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이을 준비하는 양김 · 전씨 아들들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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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일 · 전재국시 총선출마 움직임… YS 차남은 측면 지원

“숨을 한번 마음대로 못 내쉬는 청년기를 보냈다.” 한 야당지도자의 2세는 부친의 정치적 행보에 누를 끼칠세라 조심스럽기만 한 ‘정치인 2세’의 고충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정치인 2세들이 공식적인 정치입문을 통해 ‘2세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꾀한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당사자나 주변에서 14대 총선 출마가능성을 완곡하게 밝히거나, 본인이 직접 정계진출을 도모하진 않더라도 부친의 정치활동을 활발하게 돕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두 리틀 김’과 ‘리틀 전’이 그들이다.

출마가 가장 유력해보이는 정치인 2세로는 金大中 신민당총재의 장남인 弘一씨(45)가 꼽히고 있다. 정치인 2세 가운데서도 가장 연장자인 그는 정치기량이나 정치수업시간을 따져도 단연 선두주자다.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재학시절인 지난 71년 부친의 선거운동으로 일찌감치 정치활동에 눈을 뜬 그가 각 대학 학생회장 출신과 복교생들 모임을 모태로 김총재의 가장 강력한 친위조직인 ‘민주연합청년회’(연청)를 만든 것은 80년 2월. 신군부세력에 의해 강제 해체당하는 탑압을 겪은 뒤 87년 여름 재건된 ‘연청’은 그해 대통령선거 때는 2백20여개 지역의 30만 회원이 김대중 후보의 전위대로 활약했고, 이후에도 각종 선거와 대중집회에서 대중동원과 경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연청의 활약을 비판적으로 보는 당내 시각도 있다. 수난기 야당의 강력한 버팀목이 되기도 했지만, 김총재에 대한 지나친 충성심은 당내 민주화의 한 장애요인이라는 것이다. 연천의 회장 · 고문 등으로 연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김홍일씨가 88년 후원회장으로 한발 물러난 것도 당내외의 비판적 여론을 감안했기 때문이라는 후문이다.

연청에 대한 평가가 이중적이듯 김씨에 대한 정치권의 평가도 매우 이중적이다.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원내가 아님에도 자금과 공천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른바 ‘동교동 황태자’라는 시각과, 정세판단력 등 탁월한 정치적 자질로 보아 오히려 ‘김대중의 아들’이 아니었더라면 벌써 원내 진출을 했을 것이라는 시각이 교차하는 것이다.

그의 국회의원 출마가 거론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3대 총선 당시 연청의 활약상과 관련, 김씨의 공천이 강력히 거론됐지만 ‘총재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김홍일씨 자신은 13대때의 경험과 최근 당내 민주화를 둘러싸고 빚어지는 미묘한 상황을 의식, 자신의 14대 출마 여부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그러나 연청의 강력한 요구, 장년에 이른 나이 때문에 당내의 큰 반발이 예상되지 않는 한 14대에는 어떻게든 진출을 모색하리라는 게 주변의 관측이다. 연청의 한 관계자는 “부자지간의 세습이라는 주변의 시각과 당내 분위기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본인은 14대 진출쪽으로 상당히 기울고 있다”며 “출마하게 된다면 호남이나 서울쪽이 될 것이다”라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정가서는 全斗煥 전 대통령의 장남 宰國씨(33)의 총선출마설도 끈질기게 나오고 있다. 청와대를 ‘화려한 감옥’으로 표현하는 등 정치와는 비교적 무관하게 지냈던 그가 정치문제에 관여하게 된 계기는 6 · 29선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노태우 후보와 전대통령 간의 모종의 ‘심부름’을 맡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정치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부친의 백담사행 이후 백담사와 서울을 오가며 서울의 기류를 전달하면서부터라고 한다. 줄곧 부친의 심부름에만 매달려온 그는 최근 연희동 본가에서 분가함과 동시에 단행본 출판사 ‘시공사’의 이사(서울 용산구 원효로 소재)를 맡아 사회인으로 재출발했다.

