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통합뿌리에 거름주기 실험
  • 서명숙 기자 ()
  • 승인 1991.09.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뻐하기엔 아직 이르다. 진짜 수권정당이 되려면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통합은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다.” 지난 10일 고질적인 분열과 지역감정을 딛고 야권통합이라는 ‘쾌거’를 이뤄낸 감격과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합동 기자회견장을 빠져나오면서 통합야당 민주당의 한 현역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위로부터의 개혁’도 예고됐다. 통합야당의 최대 주주인 金大中 대표는 합동기자회견의 인사말을 통해 “양당이 단순히 물리적으로 합쳤다는 것만으로 유권자들에게 표를 달라고 할 수는 없다”고 전제, 새로운 정치 세력 수혈, 당내 민주화, 정책정당화 등 통합야당으로서의 체질변화가 뒤따를 것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정당에 대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전략적으로는 수권정당으로 가기 위한 충분조건으로 제기되고 있는 통합야당의 ‘페레스트로이카’. 그것은 어느 정도의 범위로, 어떤 형태로 진행될 것인가.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과도기 거쳐 계보정치 정착될 듯
체질개선과 관련해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당내 권위주의의 불식, 즉 당내 민주화의 진전 여부이다. 지역당의 특수성과 거대 여당과의 힘겨운 대결이라는 상황이 낳은 신민당의 ‘ 1 인 지배체제’나, 지도력 부재가 낳은 구 민주당의 ‘8인 8색’ 양쪽모두 민주적 정당의 리더십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통합야당 내에서 최소한의 당내 민주화는 가능하리라는 게 일반적인 전망이다. 물론 유엔정국의 허를 찌른 야권통합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의도대로 ‘선관위 단독 등록’을 끌어냄으로써 김대중 대표의 대외적인 위상과 대권주자로서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진 것만은 사실이다. 반면 당내에서 김대표의 장악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공천 ·정치자금 등에서 거의 전권을 행사했던 과거와는 달리 김대표가 제어하지 못하는 ‘ 10분 의 4’라는 민주계보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대표가 이끄는 민주계는 과거 야권 내 계보임을 선언했던 신민당 정치발전연구회(정발연) ·평민연 등과는 달리 지분과 공천권을 갖는 집단이므로, 이는 명실상부한 계보정치 시대의 개막을 의미한다. 건전한 계보를 통한 다양한 의견의 수렴과 합의는 자연히 당내 민주화로 직결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신민계와 길항작용을 벌일, ‘4’의 지분을 가진 이대표의 실질적인 계보 관리 능력에 강한 회의를 드러내는 시각도 있다. 비록‘4’의 지분은 갖고 있지만 자금력과 정책, 그리고 인적 결합력에 있어 눈에 띄게 떨어진다는 것이다. 합당을 거부한 민주당 비주류의 한 원외지구당 위원장은 “이기택과 김영삼은 다르다. 누구도 이대표를 위해 탈당하거나 몸을 던질 사람이 없다. 게다가 김대중 대표의 탁월한 흡인력을 감안하면 민주당 출신 사람들은 멀지 않아 공중분해 되고 만다. 한마디로 김대중 정당을 면할 수 없다”라며 민주당내 민주계 독자계보 가능성을 비관적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민주계의 결합력 정도와 관계없이 지분과 공천권, 지역정서로 말미암아 최소한의 계보유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당 일각에서는 그동안 야권통합과 야당 내 개혁을 강하게 요구해왔던 현역의원 일부와 정발연 평민연 신민주연합 민주연합 등이 ‘제3계보’를 형성할 가능성도 조심스레 거론되고 있다. 통합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했던 구 민주당의 李富榮 부총재도 “나눠먹기식이 아닌, 정책적 입장에 따른 계보가 형성돼야 한다”면서 “신진운동을 주도하기 위해 현역의원을 포함해 양 계파 내에서 개혁적 입장에 동의하는 세력들이 ‘헤쳐모여’를 통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 재야운동권 출신인 이들 세력들이 자연스러운 ‘인식의 공유’는 할 수 있지만, 실질적인 계보형성은 불가능하리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계보형성의 결정적 요소인 공천권과 정치자금 동원력이 없기 때문이다. 신민당출신인 평민연과 신민주연합의 경우, 비록 재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김총재와의 거리가 더 가깝다는 점도 계보형성을 불가능하게 하는 측면이다. 다만 이들 세력이 당분간은 당내 민주화 등 이슈에 따라 연대하는 정도의 ‘심정적 동조 세력’으로 머물다가 공천권에서 해방되는 14대 총선 이후 계보화 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당내 민주화를 강력하게 요구할 제3세력의 인물로는 鄭大哲 盧武鉉 李哲 의원과 李富榮씨를 비롯, 탈당한 李海瓚 의원 등이 꼽히고 있다.

