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부의 대북한·통일 정책 기조가 변하고 있다. 문민 정권이 출범한 뒤로 현정부는 그동안 도덕성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하여 과거와는 다른 유연한 대북정책을 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공개하거나 발표한 대북정책의 변화는 과거와는 또 다른 공세적·적극적 압박 전략으로 전환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상한 관심을 끈다.
우선 관심을 끄는 것은 정부가 4월15일 제2차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에서 그동안 미·북한 3단계 회담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운 남북 특사 교환을 철회키로 결정한 점이다. 이는 남북 양쪽이 다 원했던 정상회담을 위한 특사 교환을 통해서는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정부의 현실적 고민을 담고 있다. 모양새보다는 현실을 택한 셈이다. 그러나 이 날 조정회의 결과를 발표한 이영덕 통일원장관은 “핵문제를 최우선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정부 입장에서 변함이 없으며, 남북 상호 사찰 없이는 비핵화 공동선언 이행과 북한의 핵투명성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입장이다”라고 ‘고리’를 걸어놓았다. 이 고리는 남북한 상호 사찰이 이뤄지지 않거나 이를 위한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 남북한이 함께 재처리 시설을 갖지 않기로 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은 ‘재처리’할 수밖에 없다고 논리가 전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은 물론 미국에 대한 승부수이기도 하다.
결국 ‘선 특사 교환’ 철회로 한국 정부는 사실상 북한 핵 문제를 미국 대 북한 문제로 단순화함으로써 미국 또는 북한이 ‘제재’(또는 전쟁) 또는 ‘평화적 해결’이라는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하는 마지막 ‘위험한’ 카드를 던진 셈이다.
한편 같은 날 조정회의에서는 국제 문제에서 뺀 발을 민족문제 쪽으로 옮겨딛기로 결정했다. 이부총리는 이 날 “정부는 인도주의 입장에서 러시아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 노동자들이 한국에 망명하기로 희망할 경우 희망자 전원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라고 밝혔다. 이는 한국 정부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핵개발에 집착하는 북한 정권과, 생활고와 인권 침해에 시달리다 생존을 위해 탈출하는 북한 주민에 대해 이원화 정책을 구사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정부는 ‘인도주의 입장’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는 집단 귀순(망명) · 내부 붕괴 · 흡수 통일이라는 수순을 배제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밝힌 셈이다.
결국 정부가 벌목장을 탈출한 북한 노동자를 적극 수용키로 결정한 것은 이병태 국방부장관의 ‘통일전역 수행’ 발언과 함께 정부의 통일정책 기조가 공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대한 징후인 것이다. 후자가 ‘불바다 발언’에 이은 계산된 군사적 경고라면, 전자는 구체적 실현성을 지닌 정치·외교적 압박 조처라는 점에서 사실상 북한의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신호탄을 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를 다른 말로 바꾸면, 한국 정부가 그 동안 별로 실현성이 없어 보이는 하나의 ‘안’으로만 예비해온 무력 통일과 흡수 통일을 할 힘과 의지가 있다는 것을 과시한 것이다.
“고립 아니면 개방 택하라” 통첩
한국 정부는 사실 오랜 전부터 한·미연합사 작전계획 5027(OPLAN 5027)과
응전자 유화계획이라는 우발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이병태 장관이 천명한 ‘신작계 5027’은 북한이 도발하면 평양을 점령해 정권을 무력화하는
사실상의 무력 통일 계획이고, 후자는 우발 상황에 대비한 한국 정부의 독자적 흡수 통일 계획이다. 이홍구 전 통일원장관(현 민주 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 부의장)의 말대로 유사시 또는 우발 상황에 대비한 계획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것이고, 그런 계획이 없다면 이는 정부의 직무 유기이다.
