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3은 스스로 말한다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4.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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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제민일보>,증언ㆍ자료 토대로‘4ㆍ3기획물’펴내



 제주 <제민일보> 4ㆍ3취재반의 기자6명은 90년 6월부터 낮과 밤의 일이 달랐다. 낮에는 소속 부서에서 기사를 써야 했고, 밤에는 <4ㆍ3은 말한다> 라는 대형 기획물 취재를 해야 했다. 편집국 기자 50명 가운데 6명이 달라붙어 해오던 밤일이 ≪4ㆍ3은 말한다≫(전2권ㆍ전예원)라는 책으로 묶여 나왔다. 원고지 20장 분량으로 매주 화ㆍ금요일에 연재한 이 기획물은 94년 3월 현재 총 2백 10회가 신문 지면에 실렸고, 지금도 목표로 잡은 5백회를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4ㆍ3역사를 실록 형태로 엮은 이 책의 제목에는‘항쟁’이니‘폭동’이니 하는, 그 사건의 성격을 규정하는 용어가 붙어 있지 않다.“무슨 일이 있었으며, 왜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밝혀내면 4ㆍ3의 성격이 스스로 분명해질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 다.”4ㆍ3취재반의 양조훈 반장(편집부국장)은“이 연재가 끝날 무렵이 되면 4ㆍ3의 성격이 밝혀질 것인 만큼 취재 방향을 4ㆍ3이 스스로 말하게 하자고 잡았고, 이런 이유로‘4ㆍ3은 말한다’라는 제목을 붙였다”라고 말했다. 4ㆍ3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방법은 체험자들의 증언을 채록하고 자료를 입수하며 잘못된 기록들을 바로잡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생존자들의 증언에는 흠이 많았다고 양조훈 반장은 지적했다. 4ㆍ3에 관한 한 40여 년을 벙어리로 있었기 때문에 직접 목격한 것과 들은 것이 범벅이 되어 한 사건을 두고도 여러 사람이 틀리게 증언하기가 일쑤였다.

 4ㆍ3취재반은 전국 도서관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까지 기자를 파견해 자료와 증언을 모아왔다. 증언자의 얼어붙은 입을 녹여 채록한 증언은 미군이 4ㆍ3의 증거물로 기록한 영상물 <제주도의 메이데이>가 사실을 왜곡했음을 밝히고, 47년 3ㆍ1발포사건, 48년 고문치사 사건 전말을 소개해 4ㆍ3이‘대중봉기 형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실증적 단서를 끄집어내고 있다. 특히 제1권은 당시 남한 사회의 모순구조와 미군정의 실책, 제주도의 경제ㆍ사회적 여건 등 前史를 소상하게 밝힘으로써 제주 4ㆍ3이 제주도라는 섬에서만 발생한 단순한 사건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4ㆍ3은 말한다≫가 새로 발굴한 성과는 미군정이 4ㆍ3을‘공산 폭동’으로 규정하게 되는 과정과, 48년 10월부터 전개된 초토화 작전 구상이 미군 첩보부대(CIC)에 의해 제기되었고, 4ㆍ3 희생자의 80%이상이 진압군에게 희생되었다는 것을 기록한 미군 기밀문서를 발굴했다는 점들이 꼽힌다. 또한 진보적 시각에서 쓰여진 자료들의 오류를 밝히기도 했다. 특히‘남로당 지령설’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온 박갑동씨와의 사실확인 인터뷰는, 기존 자료들이 왜곡된 사실을 확인 없이 인용해 4ㆍ3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흐려놓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남로당 지하총책이었던 박갑동씨는 그의저서 ≪박헌영≫의 4ㆍ3관련 부분에서‘남로당 중앙당의 지령에 따라 4ㆍ3사건이 발생 했다’고 밝혔고, 그 주장은 박씨의 과거 직책 때문에 신빙성이 큰 주장으로 받아들여 졌었다. 그러나 90년 6월 <제민일보> 취재반은 일본에 사는 박갑동씨와 인터뷰했던 김종민 기자는 이런 식의 잘못된 사실을 바로잡는 것이 사실 취재보다 더 힘든 일이었다면서“군경과 양민 모두가 피해자였다. 지금 확실한 근거도 없이 교과서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앞으로 세 권이 더 나오게 되면 4ㆍ3의 성격은 저절로 규명될 것으로 확신한다”라고 말했다. 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한 ≪4ㆍ3은 말한다≫는 일본 新幹社에서 한국과 동시 출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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