그의 정계진출에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알려진 큰아버지 기환씨(62)가 최근 고향 경남 합천군 율곡면에 동호실업(뱀장어 양식업) 사무실을 낸 것도 ‘현지여론 탐색과 장조카의 지역기반 마련’ 때문이란 추측이 나돌고 있다. 연희동의 한 관계자는 “재국씨가 5공의 명예회복을 위해 정계진출 희망을 강력히 비치고 있다. 全斗煥 전 대통령이 어떤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자신이 못다 이룬 꿈, 잘못한 일을 자식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게 인지상정 아니냐”면서 그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았다.

이와 관련, 최근 몇몇 언론서는 “전두환씨가 전직 국회의원인 국민대 김영작 교수에게 아들의 정치수업을 부탁했다”는 보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정치교육을 부탁받았다’는 당사자인 김교수는 “하산 이후 함께한 자리서 아직 어린아이니 잘 좀 지도해달라는 의례적인 부탁이 있었을 뿐, 정치공부를 지칭한 것은 아니었다. 그뒤 재국씨를 만나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전재국씨가 출마할 경우 5공과 6공의 화해 차원서 민자당이 공천을 줄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연희동측이 ‘6공에 대한 응어리와 최근 오대양사건 연루설을 의도적으로 흘린 데 대한 섭섭함’을 풀지 못한 상황에선 무소속 혹은 이른바 5공신당으로 나올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보인다.

金泳三 민자당 대표최고위원의 차남 顯哲씨(33)도 직접적인 정계입문쪽은 아니지만 활발한 측면지원을 하고 있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던 그가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지난 87년 대통령선거 때부터. 부친의 선거운동을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둔 그는 88년 1월부터 대통령 선거 당시의 경험을 되살려 여의도에 ‘중앙조사연구소’라는 여론조사기관을 설립, 정치 여론조사를 통해 부친의 정치적 운신에 적지않은 보탬이 돼왔다. 이 연구소는 한때 ‘YS의 대언론 로비와 홍보조정 기관’으로 언론에 의해 부풀려지기도 했다.

정치에 입문한 ‘2세 정치인’ 상당수
그는 3당합당 직후 본래의 중앙조사연구소에 통일민주당 전산실 기능을 통합해 확대된 ‘민주사회연구소’(서울 광화문 소재)서 행한 여론조사 결과와 정책방향 등을 취합, 김대표에게 제언하고 있다. 최근엔 김대표와 소장 경제학자들의 만남, 과거 노태우 후보의 선거홍보를 맡았던 홍보 전략전문가 ㅈ씨의 YS진영 합류 등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민주계 내서는 얼마 전부터 그가 단지 정책적 보좌나 젊은 세대의 기류 전달 정도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에도 ‘자기 의견’을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민주사회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정치 9단인 김대표가 프로 입문도 안한 아들에게 정치참모 역할을 맡기겠는가. 참모로서의 역할과 개인적 심부름과는 별개이다”하고 일축하면서도 “잡음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라도 내년초쯤 미국 유학을 떠날 계획인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정치 대물림은 우리 정당정치사의 연륜을 감안하면 있을 법한 일이다. 이미 정치에 입문한 ‘2세 정치인’도 상당수 있다. 趙尹衡 국회부의장(59), 민주당 趙舜衡 부총재(57)는 세상이 다 알다시피 유석 조병옥 박사의 아들들이다. 이밖에 야권 차세대 주자로 주목받는 신민당 鄭大哲 의원(47)과 민자당 鄭在文 의원(55)도 잘 알려진 정치인 2세이다.

극심한 정치적 탄압 속에서 “그래도 믿을 건 혈육뿐”의 상황논리 때문에 부친의 심부름을 하다가 자연스레 정치수업을 쌓은 이들 2세 정치인들. 한국정치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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