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껏 배짱껏 ’ 사치 대중화
  • 김상익 기자 ()
  • 승인 1991.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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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적자 아랑곳 않는 과소비 현장… 근로의욕 꺾고 중산층 오염시켜

씀씀이에 관한 한 우리 국민은 그 어떤 놀라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다. 30만원짜리 브래지어가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고 해도 눈 한번 깜박 않는다. 1백만원짜리 핸드백을 없어서 못판다고 해도, 1세트에 1천만원 부르는 소파를 아무 부담 없이 사들이는 신혼부부가 있다고 해도, 2억원짜리 승용차가 시판되기 시작했다고 해도 분개하거나 서글퍼하지 않는다.

2년 전 미국의 한 언론이 “한국은 삼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렸다”고 신랄하게 꼬집었지만 ‘너무 일찍 터뜨린 삼페인’은 아직도 철철 흘러넘치고 있다. 수입개방이 가속화된 이후 과소비라는 망국병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시내 어느 백화점에서 만난 30대 중반의 한 회사원은 물건 값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비싸 다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시장물건’을 주로 써온 그는 “남의 눈도 있고 해서” 이번에 큰마음을 먹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와 아내에게 선물할 옷을 미리 점찍어두기 위해 백화점을 들렀다는 그가 꼬리표에 찍힌 가격을 눈여겨보며 암산한 내역은 대충 이렇다. 유명상표가 붙은 여자아이 원피스가 9만7천원, 사내 아이 양복 한벌이 10만5천원, 도합 20만2천원. 구두가 3만5천원씩 7만원.

숫자감각 마비시키는 백화점
구두는 2만원대의 국산 구두도 있지만 “디자인도 깜찍하고 신발이 가벼워서 아이들 발 건강에 그만”이라는 여점원의 말에 혹해 일본 수입품으로 결정했다. 여성복 매장에 진열된 옷 중에서 좀 괜찮다싶은 것은 모두 30만원을 넘었다.

월수입이 80만원인 그가 이 달에 받는 돈은 상여금을 포함해 2백만원이 안되는데 이 것만 사도 60만원 가까운 돈이 ‘깨지게’ 생긴 것이다. 게다가 아들녀석이 몇달 전부터 조르던 전자오락기를 사주고,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갔다 오면 아이들 유치원비마저 모자랄 판이다. “처음엔 10만원짜리 아이옷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20만~30만원짜리를 자꾸 보게 되니 10만원도 싸게 여겨졌다. 백화점을 한바퀴 둘러보는 동안 비싼 것만 눈에 띄고 숫자감각도 잃게 되더라.” 모처럼 백화점 구경을 나온 그의 소감이다.

다른 백화점에서는 모피코트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2백만원짜리에서부터 8백만원이 넘는 것까지 수입 모피코트가 즐비했다. 매장 한가운데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주머니들이 탁자를 앞에 놓고 빙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잘 고른 것 같아? ”
“그래, 아주 잘 어울린다니까.”
“저쪽 것이 마음에 들긴 하는데…. ”
한 아주머니가 고가품이 진열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면 됐어. 저런 것은 자가용 족이나 입는 거야.”
자가용 굴릴 형편이 안되는 아주머니들까지 모피코트를 사서 입는다. ‘사치의 대중화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사복 매장에 들러 양복 값을 알아보았다. 국내제품은 대체로 30만원대였으나 수입품은 50만원이 넘었다. 이들 수입품은 대부분 국내 제조회사들이 들여오고 있다. 아동복 만드는 회사, 술 만드는 회사, 속옷 만드는 회사, 신사복 숙녀복 만드는 회사, 냉장고 만드는 회사, 자동차 만드는 회사…, 어느 회사 가릴 것 없이 앞다투어 수입 한다. 싼 것 살 사람은 자기네가 만든 제품을 쓰고, 비싼 것 살 사람은 자기들이 수입한 외국상품을 사라는 얘기다. 기업측으로선 수입상품 때문에 자사 제품이 덜 팔려도 매상이 오르게 돼 있다.

부유층에게 사치는 일상생활
수입개방론자들은 그럴싸한 논리로 수입개방 효과를 이야기한다. 질 좋은 외국상품이 들어오면 국내 제조업과 경쟁을 하게 돼 국산품의 질도 높아지고 가격도 싸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제조업체가 경쟁을 피한 채 양다리를 걸치고 있어 오히려 물건값만 오르고 소비문화는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간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는 모피코트 입은 여성이 국민의 조롱을 받는다”는 국내 언론의 보도가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반대로 중산층 아낙이 모피코트를 입어야 남부끄럽지 않은 풍조가 자리 잡았다.