한편 김대표 자신이 당내 민주화의 압력에 밀려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도 있다. 김대표의 한 측근은 “거대여당에 맞서는 어려운 상황에서 신민당이 굴러가다 보니 강한 통솔력이 불가피 했다. 이제 彈野 ·巨野가 된 만큼 김대표의 이미지 쇄신과 지역감정 수습을 위해서라도 다양한 의견을 충분히 수렴하는 당내 민주화를 추진할 것”이라고 말한다.

김대표가 주도하는 형식의 당내 민주화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요구’가 자칫 내분의 양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조용한 개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경우 대권주자로서의 위상이 위협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 매우 제한적인 형태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다. 김대표가 많은 지분양보를 해가면서도 끝까지 ‘법적 대표권’만은 고수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다.

당헌 ·당규상에 최고의결기관으로 규정 될 10인 최고회의가 명실상부한 집단지도체제적인 기능을 할 것인가도 당내 민주화의 큰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신당 성패 새 인물 충원에 달렸다”
당내 민주화에 못지않게 관심을 끄는 것은 새 당이 얼마나 신선한 인물로 채워질 것이냐 하는 점이다. 단순한 양적 통합만으로는 정치불신 심리, 기성정당 혐오증에 빠진 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권에서는 ‘새 피의 수혈’이야말로 목전에 다가온 총선은 물론이고 수권으로 가는 궁극적인 지렛대가 되리라는 분석이다. 서 울대 李珪範 교수(사회학)는 “통합이 됐다고는 하지만 구태의연한 모습을 벗으려면 새로운 인재를 수용해야 한다. 현대 산업사회의 다원화된 요구들을 풀어줄 수 있도록 구체적인 정책적 대안과 비전을 가진, 환경 공해 교통 주택 관련 전문가 영입을 고려해야 한다”며 신당의 성패가 새 정치엘리트 충원에 달려 있음을 강조한다.

민주당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합당선 언문이 조직책 선정과 관련, ‘인물 본위 선 정’ 원칙을 강조한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민주당은 특히 통합프리미엄을 최대한 기대할 수 있는 전략지역인 서울 ·경기지역에 참신한 인물을 동장시킴으로써 전국적인 파급효과를 노리는 전략을 세웠다고 알려지고 있다. 민자당 측에서 가장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이 대목이다. 통합의 프리미엄을 가진 민주당이 참신한 인사를 내보 낼 경우, 민자당으로서도 대응방안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양당 간의 인물영입 경쟁으로 정치권 전반에 걸친 물갈이가 가능하리라는 희망 섞인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지분협상 결과를 보면 ‘새 피 수혈’이 과연 기대만큼 가능할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있다. 당초 양당 사이의 통합협상에서 오갔던 지분비율은 ‘ 6대 4대 2’. 그러나 9일 오전 양당 총재만의 극비협상 이후 ‘ 2 ’라는 꼬리가 슬그머니 떼어진 채 ‘ 6대 4 ’로 귀착되고 말았다. 신민 ·민주의 지분은 그대로 유지한 채 외부인사 영입몫만 없애고 만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 소장의원들은 김 ·이양 총재가 기득권 유지를 위해 담합함으로써 정당 문호개방과 체질개선 기회를 박탈했다고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합당으로 양 계보가 계파 내의 기존 조직책마저 ‘감량해야 할 판에, 제도적으로 몫이 보장되지 않은 외부인사 영입이 극히 제한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특히 신민계의 경우 전략지역인 서울지역의 ‘새 인물’ 영입 폭은 민주계에 비해 더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현역의원 15명의 공천 탈락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함을 고려하면, 새 얼굴 등장이 가능한 지역구는 신민몫으로 할당된 25개 중 10개 정도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기존 원외지구당 위원장의 ‘지역 다지기’를 감안하면 그 폭은 더 줄어든다. 따라서 현역의원 단 2명으로 ‘ 10분의 4 ’의 지분을 확보해놓고 인물난에 허덕이는 민주계가 과감하게 ‘새 인물’을 영입해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물론 신민계의 경우도 정책정당으로의 탈바꿈과 이미지관리를 노리는 김대표가 기존 당료와 조직책들을 희생시켜서라도 상당수의 기술관료와 각 분야 전문가, 사회운동가들을 공천할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이번에야말로 인물 위주로 공천해야 한다”는 호남지역의 여론을 반영, 상당수 현역 의원들을 교체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결국 통합야당의 ‘새 피 수혈’은 기존세력과 인물들이 버티고 있는 현실과 산업화사회에 걸맞는 새 얼굴(정책야당)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 중 어느 쪽에 비중이 두어지는가에 따라 그 범위가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영남지역에서 옥쇄해야 한다”
통합야당 출범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보다도 한국정치를 끈질기게 괴롭히며 파행적 궤적을 그려온 ‘지역성’ 극복의 계기를 마련한 데 있다. 김대중 대표도 이와 관련, 창당선언 기자회견 석상에서 “그동안 우리를 괴롭혀온 지역감정이라는 악마의 머리통을 깨부수고…”라는 다소 원색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김대표는 당직배분 과정에서도 원내총무와 대변인 동 주요 당직을 민주계측에 과감히 할애하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자칫 흡수통합이란 인상을 줌으로써 애써 실현한 지역통합 효과를 반감시키면 안 된다는 전략적 배려인 것이다.

