과세에 한걸음 다가갈 수 있다. 세제의 가장 큰 문제점인 불공평 과세를 상당히 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의 정확한 재산 실태를 파악할 수 있어 경제정책의 합리성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지하경제를 발본색원할 수 있으리라는 시각에도 문제가 있다. 실명제가 정착하면 돈이 햇빛  많이 노출되겠지만 자기의 돈이 드러나기를 꺼리는 사람은 여전히 숨는 방법을 찾을 것이며, 남의 이름을 빌려쓰는 것(借名)도 가능하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지하경제 규모의 축소를 바라지만 크게 줄어들 것으로 보기 어렵다"면서 그런 현실은 실명제가 잘되는 선진국에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명제가 불러일으킬 부작용도 잘못 알려 진 부분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이 돈의 해외도피와 증시에 끼치는 악영향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극도로 알려지기를 꺼리는 돈은 해외로 달아나려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은 기본적으로 수익률의 높고 낮음에 따라 흘러다닌다. 국내에 핫머니가 들어오는 이유는 한국의 금리 수준이 높은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돈이 대거 해외로 도피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증시에 끼치는 충격이 크다는 말도 다소 과장된 것이다. 대우경제연구소 이한구 소장은 "과세가 이루어지면 투자수익률이 떨어져 증시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내부자거래를 어렵게 하는 등 공정거래 풍토를 조성해 증시안정에 기여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명제 반대론자들의 주장 가운데 유일하게 타당성을 지니는 부분은 부동산투기가 재연되리라는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한 임원은 "금융권에서 탈출한 돈이 부동산 등실물투기에 몰릴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정부는 이를 우려해 실명제 실시 전에 토지공개념 3개법을 발효해 부동산투기를 진정시키겠다는 구상을 했고, 이 3개법은 90년 국회를 통과했다.

 실명제의 실시가 물가 · 고용 · 저축 · 투자 · 생산 · 경제성장 · 국제수지 · 기업의 자금사정 · 소득 분배 · 금리 등에 어떻게, 얼마만큼 영향을 끼칠지 구체적으로 분석된 바가 없다. 금융저축이 다소 줄고 금융자산 구성상 큰 변화가 예상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 정도다. 한국조세연구원 최 광 연구부장은 "투자 몇 저축에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너무 많고, 저축 및 투자와 경제성장의 상호관련성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어려운 작업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고용이나 경제성장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정부는 여러가지 보완조처를 강구했다. 개혁에 따른 부작용을 예상했기 때문이다. 특히 실명제는 심리적인 영향이 켰다. 89년 4월 발족된 금융실명거래실시준비단은 자금출처 조사(자금축적 경위)와 비밀보장 등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골머리를 않았다. 비실명의 돈이 실명으로 전환될 때 과거를 묻는 자금출처를 조사하면 실명으로 유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세금을 많이 내는 것보다 자기의 재산이 알려지기를 더 꺼리는 사람들에게는 정부가 금융정보를 과세 목적 외에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다는 비밀보장에 관한 규정을 믿게 해줘야 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실명제의 목적은 과거의 잘못을 들추어내 처벌하는 게 아니다.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실명제 정착을 기대한다는 차원에서 관대하게 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종합과세 시행방법도 여러가지 안이 검토됐다. 완전 종합과세를 해야 실명제가 완결되지만 어떤 단계로 하느냐에 따라 충격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일차적으로 모든 금융상품을 대상으로 실명거래만을 유도하거나 이자와 배당소득만 종합과세하고, 주식 양도차익 과세는 상당 기간이 지난 후 제일 뒤에 할 방침이었다고 문희갑 전 청와대경제수석비서관은 말했다.

 실명제가 되면 소득보고서를 작성해야 하는 사람이 크게 늘고, 이를 처리할 조세행정능력도 키워야 한다. 재무부는 종합소득세 신고자가 80만명에서 8백만명 수준으로 늘 것으로 추정한다. 또 전산화 정도와 자기앞수표 대체안 등에 기술적 어려움이 있지만, 제1의 난관은 반대세력의 엄청난 힘이다. 82년 1차실명제 계획의 주역인 강경식 전 재무부장관은 그의 저서 《가난 구제는 나라가 한다》에서 "7 · 3조처 실시는 가능했다. 그러나 다양한 논의의 기회를 허용했기 때문에 결국 실명제 실시는 무산됐다"고 적고 있다. 실명제는 평화적이고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극소수 개혁주체가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같은 힘의 대결이 다음 정권에서 과연 가능할 것인지, 가능하다면 누가 추진 주체가 될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82년 31조원이던 금융자산은 92년 8월말현재 2백50조원이 넘는다. 분명한 사실은 경제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실명제를 실시하는 데 치러야 할 대가가 커진다는 점이다. 정부는 실명제 시행을 자꾸 어렵게 만들고 있다. 실명이 되지 않는 금융상품 판매를 허용하고 비과세 저축을 늘려놓았기 때문이다. 윤원배 교수(숙명여대 · 화폐금융)는 "언제 해도 해야할 일이라면 정부는 차근차근 준비를 해야 한다. 결국 최고통치권자의 의지가 실명제를 실시하게 만들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2백50조원의 돈주인이 누구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꼬리표를 다는 과제는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각종 여론조사에서 잘 나타난다. 지난 두번의 좌절에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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