어느 신사복 매장 점원은 자기네 회사에서 수입하는 또 다른 외국 유명상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상표는 양복 한 벌에 보통 70만 ~80만원, 티셔츠 한 장을 사려고 해도 20만 ~30만원은 줘야 한다.” 그러나 그 매장에서는 그처럼 호사스런 양복을 팔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다. “우리 백화점에 들여와봤자 몇벌 못 팔아요.” 간단한 대답이었다. 국내 최고의 매출액을 자랑하는 이 백화점을 찾는 손님 ‘수준’이 그 상표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그 상표 매장은 대한민국 부자들이 몰려 사는 강남땅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몇 달 전 개봉돼 수십만 명의 관객을 동원 한 미국 영화〈귀여운 여인〉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돈 많은 청년이 우연히 거리의 여인을 만나 1주일간 동거하기로 하고 그녀에게 값비싼 옷을 사 입으라고 돈을 준다. 그녀는 백만장자들이 몰려 사는 베벌리 힐스 부근의 로데오 거리로 나가지만 옷가게에서 옷을 만져보지도 못한 채 점원의 냉대를 받고 쫓겨난다.

값비싼 물건이라면 없는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 ‘신분’이 낮은 사람은 지레 주눅이 들게 되는 이 로데오 거리는 미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서울 강남의 압구정동과 청담동 일대는 ‘로데오 거리’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그 같은 별명에 걸맞게 이곳에서는 부유층의 사치도 사치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것은 ‘일상생활’이다.

어느 안경 전문점에 들어갔다. 모두 수입품이었는데 값은 보통 10만원 안팎이었다. 생각보다는 값이 쌌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던 중 안경점 점원이 비장의 안경테를 보여주었다. 빌로드로 감싼 상자 속에는 20여개의 안경테가 ‘모셔져’ 있었다. 거북 등 껍질을 깎아 만든 안경테는 비싼 것이 3백60만원, 싼 것이 2백50만원이었다.

디자이너의 이름값이 터무니없이 높은 어느 수입 옷가게의 가격표는 일반 백화점과 차원이 달랐다. 동그라미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 2백50만원짜리는 중급품이었고 5백만원이나 하는 실크 원피스도 버젓이 걸려 있었다. 여점원은 “팔려고 내놓은 것이 아니라 그냥 걸어두려고 갖다놓은 것”이라고 변명했다.

“정식 통관절차 밟은 수입품. 매도 말라”
국세청이 지난 9월2일부터 서울 압구정동 논현동 신사동 청담동 일대 호화 사치성 소비재 취급업소에 대해 집중 세무조사를 벌이자 이들 업소는 몸을 사리고 있다. 한 수입가구점 사장은 취재진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냈다. “물론 우리 같은 수입업자도 자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밀수를 하는 것도 아니고 정식으로 통관절차를 밟아 물품을 들여다 팔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세무조사를 실시하고, 언론은 언론대로 흥미 위주로 우리를 매도한다.” 그는 언론으로부터 두들겨 맞은 이후 손님의 발길도 끊어졌다며 절대로 취재에 응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얼마 전 1억원짜리 수입가구가 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지만 국산 가구도 가격이 만만치 않다. 어느 유명 가구점을 찾아가 “좀 잘 사는 집과 혼사가 있는데 혼수 가구를 어느 정도로 마련해야 하느냐”하고 물었다. 점원은 친절하게 목록을 작성해주었다. 10자반 크기 장롱 4백10만원, 킹사이즈 침대 2백만원, 화장대와 거울 1백50만원, 소파 4백만원 등 1천4백 80여만원이란 계산이 나왔다. “큰 회사 이사쯤 되면 이정도 혼수는 해간다”고 했다. 강남의 큰 부자들이 아니라도 혼수가구 장만에 1천5백만원을 쓰는 것이다.

먹고 마시는데 쓰는 돈도 엄청나다. 우리 국민은 ’ 90년 한해 10조6천억원어치나 먹어 없애버렸다. 일요일만 되면 온 가족이 맛있고 값비싼 음식을 혀끝에 굴리기 위해 갈비집으로, 호텔 뷔페로 중형차를 몰고가는 풍경은 조금도 낯설지 않다. 호텔 뷔페에 갈 수 없는 서민을 위해 ‘동네 뷔페’도 우후죽순처럼 생겼다.