정부는 독일 통일 이후 그런 계획을 체계화했고, 김영삼 정부 이후에는 이를 더욱 구체화했다. 이를테면 작전계획상의 북진 한계선은 군사분계선에서
신의주-평양-원산을 잇는 선을 점령하는 것으로 변경되고, 응전자유화계획상의 난민 대책 또는 구체화하고 있다.
통일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전문가들이 예상하는 시나리오를 상정한 우발 상황은 △북한 체제의 급격한 붕괴 △군부 쿠데타 등으로 인한 김부자 체제의 붕괴 및 북한 정권 유지 △중국식 개방·개혁으로 정권 유지 등이다. 현재의 대북 정책은 첫번째와 세번째에 초점을 맞춘 듯한 인상이다. 그러나 완급에 차이가 있을 뿐 난민 대책을 수정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는 둘 다 궁극적으로 흡수 통일을 겨냥한 것으로, 북한에 대해 고립이 아니면 개방을 택하라는 최후 통첩인 셈이다. 이는 다른 말로 바꾸면 ‘때가 왔다’는 정부의 조심스런 판단이 전략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최후 통첩에는 힘과 의지뿐만 아니라 치밀한 사전 준비가 필요하다. 《시사저널》이 입수한 ‘전후단계 연습’ 보고서 (30쪽 사진
참조)는 지난해 한·미 양국이 작계 5027과 응전자유화계획에 따른 최초의 도상 훈련을 실시했음을 입증해 준다. 이는 또 ‘미국의 한반도 재편
절차’를 다룬 《시사저널》제227호 커버스토리 기사를 재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미 양국은 지난 해
9월9일~11일 용산 주한미군사령부 회의실에서 UFL 연습, 즉 을지·포커스렌스 훈련과 연계하여 작계 5027 전후단계에서 주요 과제를 도출하여
안보정책 개발 연습을 실시했다. 이 연습에는 한·미 양국의 전·현직 민·군 관계자 31명(실시팀 14명, 통제단 17명)이 참가했다.
승부수 던질 만큼 절박한 상황인가
흔히 정치·군사 연습(폴리티컬 밀리터리 게임)이라고 부르는 이것은 정부나 군에서 발생
가능한 위기 상황을 상정해 상황 진전에 따라 정치 · 군사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연습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이 연습을 한 참석자의 말대로
그동안 분리해 실시한 을지·포커스렌스 훈련과 처음으로 연계해 실시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을지훈련은 비상시 정부의 군정권 확립을 위해
벌이는 도상 훈련이다. 도 포커스렌스훈련은 한 · 미 연합사가 군의 작전 등 군령권을 확립하기 위해 실시하는 작전훈련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는
한국 정부의 응전자유화계획에 근거해 실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한·미연합사의 작계 5027에 따른 것이다. 정부는 지난 1월 두 훈련을 올해부터
통합 실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정부와 군은 사실상 지난해부터 유사시 흡수 통일과 무력 통일 모두를 대비한 첫번째 도상 훈련을 한
것이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 연습에서 한 · 미 양국은 전후 통일 절차를 둘러싼 견해 차 (《시사저널》제 227호 참조)를 드러냈지만,
군사분계선을 신의주와 평양 그리고 원산을 잇는 선까지 북상시킴으로써 사실상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까지는 합의를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 · 군사적 압박 전략은 북한에서 전쟁이냐 굴복이냐라는 양자 택일을 강요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홍구 전 통일원장관은 “독일의 경험으로 보듯이 통일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빠르게 하거나 늦출 수 없는 것이지만 피할 수도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흡수 통일을 반대한다고 하지만, 사실 흡수 통일이라는 것이 원한다고 가능한 것도 아니고, 원치 않는다해도 북한이 붕괴할 경우에는 피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가상 상황에 대한 도상 연습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문제는 지금이 과연 불한과 미국 모두에게 ‘전쟁 불사론’(31쪽 전쟁 시나리오 참조)을 유도할지도 모를 승부수를 던져야 할 만큼 절박한 상황이냐라는 점일 것이다.