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읠 제자 1백만명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1.09.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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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즈니쉬는 1931년 인도 마드히야 프라데쉬주의 한 자이나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직후 히말라야 기슭의 한 지방으로 옮겨져 외조부 밑에서 10세 때까지 성장했다.  히말라야에서 보낸 어린시절을 라즈니쉬 자신은 그 어떤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황금빛 유년시절’이라고 회고한다. 이 기간 동안 전적인 자유가 그에게 주어졌으며, 외조부가 누구도 그에게 기존의 규범이나 인생관을 주입시키지 못하도록 보호했기 때문이다.

 다시 출생지로 돌아와 국민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그의 주목받는 행동은 시작되었다. 먼저 입학원서의 종교란에 어린 그는 어떤 것도 써넣기를 거부했다. 종교는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부모의 종료를 그대로 따를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우가를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삶과 죽음에 대한 극심한 의문에 시달리다 21세인 1953년 영적 깨달음을 체험했다.

 대학 졸업 후 9년간 자발푸르대학에서 철학교수를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독서에 열중했다. 그 독서량은 엄청나서 10만권에 달할 정도였다. 자신의 깨달음을 전달할 세상의 언어를 배우기 위해서였다고 그는 말한다.

 대학교수직을 떠난 그는 인도 전역을 여행하면서 대중강연을 통해 전통적인 종교 지도자들의 무지함과 종교의 허구성을 신랄하게 비판해  충격을 주기 시작했다. 특히 인도의 대성인으로 숭배되는 마하트마 간디를 무능력자라고 집중 공격해 논란을 일으켰다.

 1970년부터 그의 주변에 종교인들과 학자, 구도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특히 이 기간 동안 새로운 정신을 찾아 유럽과 미국에서 몰려온 젊은이들이 그의 제자로 입문했다. 이때부터 그는 아침과 저녁시간에 연일 계속된 가의에서 동서고금의 거의 모든 경전과 사상서를 깊은 통찰력과 설득력있는 논조로 재해석해 나갔다. 부처 예수 노자 장자를 비롯해 피타고라스, 헤라클레이토스, 칼릴 지브란, 니체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이 거쳐간 각종 신비서들에 대한 영어 강의는 두꺼운 책으로 4백여권이 되었다. 서양의 철학자 심리학자 과학자 영화배우 음악가 등이 그의 제자로 합류했다. 이후 공식적인 제자수만 1백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음악 ‘실크로드’의 작곡가 기타로도 그의 제자가 되었으며 영화 ‘대부’를 감독한 코폴라의 아내이자 할리우드 사교계의 대표적 여성 ‘하시야’도 제자가 되었다. 한국에서는 무용가 홍신자 시인 류시화씨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80년대 초 신병치료차 미국으로 건너간 라즈니쉬는 오리건주의 버려진 사막을 구입해 수만명의 제자들과 함께 명상센터를 건립했으나 “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어리석음과 기독교의 허구성을 맹렬히 비난한 탓으로” 5년 후 강제추방당했다. 추방 직전 미국에서 2주일간 6곳의 감옥을 끌려 다니면서 ‘탈륨’이라는 약물이 그에게 주입되었으며, 이로 인해 수년간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고 그것이 죽음의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고 그의 제자들은 주장한다. 미국 정부느 ㄴ그를 추방한 후 세계 7개구에 협조공문을 띄어 그의 입국금지 조처를 요청했다. 그러나 이후 열린 미 의회 청문회에서 법무장관은 라즈니쉬에게 범죄 사실이 없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나 그의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고 말했다. ‘오리건 스캔들’로 널리 알려진 미국 추방사건 이후 라즈니쉬 진영에서는 언론매체들이 라즈니쉬를 ‘섹스 교주’ ‘에이즈 감염자’라는 식으로 왜곡전달했다고 반박했다.

 1985년 다시 인도로 돌아온 라즈니쉬는 봄베이 근처의 고원도시 푸나에서 가르침을 펴다가 1990년 1월19일 6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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