하룻밤 술값 1백만원 넘어도 룸살롱 만원
하룻밤 술값으로 1백만원을 넘게 쓰는 사람도 많다. 서울에서 작은 인쇄소를 경영하는 어떤 이는 한달에 열 번 가량 강남의 고급 룸살롱을 찾는다. 4명이서 술 시중드는 아가씨들과 2~3시간 즐기려면 양주 4병은 마셔야 한다. 술이 1병에 10만원씩이니까 술값만 40만원이다. 팀 5만원씩 20만원. 3만 ~4만원짜리 안주도 몇 접시 시켜야 하고, 그냥 놀긴 심심하니 까 밴드도 불러야 한다. 돈 1백만원 쯤은 쉽게 부서진다.

그는 자기는 결코 과소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사람을 술자리에 불러내는 것이 사업의 시작”이라고 했다. 한국에서는 술을 안 마시면 일이 안되니 자기의 술값은 ‘사업비’이지 ‘과소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궁금해 하는 것은 밤 9시만 되면 자리가 없을 정도로 룸살롱이 성업중이란 사실이다. 자기 같은 사람은 팀도 적고 외상이 많아 푸대접을 받는다면서, 그런 술집에서 현찰을 펑펑 쓰는 ‘젊은 친구’들은 도대체 누굴까 의아스럽다는 것이다.

“한달 용돈이 1천만원쯤 된다면 그 돈을 어디다 쓰겠느냐.” 고등학교 동창인 강남의 ‘귀공자’ 몇명과 자주 어울린다는 30대 청년의 되물음이다. 그는 언젠가 호화가구를 파는 가게에 들어갔다가 1개에 7백만원 하는 의자를 보고 몹시 탐이 났지만 감히 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젊은 부부가 그 가게에 들어서더니 “저거, 저거, 저거” 하고 5~6개를 순식간에 주문해 새삼 놀랐다는 것이다.

“한달 용돈을 1천만원씩이나 쓰는 당신 친구들은 도대체 어떤 집 아들들이냐’ 하고 물었더니 “알짜배기 기업체 사장 아들이거나 의사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버지 회사의 이사로 있으면서 일은 안하고 그랜저를 몰고 다니면서 예쁜 아가씨들과 돈 쓰기에 바쁘다고 했다. 그런 친구들이 애인한테 30만원짜리 브래지어를 선물하거나 하룻밤 술값으로 1백만원 쓰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리는 얘기였다.

경제학 책을 아무리 뒤져도 ‘과소비’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는다. 이 말은 언론이 만들어낸 말이다. 그러나 이 말처럼 한국경제를 잘 설명해주는 말도 찾기 힘들다. 80년대말 3저호황을 누리던 우리 국민은 무역수지 적자가 1백억달러에 육박하는 지금도 여전히 흥청망청이다. 일부 부유층에서 비롯된 과소비 풍조는 중산층을 오염시키고 노동자의 근로의욕도 꺾이게 만들었다. 생산 현장에서는 일할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인데 퇴폐 향락산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어린 자녀들도 과소비 ‘학습’
한편 미국의 일부 언론은 한국 정부가 과소비 억제운동을 펴고 있다면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이를 뒤집어 생각하면 한국의 과소비 풍조는 미국 등 선진국의 사치성 소비재 수출에 크게 도움이 된다는 말이 된다. 작년 한해 동안 50개 기업이 수입한 16종의 사치재만도 모두 1억6천만달러어치였다. 이는 작년 우리나라 무역수지 적자액의 3.5%에 달하는 것이다(본지 82호 50~51쪽 참조). 외국산 승용차는 금년만해도 1월부터 8월까지 4백81억1천여만원어치 팔려나갔다.

이런 현실에서 “내 돈 내가 쓰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하는 식의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일부 부유층의 극단적인 사치는 국민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뿐더러 그들이 뿌리는 돈도 ‘정당하지 못한 돈’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30대 초반의 한 회사원은 극단적인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돈은 땀을 흘려야 생기는 것이 아니다. 돈은 망국병이라는 땅 투기와 증권 투기에서 나온다. 그 돈은 다시 과소비라는 망국병 합병증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 9월7일 오후 6시 과소비의 온상 압구정동 어느 백화점 앞 공터에서는 ‘세계의 명품 가을 컬렉션’ 패션쇼가 열렸다. 패션쇼가 시작되기 전부터 수백명의 구경꾼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엄마 손을 잡고 따라나 온 아이들도 많았다. 그 꼬마들은 각양각색의 ‘작품’이 선보일 때마다 저희들끼리 귀엣말을 주고받으며 품평을 했다. 절대궁핍에서 헤어난 지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과소비는 대물림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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