그러나 통합야당의 완전한 지역성 극복은 14대 총선에서 영남지역의 지지를 얼마나 끌어내는가에 달려 있다는 게 중론이다. 정치인들 간의 상충부 결합이 곧 지지기반의 결합을 의미하진 않기 때문이다. 통합과 관련해 영남지역의 지역정서가 긍 ·부정 어느 쪽인지 아직 미지수인 데다 “영남지역의 정서”를 내세운 박찬종 김광일 의원을 비롯한 영남지역 일부 원외지구당 위원장들의 잔류선언이 신당출범에 ‘생채기’를 낸 것이 사실이다.

심지어 민자당 내 민주 계에서는 “이번 통합으로 YS 지지라는 영남지역의 투표성향이 더 분명해질 것”으로 자신하고 있다.

합당 이후 정가에서는 영남지역의 지역정서와 해당 의원의 취약한 지역구 기반 때문에 이기태 대표(부산 해운대구)의 전국구 진출설, 노무현(부산 동구) 金正吉(부산 영도) 의원의 서울 진출설이 끈질기게 나돌고 있다. 잔류한 민주당 비주류들은 이들이 부산지역을 포기하면 “야합합당과 야반도주”로 집중포화를 퍼붓겠다고 벼르고 있다.

통합된 민주당 현역의원들이 영남지역 출마를 꺼리고, 그 결과 총선이 영남 ·비영남 구도로 귀결된다면, ‘지역성 극복’이라는 통합야당의 실험에는 일단 브레이크가 걸릴 수밖에 없다. 여전히 전국 정당으로서의 이미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또 다른 형태의 지역감정에 시달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또 한 차례의 분당과 이합집산도 나타날 수 있다.

따라서 신민계에서는 민주당에 최대로 배려하는 대신, 현역의원 3인이 전원 현재의 지역구에 출마해 영남지역 유권자들을 당당히 설득하라는 입장이다. 지역성 극복을 위해서는 옥쇄하는 한이 있더라도 정면 돌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대표는 이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노무현 의원은 “신당이 개혁적 모습을 보임으로써 야권성향의 영남표를 설득할 수 있다고 본다. 문제는 개혁이다”라고 전제하고, “반드시 현 지역구에서 출마해 유권자들로부터 심판을 받겠다”며 서울 진출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체질개선으로 수권정당을 창출하려는 민주당의 ‘개혁실험’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개혁의 주체와 그 역학관계, 사회의 요구에 따라 그 결과는 좌우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 한 것은 불안정한 계보정치의 과도체제 속에 진행될 이 실험은 늦어도 1년 6개월 내에, 빠르면 6개월 내에 시험대에 오르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